어룩, 중요 연설문/교부및 성인들의 강론 263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동정 성모의 아침 기도’ 강론에서- 언제나 마리아를 생각하고 부르십시오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동정 성모의 아침 기도’ 강론에서 - 언제나 마리아를 생각하고 부르십시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루카 1,27) 하고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우리가 ‘바다의 별’이라고 풀어서 말하는 이름에 관하여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동정 성모님께 매우 알맞고 적합한 이름입니다. 성모님을 별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것은 별이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빛을 내는 것처럼 동정녀도 아무런 상처 없이 아드님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별빛이 별의 밝기를 감소시키지 않는 것처럼 동정녀의 아드님도 그 동정녀의 완전성을 감소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야곱 가문에서 솟아오른 고귀한 별이십니다. 그 빛은 온 세상을 비추고, 그 광채는 천상에서 찬란히 빛나며, 지하에 깊숙이 스며들고, ..

스텔라 수도원의 복자 이사악 아빠스의 강론 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없이 용서해 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 스텔라 수도원의 복자 이사악 아빠스의 강론 에서 -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없이 용서해 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즉, 죄를 고백함으로써 바쳐지는 영예와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죄의 고백을 해야 하고 그분에게서 죄 사함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느님만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그분에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분이 약한 이와, 지존하신 분이 겸손한 이와 혼인하셨을 때, 노예였던 이를 여왕으로 만드시고 그분의 발 밑에 있던 이를 자기 늑방의 위치로 올리셨습니다. 그녀는 그분의 늑방에서 나와 그분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드님은 본성상 하나이시므로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드님의 것이고 아드님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인..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의 서한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의 서한에서 -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다 어제, 1627년 5월 30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아프리카의 여러 강에서 끌려온 수많은 흑인들이 커다란 배에서 내렸습니다. 우리는 잘 익은 사과와 감귤, 달콤하게 구운 과자와 이름 모를 다른 것들을 바구니 두 개에 담아 들고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오두막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다른 기니 사람들도 그 무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아픈 이들을 찾아갔습니다. 축축하고 더러운 맨바닥에 누워 있는 병자들의 수가 무척 많았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생기도 없이 얼이 빠진 채, 기와나 벽돌 조각이 뒤섞인 흙더미 위에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잠자리..

크레타의 성 안드레아 주교의 강론에서- 옛것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새롭게 되었도다.

+ 크레타의 성 안드레아 주교의 강론에서 - 옛것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새롭게 되었도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결이십니다." 우리를 율법의 문자에서 끌어내시고 또 그 정신에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율법이 성취되었습니다. 입법자이신 그분은 당신 손으로 만물을 만드시고 완성시키시고는 율법의 문자를 그 정신으로 변모시키시고 만물을 당신 안에 총화하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은총으로 살리시어 율법을 은총에 종속시키시고 은총을 율법과 조화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특성을 혼합시키지 않으시고 놀라운 방법으로 모든 것을 변모시키시어 힘겹고 노예 상태에 처해 있으며 억압받는 것을 모두 다 가볍게 해주고 또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이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세상 것들의 노예가 되는..

성 대 레오 교황의‘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에서 - 내 법을 그들 마음에 새겨 주겠다

+ 성 대 레오 교황의‘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에서 - 내 법을 그들 마음에 새겨 주겠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갈릴래아에서 온갖 종류의 병을 고쳐 주실 때, 그분의 기적들이 가져온 명성은 온 시리아에 두루 퍼져 나가 온 유다에서 많은 군중들이 천상의 의사께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는 보지 않는 것을 믿고 모르는 것을 희망하는 데에 느리기 때문에 신적 가르침으로 견고히 되어야 하고 물질적 혜택과 볼 수 있는 기적으로 자극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주님의 자비로운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구원을 가져다 주는 주님의 가르침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외적인 치유를 내적인 치유로 바꾸어 육신들을 고쳐 주신 다음 영혼들도..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 에서- 그리스도인의 지혜

+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 에서 - 그리스도인의 지혜 그 다음 주님은 덧붙여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림'은 육신적 주림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목마름도 물질적 음료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충족을 옳은일에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온갖 신비의 심부에 까지 들어가 주님 자신으로 충만되기를 욕구합니다. 정의의 양식을 탐하고 그런 음료를 목말하 하는 영혼은 행복합니다. 그가 이미 조금이라도 그 감미로움을 맛보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것을 욕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은 보고 맛들여라 ." 는 말씀을 듣고 천상 감미로움의 한 몫을 취하고 지극..

성 대 레오 교황의'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 에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복락.

+ 성 대 레오 교황의'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 에서 - 그리스도의 나라의 복락. 주님은 가난의 복됨에 대해 말씀하신 후 덧붙여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영원한 위로의 약속을 받는 이 슬픔은 이 세상의 슬픔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고통에서 흘러 나오는 그런 애통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누구에게도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성인들의 애통의 본질도 그와 다르고,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눈물의 원인도 그와는 다릅니다. 종교적인 슬픔은 자기 자신의 죄와 타인들의 죄에 대해 우는 데에서 흘러 나옵니다. 그 슬픔은 하느님의 정의가 죄에 대한 책벌을 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악이 일으키는 죄과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

+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 에서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겸손의 축복은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게 얻을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궁핍 가운데서 온유함과 친숙해지고 부유한 사람들은 풍요 가운데서 교만과 친숙해집니다. 그래도 많은 부자들 가운데에서는 자신의 부유함을 오만하게 허세 부리는 데에 보다 선행을 하는 데에 사용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궁핍과 고통을 위로해 주기 위해 베푸는 것이 커다란 이익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덕행에서 온갖 계급과 상태의 사람들이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상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내적 상태에 있어서는 같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적 가치에 있어서 동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성대그레고리오교황의 "에제키엘서에 대한 강론"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에 대해 말하는 데에 내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주님이 이 말씀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견하시는 사람들을 파수꾼이라고 일컬으시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파수꾼은 접근해 오는 것을 먼 데서 보기 위해 늘 높은 곳에서 있습니다. 백성의 파수꾼으로 세워지는 사람도 자기의 열심한 생활로써 높은 데에 서 있으면서 모든 것을 살피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나에게도 정말 마음을 찌르는 말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 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내 입은 설교의 직분을 제대로 이행치 못하고 또 내 생활은 내 입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행..

몸의 성전

+ 오리게네스 사제의 '요한 복음주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의 성전에 대해 말씀 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자기 육신이나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여기서는 유다인들을 뜻합니다.) 즉 아버지의 집을 자신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네들을 성전에서 쫓아낸 데 대해 화가 치밀어 하나의 표적을 청합니다. 그 표적을 통해서, 자기네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구세주께서는 성전에 대해 말씀하시는 듯하지만 실은 당신 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하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