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 교리/공의회 역사

제5차 라떼란 공의회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6. 3. 5. 12:18


▲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율리오 2세는 호전적이었지만 또한 미켈란젤로와 브라만테 같은 예술가들을 옹호하고 특히 브라만테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 베드로 대성전을 신축하기도 했다. 사진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성 베드로 대성전 일대.
▲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열린 로마 라테라노 대성전 외부 전경

시기 : 1511년 ∼ 1517년

배경

니콜라우스 5세 교황 이후 16세기 이르는 이른바 르네상스 교황은 휴머니스트, 혹은 세속적 정치적 권력자로서 중앙집권적인 일군제적 교황권의 확립을 정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런 민족주의적 정책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 황과 중요한 정치 권력으로서의 교황령에 불만을품은 일부 추기경들은 반 교황적 공의회, 즉 피사 분파 회의를 열어 교황의 권력을 제한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이런 분파적 경향과 교황권 간에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프랑스 왕과 그 주교단의 분파적 경향에 대처하고 교황권의 확립을 위해 율리우스 2세 교황이 1511년 7월 18일 칙서로서 로마의 라떼란 대성전에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이 공의회가 라떼란 공의회이다.

과정

율리우스 2세 교황의 소집 당시에는 교황령의 결합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신성 동맹국들과 프랑스군과의 전쟁으로 예정일 보다 약간 늦게 열렸는데, 여기에서는 피사회의와는 대조적으로 많은 참가자들을 얻은 대공의회가 되었다. 이 개회식 끝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총장인 비테르보의 에기디우스는 그의 설교에서 이 회의의 목적은 사랑에 의해 교회의 오점을 씻어버리고, 옛날의 청순함과 빛남을 재현하는 일이라고 호소했다. 이 공의회는 피렌체 공의회와 마찬가지로 교황과 더불어 교황권 아래에서 열린 공의회로 그가 의사 규정을 정하고 임원을  임명했다. 이것은 제1총회에서 교황 칙서로 선포되었고, 제2총회에서는 지상의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으로, 제3총회에서는 피사회의의 무효성 확인으로 확인되었는며, 제5총회에서는 교황권의 확립과 교회의 쇄신을 위해 성직매매 금지를 확인하는 결정을 내렸다. 1517년 3월 16일 제12총회를 끝으로 폐회되었다.

율리우스 2세 교황은 교황령의 독립 자유와 무력에 의한 확립에 온 힘을 다 쏟았고, 동시에 교회의 내적 개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율리우스 2세 교황의 서거 후 교황에 오른 레오 10세 때도 공의회는 계속되었고, 로마 교황은‘모든 공의회 위에서는 권위를 갖고, 소집, 해산하는 전권과 전권력을 갖는다’라는 보니파시우스 8세의 칙서에 의해 전개된‘ Pastor Aeternus’가 승인되었다. 또 교횡의 개혁에 있어서 성직록, 교회직의 수여, 전직, 추기경, 일반성직자, 신자들의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규정까지 제정되었다. 1517년 3월 16일 제12총회를 끝으로 폐회되었다.

결과 및 의의

공의회는 프랑스 등의 세속 군주권에 대한 교황의 세속권을 어느 정도 재건하고, 피사의 분파 회의를 대표한 공의회주의의 잔여 세력에 대해 교황주의의 입장을 재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공의회의 중요 목표였던 개혁도 일단 입법화되었다. 그러나 성직록 제도의 근본과 위탁에 의한 수도원 지배의 금지에서 추기경의 제외 등의 결함도 있었다. 또한 당시 교회가 필요로 했던 더욱 광범위하고 또 내면적인 깊은 개혁 요구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했다는 점도 있었다. 즉 개혁도 솔선해서 자신의 생활 안에 실현하려는 개혁 정신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떼란 공의회의 개혁의 노력으로 일단 교황권은 재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라떼란 공의회의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폐막 후 얼마 가지 않아서 루터의 개혁운동이 일어나 교회는 새로운 혁명의 조류 안에 놓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