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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록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4. 7. 5. 13:23

몽유록(夢遊錄) (元 昊) △

원자허(元子虛)란 사람이 있었다. 비분강개한 선비로서 기개가 남달리 뛰어났던 까닭에 오히려 세상에 용납되지 못해서 벼슬 길도 시원치 못했다. 집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관운이 없는 것을 비유하면 옛날 중국 오대(五代)때 나은(羅隱)과 같았고, 집이 가난한 것을 말하자면 송나라 때의 원헌(原憲)과 같았다. 나은은 이름 높은 시인이었으나 열 번이나 과거에 낙방하였고, 원헌은 공자의 손자로서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사람이다.

이처럼 원자허는 비운의 쓰라림과 가난의 슬픔을 겪었다. 낮에는 밭에 나가서 발갈이하고 밤에는 돌아와 옛 성현들의 글을 읽었다. 불을 켤 기름이 없어 바람벽을 뚫어 이웃집 불빛을 빌어 책을 비추어 보기도 하고, 주머니에 반딧불을 넣어 두었다가 꺼내어 책 위에 놓고 글을 읽기도 하면서, 꺼내어 책 위에 놓고 글을 읽기도 하면서, 시험해 보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의 지조와 높은 절개가 이와 같았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고대의 역사를 즐겨 공부했다. 고대의 역사를 읽으면서 일대의 왕조가 패망하여 나라의 운명이 다하고 국세가 꺾이는 대목에 이르면 그는 항상 책을 덮고 그 위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과거의 비통한 역사적 사실이 마치 오늘의 자신과 같은 불우하고 무력한 인물들 때문에 일어났던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을도 깊어 가는 어느 날 저녁.

원자허는 달빛을 빌어 책을 뒤적이다가 밤이 이슥해졌다. 몸이 노곤하여 책상에 한 팔을 얹고 기대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갑자기 그는 몸이 가벼워진 듯하더니 몸이 어느새 너울너울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마치 온몸이 찬 바람에 휘말려 치솟는 듯, 날개가 달린 신선으로 화한 듯했다.

이윽고 몸이 멈추자 그곳은 어떤 강 언덕이 아닌가? 긴 강물은 굽이굽이 돌아 흐르고, 사방에 산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벌써 밤이 깊었는지, 삼라만상은 고요히 깊은 잠 속에 빠지고 오직 보이는 것은 대낮처럼 밝은 달빛과 비단 띠를 풀어놓은 듯한 강물뿐이었다. 적막한 고요 속에 바람은 갈대 숲 위로 우수수 불어 가고, 찬이슬은 단풍 숲에 떨어지는 듯.

그는 추연히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천년동안 쌓이고 쌓인 모든 시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듯, 아! 하고 긴 한숨 소리와 함께 낭랑한 소리로 시 한 구절을 읊었다.

『서린 한은 사무쳐 강심을 울리고, / 갈대꽃 단풍잎은 우수수 소리치네. / 이곳은 분명 장사의 언덕인가, / 대낮 같은 달빛 아래 영령은 어디 갔나.』

시를 읊으면서 그는 이리저리 거닐며 한이 서린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홀연 멀리서 이리로 가까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문득 갈대꽃 사이에서 잘 생긴 사나이 하나가 나타났다. 머리에는 폭건(幅巾)을 쓰고 몸에는 야인의 복장을 하였는데, 기상이 맑고 깨끗하며 미목이 수려하여 옛날 수양산에서 죽은 백이 숙제의 높은 절의가 및났다. 그는 가까이 와서 허리를 굽혔다.

『자허는 어찌 이렇게 늦으셨소. 우리 임금께서 맞이하려 하신 지 오래요.』

자허는 그 사람이 산에서 나온 도깨비나 물귀신이 아닌가 하여 한참 동안 멍하니 대답을 하지 못햇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그 잘 생긴 용모와 한가롭고 단아한 기풍을 저도 모르게 흠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허는 마침내 사나이를 따라 백여 보 남짓 걸어갔다. 앞에는 정자 하나가 우뚝 강을 굽어보며 서 있고 한 사람이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왕자(王者)의 풍도가 완연했다. 그밖에 다섯 사람이 모시고 앉아 있는데, 복장이 모두 사대부 등 높은 벼슬아치들의 옷을 입었고, 각각 차등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은 세상에서도 뛰어난 풍모와 당당한 위엄이 있었다. 늠름한 풍채는 가슴 속에 옛날 고마(叩馬)와 도해(蹈海)의 기개를 품은 듯, 오장육부에 경천봉일(擎天捧日)의 충절을 간직한 듯, 진실로 「어린 임금과 백리의 땅을 맡겨 사명을 다할」그런 인물들이었다.

자허가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은 모두 마중하였다. 자허는 먼저 임금에게 나아가 배알하고 물러가서 각각 자리가 마련되기를 기다려 끝 자리에 앉았다. 자허의 윗자리에는 아까 자허를 데리고 온 폭건을 쓴 사내가 앉았고, 그 위에는 다섯 사람이 각기 순서대로 앉았다. 자허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자못 불안하기만 했다.

왕이 입을 열었다.

『내 그대의 꽃다운 이름을 듣고 마음 속에 그러워한 지 오래요. 오늘 이 좋은 달밤에 만났으니, 그대는 조금도 의아하게 생각하지 마오.』

자허는 몸둘 바를 모르며 일어나 은의에 감사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고금을 통하여 나라의 흥하고 망한 것을 논하면서 이야기의 꽃이 피었다. 모두들 해박한 지식을 토로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폭건을 쓴 이가 휘이 한숨을 내뿜으면서 말했다.

『옛날의 요임금 순임금이나 탕왕 무왕은 만나고 죄인인 줄 아옵니다. 후세의 여우 같은 자들이 선위를 빙자하여 신하로서 임금을 치고도 정의와 명분을 내세웠으니 말입니다. 천년동안 이 같은 풍조가 도도히 흘러 내려왔으니 마침내 구할 길이 없게 되었옵니다. 아아! 이네 임금이야말로 도둑의 시초라고 하겠습니다.』

말이 채 끝나지 않아서 왕은 몸을 고치고 바로 앉았다.

『저런, 그게 무슨 소리요? 네 임금의 덕을 지니고 네 임금의 시대에 살았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겠소? 네 임금의 덕도 없고 네 임금의 시대에 살지 않았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 저 네 임금에게 어찌 죄가 있다 하겠소. 오직 그들의 이름을 빙자하는 자들이 도적일 뿐이오.』

폭건을 쓴 이는 손을 이마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한다.

『마음 속에 불평이 쌓인 나머지 부지중에 지나친 분풀이를 하였사옵니다.』

『지나친 사과는 접어 두시오. 오늘은 좋은 손님들로 자리가 가득하니 다른 일로 설왕설래할 것은 없소. 달도 밝고 바람도 맑으니 이런 밤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왕은 비단옷을 벗어 주며 강촌(江村)에 내려가 술을 사오게 했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왕은 잔을 든 채로 슬픔을 못 이기는 듯 흐느끼면서 여섯 사람을 돌아보았다.

『경들은 이제 각기 자기의 뜻을 말하여 마음 속 깊은 원한을 풀어보는 것이 어떠할꼬.』

여섯 사람이 대답했다.

『전하께옵서 먼저 노래를 지으시면 신 등이 뒤를 이을까 합니다.』

왕은 초연히 옷깃을 여미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듯, 한 가락 읊었다.

『강물은 울어울어 끝없이 흘러 / 기나긴 그 시름 이 물과 같도다. / 살아서는 임금이나 죽으면 고혼이니 / 새 왕은 거짓되이 제(帝)로 높이는도다. / 고국의 백성들은 초(楚)나라로 옮아 가고 / 6, 7인의 신하만이 죽음으로 따르네. / 오늘 저녁 어쩌다가 강루(江樓)에 모였는가 / 강물에 비친 달은 이내 수심 더해 주고 / 슬픈 노래 한 가락에 천지는 아득하네.』

왕의 노래가 끝나자 다섯 사람이 각기 절구 한 수씩을 읊었다. 첫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먼저 읊었다.

『부끄러운 내 재주, 어린 임금 못 받들고 / 나라 잃고 임금 욕 뵈고 이 몸마저 버렸어라. / 이제껏 살아있어 천지에 부끄러운데, / 그 당시에 일찍 꾀하지 못한 것 못내 한하노라.』

다음은 두 번째 사람이었다.

『선조(先朝)의 부름 받아 사랑도 높았어라. / 나라 일이 위태로우니 이 몸 어이 아낄손가. / 가련하다 만사는 물거품 되고, 모진 이름만 남았으니, / 의(義)와 인(仁)을 다하여 부자(父子)가 같이했네.』

다음 차례는 세 번째였다.

『평생의 장한 절개 벼슬로 더럽힐까 / 마음속에 아직도 고사리 캘 생각 품었네. / 이 몸이 한 번 죽는 것 말해 무엇할까 / 고운 님 여의고 못내 그려 우노라.』

다음 사람은 네 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었다.

『미미한 몸일망정 담량은 높고 커서 / 어찌 생을 아껴 나라 망함 참고 보리. / 죽을 때 시 한수는 언사도 좋았거니 / 두 마음 품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노라.』

다섯 번째.

『슬프다, 그날의 나의 뜻 어떠했던가. / 다만 죽을 뿐 뒷날 명예 논할손가. / 천추에 남은 한을 못내 씻지 못하니 / 슬프다, 집현전에서 상공 글을 초하였네.』

다음에는 폭건을 쓴 사람이 서글픈 모습으로 머리를 긁으면서 길게 읊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산하는 옛날과 다른데 / 새로 지은 정자에서 슬픔을 함께 하네. / 흥망에 놀란 마음 간장을 찢는데 / 통분한 이 충절 눈물겨워 하노라.

율리(栗里)의 청풍에 도연명은 늙어가 / 수양산 차가운 달빛 아래 백이는 굶주리네. / 한 가닥 청사(靑史)가 후세에 빛나리니 / 천추의 선악에 사표가 되리로다.』

읊기를 끝내자 그는 자허에게 차례를 돌렸다.

자허는 본래부터 강개한 사람이 아닌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픈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지나간 옛일을 누구에게 물으리 / 황산(黃山)의 한 줌의 언덕뿐이리. / 원하은 깊고 깊어 정위(精衛)처럼 죽었는가 / 영혼은 끊어지고 접동새만 우는구나.

고국엔 어느 때나 돌아가나 / 강루에 올라 이 하루를 노니네. / 슬프게 불러 보는 몇 가락의 노래여 / 달은 지고 갈대꽃 우수수 부네.』

노래가 끝나자 만좌는 모두 추연히 눈물을 흘렸다.

오래지 않아서 어떤 기이한 사내 한 사람이 강루에 나타났다. 범같이 허걸찬 무사였다. 몸은 보통 사람보다 크고, 씩씩한 기상이 빼어나게 영용했다. 대추빛 얼굴에 별빛 같은 눈, 옛날 문천상(文天祥)의 충의와 진중자(陳仲子)의 맑은 기상을 아울러 지닌 것 같았고, 늠름한 위풍은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우러나오게 하였다.

그 사람은 왕에게 배알하고 나서 다섯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 썩은 선비들과 함께 대사를 성취시키려 했으니.』

그는 곧 칼을 뽑아 들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강개한 가운데 노래 소리는 슬픔과 원한이 뒤얽혀 큰 쇠북이 울리는 것 같았다.

『소슬한 바람 속에 나뭇잎은 지고 물결은 찬데 / 칼을 안고 휘파람 부니 / 북두성은 기울었네. / 살아서는 충의요 죽어서는 굳센 혼백 / 흉금에 품은 뜻은 하나의 둥근 달덩어리일세 / 시작부터 잘못 되었으니, 썩은 선비들을 책망해 무엇하리.』

노래가 끝나기 전에 달빛은 검게 변하면서 수심 속에 구름에 가려지고 , 비는 눈물처럼 뿌리고 바람은 답답한 트림을 토하는 듯, 한바탕 천둥 변개가 요란하더니 일순가에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았다.

자허는 놀라 깨어났다. 꿈이었다.

자허의 친구 매월거사(每月居士)는 꿈 이야기를 듣고 통분해 마지않았다.

『대개 예로부터 임금이 어둡고 신하가 혼미하면 이것을 뒤엎어 버리고 마침내 자기가 나라를 차지한 자가 많았다. 이제 그 임금을 보면 현명한 군주가 틀림이 없고, 그 여섯 사람 또한 모두가 충의지사들인데, 이러한 신하로서 이 같은 명군을 모셨으면서도 그처럼 참혹하게 패망의 화를 당했단 말인가. 아아! 나라의 대세가 이렇게 만든 것일까? 그렇다면 불가불 시(時)와 세(勢)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늘의 뜻이 그러햇다면 복을 주고 선을 주고 재앙을 주는 것이 천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하늘의 뜻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정말 막막해서 그 진리를 자세히 말할 수가 없다. 유유한 이 누리 속에 한 가닥 지사의 회포를 돋굴 뿐이로다.』

그는 곧 시 한 수를 읊었다.

『만고에 비길 데 없는 슬픈 사연도 / 창공을 스쳐 날아가는 한 마리 새. / 찬 연기는 동작대를 에워싸고 / 우거진 마른 풀은 장화궁을 덮었네. /

아아! 요순은 갈수록 멀어지고 / 탕무는 갈수록 어지럽네. / 달은 밝고 상강(湘江)의 물은 넓으니 / 근심스레 들려 오는 죽지(竹枝)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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