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 교리/공의회 역사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6. 3. 5. 12:20


시기 : 1869. 12. 18 ∼ 1870. 7. 18 / 교황 비오 9세 재위시


배경

비오 9세는 무염시태(Immaculata)를 공의회 이전 1854년에 믿을 교리로 선포한다. 이는 구래(舊來)에서부터 문제시되어온 수위권과 교황 무류권(Infallibilitas)과 관련한 최초의 교황좌 선언으로 당시에 새로운 신조 결정으로 다시 두 가지 사항 이 문제시된다.

결정적으로 1864년 교황은 교회 가르침에 반대되는 내용으로 신자들을 오류로 이끄는 80여개 항목(Syllabus-범신론, 자연주의, 사회주의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데, 이 실라부스가 교의적 효력을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신조화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여기에 다시 무류성 문제가 대두된다.

과정

1867년 베드로 바오로 사도 1800주년 순교 기념식 때 공의회 소집 반포
1869년‘Aeterni Patris’칙서로 공의회 개최 확정
공의회는 신앙에 위협을 가하는 유리, 자연, 세속주의의 오류 시정이 목표였다.
1870년에 일어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독불전쟁)으로 중단되었다.

결과 및 의의

두 가지 칙서가 반포되었는데『Dei Filius』에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재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Pastor Aeternus]

(4차 회의)에서는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황좌 선언의 무류성을 정리하였다.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회의 최고 영수로서 전 교회와 각 교구에 대해 완전히 정상적이고 직접적인 주교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각 교구의 주교는 신앙, 도덕문제 그리고 생활 방식과 교회 통치에 있어 각 교구 주교의 재치권은 인정하면서도 교황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음을 명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