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예화, 인용

서부 전선 이상없다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4. 7. 5. 13:25

서부 전선 이상없다 (레마르크) △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것

이 장편은 수기 형식을 빌린 훌륭한 전쟁문학인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독일군 서부 전선의 전황을 기록으로 남긴 종합보고서이다. 전쟁의 발발, 징집과 훈련, 전선에로의 투입과 전투, 전우애와 휴가, 부대 이동과 전사ㅡ이를테면 전쟁이 수반하는 보편적인 양상에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극히 개인의,특수한 체험을 그려낸다. 왜냐하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개개인'이 모인 여럿이고,작가는 그개개인의 행로를 추적하니까.

<서부 전선 이상없다>는 소년 지원병인 파울 보이머란 사병이 전사하기 직전까지의 전중(戰中) 수기이다. 전쟁이 돌발하지 않았다면 아마 어려운 가정형편을 돕기 위해 가게 점원쯤 되어 소시민으로 살아나갈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생의 의지, 혹은 가족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광적인 애국 열풍에 휘말려 입대하게 된다. 그것은 프랑스어 과목을 담당하는 담임 칸토레크 선생이 맹목적으로 학생들을 부추겨서 18세의 나이에 전선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파울 보이머가 1년여의 기나긴 전선생활 끝에, 믿을 수 없을만큼 변모한 인간이 되어 첫 휴가로 고향 시에 들렀을때 그담임선생도 징집당해 국민군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조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파울의 동급생이었다. 동급생들의 칸토레크 선생에게로 향한 증오심은 공감을 얻기에 남음이 있다. 때문에 그를 향해 "아예 입대할 생각이라고는 없었던 요제프 벰도 끼어 있었단 말야. 그는 징집당할 연령보다 3개월 앞서 전사했다." 최소한 조금은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공명심에만 충실하여 철없는 제자에게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그때 담임선생의 말에 따라 지원했던 동급생들은 다 전사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파울 보이머가 소속된 한 연대의 2중대 병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중대에 파울의 클라스메이트로서 4명이 배속되어 있었는데, 알베레트 크로프, 뮐러 5세, 베르팅크 레어가 이들이다. 이들의 훈련 조교였던 우편배달부 출신인 힘멜슈토츠는 또 다른 측면에서 비열하고 잔혹한 인간이다.

군대에는 꼭 이런 인간형이 있게 마련이다. 천성이 악종이든지, 상급자로서의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졸장부 근성으로 휘하의 사병을 무지막지하게 다루며 고통을 가하는 병영 새디스트가 말이다. 하사관 힘멜슈토츠에게 시달림을 받은 중대원들은 그 역작용으로 참혹스런 전장을 견뎌내는 내구력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막판에까지 몰리자 실수한 듯이 똥통을 그의 바짓가랭이 쪽에 쏟게 함으로써 도전하고, 급기야 치열한 전투에서 몰아부쳐 항복을 얻어내기까지 한다.

위의 사례들은 전투와는 직접적 상관이 없는, 즉 전쟁과 부대에 연관되어 파생된 지엽적인 병폐 현상이다. 전선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영국,프랑스군과 대치한 서부 전선은 연일 포탄, 조명탄, 독가스, 드르륵 갈겨대는 기관총 소리와 작열하는 화염과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참호 속뿐이다. 생과 사의 연대감으로 인해 짙은 전우애가 자생적으로 에워싼다. 이것은 전투에서 파생되는 긍정적이며 지극히 아름다운 인간애이다. 이 장편은 이런 면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가장 먼저 자원을 원치 않았던 벰이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곧이어 파울과 친하게 지냈던 켐머리히가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어 다리 절단수술을 받았지만 야전병원에서 숨졌다. 영국군 포대의 집중포화와 프랑스군과의 백병전을 통해 2중대원 150명이 80명으로 줄어들었는가 하면, 다시 보충병력을 받아들여 재편성되지만 나중에는 고작 30여 명으로 남기도 했다.

죽음 다음으로 고통스런 것은 배식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전선에서의 배고픔이었다. 첫머리에서 급양하사관이 병력 손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 급식을 장만해 두었으므로 두 명분의 배식을 받게 되어 희희낙락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하다. 전쟁통의 식량난으로 굶주림은 전후방이 매한가지다.

중반에 와서, 파울이 휴가중에 목도한 러시아군 포로를 수용한 병영의 한 대목은 이의 압권이다. '그들은 우리 병사(兵舍) 주위를 슬금슬금 돌아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졌다. 거기서 무엇을 발견 할 것인가 상상해 볼 일이다. 우리들의 급식은 벌써 궁핍한데다 무엇보다도 질이 나빴다. 여섯 동강을 내어 물에 넣어 삶은 무에 흙투성이의 당근 뿌리다. 썩은 얼룩이 있는 감자는 산해진미였다.'

때문에 점령지인 프랑스인 마을의 여인들이 약간의 먹을 것에 마음이 동해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는것고 하등 놀라울 바 못된다. 파울도 밤중에 운하를 헤엄쳐 건너가 프랑스 여인과 동침을 하고는, 병영 위안부와의 접촉에서 느끼지 못했던 살뜰한 여인의 체취에 흡족해 하는 장면은 처참한 포연 속에서 한 컷의 노변정담과 같다.

상급자의 부당한 기압, 부대 이동에 따른 불안과 피로, 연속포화, 저지사격, 탄막, 지뢰, 독가스, 전차, 기관총, 수류탄의 홍수 속에서 풀잎 하나보다 덧없을 생명을 부지하려는 안간힘, 살이 찢긴 채 나뒹구는 사체, 게다가 지독한 수면 부족과 굶주림ㅡㅡ미쳐버리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인 게 전선이다. 어찌 세강을 바라보는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변모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 작자 레마르크는 이 책의 헌사(獻詞)를 이렇게 쓰고있다.

'이 책은 고발도 아니요 고백도 아니다. 이것ㅡㅡ설사 유탄에서 피해 왔다 하더라도ㅡㅡ전쟁에 의하여 파괴된 한 세대에 관해 보고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휴가로 귀가했을 때, 애정어린 어머니가 "일선은 요즈음에 독가스라든가 뭐라든가 하는 것 때문에 무섭다더라."라고 말하는 순간, 혹은 아버지가 전투 얘기를 해달라고 무심코 말할 때 그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 게다가 지구사령부에 신고하고 나오는 길에 소령에게 경례를 부치지 않았다고 해서 꾸중을 듣게 되자, 파울은 자기가 불과 한 시간 전에 전선에서 휴가로 돌아왔다고 했음에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권위를 충족시키려 드는 이 불가해함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전쟁이 일어나면 세상에는 진정한 전우애와 개새끼들뿐이다 !

참으로 기적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2중대원 중 네 명의 클라스메이트는 늦게까지 살아 있었다. 그런데 점령지 수색을 맡았던 어느 날, 적의 포탄 세례를 받게 되어 파울과 알베레트가 함께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어다. 파울은 부상이 심하지 않아 치료를 받은 후 원대복귀되고, 알베레트는 결국 다리를 절단당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그는 살아 남았을 법하다).

오래토록 남았던 뮐러는 조명탄이 위장 속까지 파고 들어가 절명하고(그러고도 완전한 제 정신과 무서운 고통을 가진 채 반 시간이나 더 살았단다), 베르팅크는 '가슴에 총알을 맞았다. 잠시 후에 파편이 그의 턱을 작살냈다. 같은 파편이 그러고도 힘이 남아서 그의 허리를 찢어발겨' 전사했다.

1918년 여름의 가장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치르고도 파울 보이머는 생존자 중의 하나였다. 드디어 가을, 종전이 무르익어 가고 있어 병사들은 누구나가 평화와 휴전에 대해 이야기하게끔 되었다. 이 가공할 전쟁과 전투 이야기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극히 담담한(그래서 한껏 시니컬한) 문장이 받쳐져 있다.

'여기까지 써온 지원병 파울 보이머는 1918년 10월의 어느날 전사했다. 그날은 온 전선이 너무도 평온하고 조용했으므로 군사 보고서에는 '서부 전선 이상 없음, 보고 사항 없음'이라는 한 줄의 글로써 그쳐 있었다.'

물론 서부 전선이 이상이 없었고, 이 세상 또한 이상이 없다. 그러나 한 인간ㅡㅡ평범하지만 조금도 악하지 않는 한 사람의 죽음이 간과될 수 있는 건 분명 이상이 있는, 즉 미친 시대의 실상이다. 이 작품으로 레마르크는 일약 전쟁문학의 주요 작가로, 또 유럽 독서계를 강타한 신예작가로 부상했다. 그 후, 전쟁의 파괴성을 전선이 아닌, 후방 망명지인 파리를 무대로 하여 한 외과의사의 고독한 방황을 통해 묘사한 장편 <개선문>으로 그는 세계적 대작가 반열에 뛰어 올랐던 것이다.

■ 레마르크(Remarque, E.M. ; 1898~1970)

독일의 소설가.

무명의 저널리스트였다가 제1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소설 <서부 전선 이상없다>로 세계적 인기작가로 부상했다. 이 작품은 전쟁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영화화되어 관객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1931년 <귀로>를 발표하였으나 이태 후에 나치에 의해 분서(焚書)의 처분을 받자 국외로 도피, 1947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어 정착했다. 대표작인 <개선문>은 나치에 쫓기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려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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