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 교리/공의회 역사

페라라·피렌체 공의회(17차 바젤 세계 공의회 연속)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6. 3. 5. 12:17


시기 : 1438 ∼ 1445


배경

콘스탄츠 공의회의 정신을 이탈, 과격화된 바젤의 잔류 공의회에 대립하여 교황 에우제니우스 4세는 바젤에서 공의회를 옮겨 1438년 1월 8일에 페라라에서 개최했다. 그리고, 동방 교회 대표들도 교황을 지지하여 공의회는 페라라에서 계속되었다. 그 후 공의회는 페라라에 전염병이 돌아 피렌체로 옮겨져서 속행되었다. 이 공의회의 주요 논의점은 바젤 공의회에서부터 계속되어오던 동방 교회와의 일치 문제였는데, 에우제니우스 교황의 참석하에 열린 세계 공의회에서 동서 교회의 통합을 위해 개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콘스탄츠 공의회의 정신을 이탈하여 과격화된 바젤의 잔류 공의회는 더욱더 고립되었다.

과정

1438년 1월 8일에 바젤에 이어 페라라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그리스측 대표단은 700명 가량이었고(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세프 2세, 20명의 수도대주교, 황제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구스 등), 연옥, 필리오케(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는)에 대한 토론을 했으나, 그리스 교회는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나온다고 주장하며 필리오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39년 1월 10일에 페라라에 전염병이 돌아 피렌체로 옮겨졌는데, 많은 논쟁 끝에 그리스 교회는 연옥, 성찬례, 교황 수위권에 대해 라틴 교회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래서 1439년 7월6일 교령‘Laetentur Caeli’가 조인되었다. 그 후 많은 그리스 신자들은 재결합을 반대했지만, 로마 가톨릭은 다른 몇몇 동방 교회들과의 결합에 관한 협의를 마쳤다. 1443년 9월 로마로 옮겨간 공의회의 폐막에 관한 문서 기록은 없다.

결과 및 의의

이 공의회에서 동방 교회의 로마 가톨릭은 연옥과 성찬례, 교황의 수위권, 전권에 대해 교리적 차이에 합일을 보게 되었고, 로마 가톨릭의 교리가 교령‘Laetentur Caeli’에 의해 공식화 됨으로써 이 공의회는 교리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실 페라라-피렌체 공의회는 새로운 공의회는 아니었고, 바젤 공의회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에큐메니컬(교회일치 운동) 공의회로서의 의의를 가지고 있는 페라라-피렌체 공의회는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가 교리적 차이에 대한 합일을 봄으로써 분열을 종식시켰다는데 의의가 있다. 또한 피렌체에서 동서 교회의 통합과 교황권의 재건이 확립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페라라-피렌체-로마의 공의회에서 성립된 동서 교회의 통합은 동방에서는 단명(短命)으로 끝났다. 이는 동방 교회 고래(古來)에 어긋난다는 일반적 감정, 동방 대표단의 일방적 통합에 대한 반발, 오스만투르크에 대한 십자군의 바르나에서의 패배,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바젤 공의회, 공의회주의에 대해 교황권의 재건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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