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 (토마스 하디) △
운명에 희롱당하는 여인의 생애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재미 이상의 탐구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 속에서 자연과 인생의 섭리를 깨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의 진실을 찾아보려는 노력에 말미암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리성보다는 역시 '재미의 맛'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것이 보다 더 문학의 본질 혹은 속성에 가까울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두 가지 측면, 즉 '재미와 진실과의 조우'를 충족시켜 주는 세계명작으로서 <테스>가 단연 손꼽힌다. 이 장편은 한마디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이라는 커다란 의지에 의해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내동댕이쳐지고 끝없는 불행의 나락에 떨어지는가를 면도칼로 자르듯 냉혹하고 명징하게 표현해 보인 소설이다.
인간이 운명에 의해서 희롱당하고 비극적 삶을 거듭하는 주제는 예로부터 많은 작가들이 즐겨 다루어 왔다. 희랍비극들은 대개 장엄하고 강렬한 비극을 노래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이다. 현대소설에 와선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또한 그러하다.
테스의 처녀 시절의 모습은 <여자의 일생>에서 수도원을 나오는 쟌 못지 않게 청순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쟌보다 더 건강하고 명랑하며 발랄하다는 점 뿐이다.
'행렬 속의 젊은 처녀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몹시 미목이 아름다운 처녀였다. 아마 그만큼 아름다운 처녀는 그 밖에도 몇몇은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감정이 나타나기 쉬운 함박꽃 같은 입과 천진스런 큰 눈은, 얼굴의 빛깔과 윤곽에다 더욱더 풍부한 표정을 지어주는데, 모두들 흰옷을 차려입은 행렬 속에서 이처럼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단장을 자랑할 만한 처녀는 오직 테스뿐이다.'
이런 주인공이 야수 같은 사내 알레크 때문에 순결을 잃고 사랑하는 클레어로부터는 '순결을 상실했다'는 고백 때문에 신촌초에 버림을 받으며, 드디어는 알레크를 살해하는 세 가지의 큰 비극에 휘말리게 됨으써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다.
이야말로 맹목적 의지(운명)이 장난이 아닐수 없겠다. 우리는 이런 작품을 읽음으로써 이 세계 질서의 엄청난 오류를 일별하게 되고, 우리 생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정황을 이해하게도 된다.
토머스 하디가 두메의 초옥에서 태어났을 때, 의사는 사산(死産)인 줄 알고 태아를 방 한쪽 구석에 밀쳐 놓았는데, 해산 구완을 하던 이웃 아낙네가 죽지 않았음을 보고는 살려냈다는 에피소드가 전한다. 염세주의자인 작자 하디는 태생에서부터 벌써 음산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그의 문학에는,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맹목적인 내재의식(內在意識)이라는 생각과, 또 유전과 환경이 인생을 절대적으로 좌우한다는 철저한 운명론이 명백하게 나타나있다. 이러한 규정은 하디의 연구가들이 <테스>에 근거를 두었다고 믿어질만큼 이 작품에 흐르는 내용 이를테면 주인공이 수렁에 빠지는 발단과 사건의 전개, 결구 등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 그 점을 작가는 완벽하게 뒷받침이라도 하듯 작품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줄을 삽입하고 있다
'드디어 심판은 끝났다. 뭇 신들, 아이스퀼로스의 말을 빌리면 거느리는 자는 마침네 테스에 대한 희롱을 끝마쳤던 것이다.
'드디어 심판은 끝났다. 뭇 신들, 아이스퀼로스의 말을 빌리면 거느리는 자는 마침내 테스에 대한 희롱을 끝마쳤던 것이다. 그러나 더버빌네 옛 조상은 기사(騎士)들이며 귀부인네들은 무심코 무덤 속에서 잠들고 있었다.'
앞에서 지적한 '맹목적'이란 말과 여기에서의 '희롱'은 전혀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한 가련한 여인이 걷는 그토록 참혹한 생애는 신의 희롱이 아니면 무엇일까? 혹은 더버빌네 옛 조상(기사며 귀부인네들)들이 저지른 죄악의 업보를 이 죄 없는 후손이 받는다는 말인가. 어떻든 주인공의 의사에 반해서, 그의 의지와 노력이 도저희 미치지 못하는 어떤 다른 힘의 작위(作爲)에 의해서 버림받고 짓밟히는 줄거리에서 우리는 너무도 명료하게 하디의 페시미즘을 만나게 된다.
테스는 선대(先代)에는 영화를 누리던 명문 집안이었으나, 이제는 말할 수 없이 몰락한 더버빌가의 직계후손인 잭 더버필드의 맏딸이다. 그녀는 이 빈한한 마로트 농촌에서 다른 누구보다 순결하고, 활기차고 아름답게 성장했다. 짓궂은 신의 작희(作戱)만 없었던들 그녀에게 불행을 그림자가 스며들 틈바구니가, 더구나 오랜 고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파멸되는 비극 따위는 추호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처녀로 자라났다.
테스는 그녀가 앞으로 만나 진정으로 사랑할 에인젤 클래어를 마을의 야유회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테스가 가계를 도울 작정으로 저 지주집의 음험스런 알레크 더버빌을 만나게 되고, 육욕의 노예가 된 그에게 순결을 빼앗김으로 인해 운명의 유희욕에 첫 번째의 만족감을 주게 된다. 그녀의 집이 가난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재난에 빠지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과연 '유전과 환경이 인생을 절대적으로 좌우한다'는 작가의 인생관을 엿보게 한다.
그건 배경적 상황이니 중요한 모티브의 아닐는지는 모른다. 만일 테스가 마을의 야유회 때 그 미지의 청년(클레어)을 보지만 않았더라도 이 재난은 이토록 상승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좋고 바람직한 사람과는 만나지 못하고(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건이고, 서로의 뜻이 그걸 원했는데도) 하필이면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마주쳐야 할까?
이러한 의문은 이 작품이 발표되자 많은 세인(世人)들이 '비타협적인 내용'을 들어 비난하게 되는 근거를 제공한 셈이다. 그러나 작자 하디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완고하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그의 어두운 '운명론'은 그에 대한 변명을 인간 외적인 데로 들리고 있다.
테스는 자기를 짓밟은 알레크의 본심은 깨닫게 되자 홀연히 그 집을 뛰쳐나온다. 그 후, 이제 와서는 만나서 안될 에인젤 클래어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사이로 끌려든다. 테스는 클래어가 청혼하였을 때 자기의 과거를 솔직히 고백하려 한다. 그로 인하여 사랑을 잃게 되더라도, 또는 자기의 고백하려 한다. 그로 인하여 사랑을 잃게 되더라도, 또는 자기의 고백을 듣고도 그의 사랑이 변함이 없으리라고 생각할 만큼 테스는 정직했고, 사랑의 힘을 믿는 순진한 여인이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클래어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 신혼의 첫날밤에 서로의 과거를 고백하기로 하였는데 클래어의 방탕생활에 대한 고백을 들은 다음 테스도 당연히 자기의 '원하지 않았던 과오'도 용서받게 될 줄로 믿고 알레크와의 관계를 밝히게 된다. 그러나 상황은 딴판으로 돌변했다. '성미는 대체로 부드럽고 다정한 편이 었으나, 그 밑바닥에는 마치 부드러운 옥토 속에 광맥이 한줄기 뻗치고 있듯이 꼬치꼬치 캐는 딱딱한 논리의 광맥이 가로놓여 있는' 이상주의적 결벽성을 가진 클래어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自然人) 테스를 사랑했던 그, 그녀를 아내로 맞기 위해서는 신분도 환경도 가족들의 반대도 감내할 수 있었던 클래어가 순결 문제에 있어서 한 치의 이해도, 감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테스를 용서해 주지 않은 채 그녀의 곁을 떠나 아무 기약 없이 브라질로 가 버린다. 가련한 테스는 다시 그 스스로를 마음껏 희롱할 수 있는 운명 앞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꼴이 되었다.
사랑하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테스는 육체적으나 정신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삶에 부딪힌다. 첫 번 남자에게 몸을 버리고 사생아까지 낳았던 테스, 그 죄의 씨는 간호의 보람도 없이 병이 들어 죽어 암장하고 말았었다. 그런 불행에서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타곳에서 새 남자와 결혼했으나 곧 헤어지고 말았으니, 이토록 남루하게 전락한 이 여인을 사람들은 곱게 보아주려 하지 않았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테스는 사랑하는 클래어가 돌아와 줄 날을 기다렸다. 이처럼 남편을 기다리다가 역경을 이용하여 다시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첩 생활을 강요해 왔다. 이때 테스가 클래어에게 보낸 편지는 가장 인간적인 목소리요. 자신의 변절을 충분히 옹호할 호소력을 띠는 것이었다. '아, 어째서 당신은 제게 이다지도 어처구니없는 대접을 하시나요, 에인젤! 저는 이런 대접을 받을만큼 나쁜 여자는 아니에요. 곰곰 생각해 보니 저도 당신을 용서해 드릴 수는 없어요.' 라고 항변을 한 후 그녀는 전혀 마음에도 없는 알레크의 품에 안긴다.
그때서야 클래어는 주위 친구들의 충고에 의해 자기의 잘못된 판단을 뉘우치고 귀국하여 테스를 찾아온다. 이 장면에 이르러선 신의 트억이 너무 심하다는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테스는 자기를 사랑하는 클래어와의 행복을 깨뜨리고, 영원히 갈라 놓게 한 장본인인 알레크를 극도로 흥분한 끝에 식도로 찔러 죽인다. 방문한 클래어에게 욕설을 퍼붓는 알레크를 보고는 참지 못했던 것이다.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와 클래어를 만나고, 며칠동안 도피생활에서 비로서 영(靈)과 육(肉)이 완전히 합치되는 사랑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이런 행복이 오래 갈 리 없으니 드디어 뒤쫓아온 추격자들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검정 깃발이 나부끼는 형무소에서 처형당한다. 이로써 테스는 자신을 그토록 짓밟아 놓았던 운명의 질긴 울타린 밖으로 풀려난 것이다.
하디는 이 장편소설의 원제(原題) <더버빌가의 테스>에서 <순결한 여인>이란 부제를 붙여 놓았다. 이즈음의 가치기준이나. 도덕률로 본다면 테스가 순결한 여인임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겠지만, 이 작품이 발표할 당신의 영국사회에서는 이것이 도전으로 간주되었다한다. 간음한 여인 막달레나 마리아에게조차 돌을 던지지 못했던 유태인의 이스라엘 시대보다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 때에는 더 편협하고 고루한 도덕률을 지녔던가 보다. 당시 대인들의 견해로는 테스는 두 남자 사이를 왕래한 '더럽혀진 여인'이고, 그녀를 차지한 남자를 살해한 악녀로만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과연 그녀를 완전히 경멸할 요건으로 충분할까? 인간의 타락을 그 근원적 원인의 책임성은 따지지 않고 이처럼 사회제도, 혹은 관습적 윤리관으로 죄를 재단할 때 그 진실성은 참으로 의심스럽다.
하디는 이 작품의 곳곳에서 정신적인 정조(貞操)를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가련한 주인공 테스로 하여금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회에 인색하지 않았다. 알레크에게 갈 수밖에 없었던 사태의 근원에는 책임의 소재가 클래어에게 주어진다.
더 나아가서 클래어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를 구원하는 데에 서슴지 않는다.
그토록 험난한 운명 앞에서 인간의 힘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으로도 구원은 내려질 것 같다. 알레크를 살해한 것은 물론 현실적으로 볼 땐 죄악의 중첩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진실로 비추어 보면 그것은 자기의 해방이요 운명의 굴레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절대절명의 몸부림일 수 있을 터이다.
그리하여 둘은 그들이 원하는 시간을 획득했다.
'그들은 바깥엔 얼씬하고 싶지도 않았다. 낮이 가고 밤이 오고, 이튿날과 또 그 이튿날이 다가오고 해서 마침내 저들도 미처 모르는 겨를에 닷새 동안이 아무도 모르는 피신생활 속에서 지나가 버렸다. 이와 같이 평화스러운 생활을 건드리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날씨의 변화만이 유일한 현상이었고, 뉴프레스트의 참새들만이 둘의 벗이었다. 둘은 은연중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결혼한 뒤의 과거지사는 서로 입밖에 내지 않았다. 암담했던 때에는 혼돈속에 가라앉아, 마치 그런 시절은 전혀 없었던 양 현재와 그 이전의 시절이 그 위를 뒤덮고 있는 성싶었다.'
모름지기 많은 독자들도 이 장면을 읽으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이런 종국에 대해 애정을 보내지 않을 수 없으리다. 이 작품이 간행된 후 점찮은 도덕가들의 비난이 드높은 가운데에서도 어느 공작부인이 친구들을 모아 놓고 "테스를 지지하나요, 비난하나요." 하면서 각기 패를 갈라놓고 자기는 지지하는 쪽과 어울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작자인 하디 자신도 이러한 여인에 대해 동경적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것은 '밭에 나온 사나이는 밭에서 일하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지만, 밭에서 일하는 여자는 밭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묘사에서 여인에 대한 그의 견해를 읽어 볼 수 있고, 특히 테스라는 작중인물에 대해서는 이 책의 첫머리에 '……애처롭게도 상처받은 이름이여, 나의 가슴은 침상(寢狀)으로서 너를 깃들게 하리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헌사(獻詞)로 놓은 의도에서 그의 내면의 뜻을 알게 된다.
우리는 세계명작을 섭렵하면서 여러 인생의 단면들을 경험한다. 우리가 사는 생애가 오히려 거짓과 위선투성이인 데 반해 작품속에서 진실한 생활을 발견하게도 된다. 때로는 커다란 슬픔에 짓눌리기도 하고, 신선한 떨림을 느끼면서 이 세계와 삶의 넓이에 대해 개안(開眼)해 간다. 그리고 그러한 충격은 어김없이 우리의 정신 영역에 마르지 않는 자양분이 되어준다.
■하디(Hardy, Thomas; 1840~1920)
영국의 소설가 ·시인.
도세트셔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엔 런던의 한 건축사무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작가로 입신해서 1885년 막스 게이트에 집을 장만하고부터는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고 향리에서 취재진 소설을 발표하며 종생했다.
<테스>(원제는<더버빌 가의 테스>), <주드>를 발표하여 속물근성을 지닌 도덕군자들로부터 세찬 비난을 받으며 물의를 일으키자 소설에는 펜을 놓고 시작으로만 일관했다. 그의 시는 늙음을 모르는 신풍을 보이면서 시인으로서도 확고한 지위를 획득했다. 1910년에 O. M. 훈공장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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