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
사랑과 예술의 평행선을......
소설에서조차 서정성과 관념에 뿌리 깊이 얽매인 독일문학에서 토마스 만은 드물게 보는 진정한 의미의 신문작가이며, 아울러 독일 최대 최고의 작가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잣대로 보자면 내용상으로나 분량에 있어서 중편이라 할 <토니오 크뢰거>는, 작가의 초기 걸작으로서 그의 문학성향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을 많이 번역한 강두식 교수는 이 소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T.만의 전 작품을 응축해 놓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내용 형식의 면에서 그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그의 작품을 읽느 관건이 될 수 있는 소설이다. 또한 가장 자서전에 가까운 고백으로 가득찬 것이며......'
숫자로 9장까지 구성된 <토니오 크뢰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는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가 고향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14세 때 급우 한스 한젠을 선망하며 사랑했던 일과 16세 때 같은 상류계층의 영양 잉게보르크 홀름을 짝사랑했던 에피소드를 기록한 부분이다.
둘째 부분은 그로부터 10여 년 세월이 흐른 뒤 30대 초반의 청년이 된 토니오는 뮌헨으로 옮겨 가 살면서 작가 활동을 하던 중에 러시아 태생의 여류화가 리자베타와 교우하면서, 그녀와 예술과 일상적 삶을 두고 나누는 대화록이다. 이 소설의 주제, 즉 평범한 시민적 삶(시민성)과 예술의 길에서 감내해야 하는 고통(예술적 기질)의 괴리를 잘 드러내 보이는 대목이다.
토니오 아버지는 큰 저택을 가진 그 도시의 영사(領事)이자 기업가였다. 한스의 아버지도 광대한 목재 저장소를 가진 재력가였다. 그런데 그 아들 되는 토니오는 성적이 시원치 않았고, 남이 시덥잖게 여기는 시에 탐닉하는가 하면 혼자 몽상에 즐겨 빠지는 소년이었다. 이런 그를 아버지는 책망하고, 아름다운 어머니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묵과해 버린다. 그는 어머니의 태도를 기뻐하지만 내심으로 아버지의 노여움이 옳다고 판단한다.
한스 한젠은 잘생긴 우등생이었으며 승마를 즐기는 나무랄 데 없는 학생이었다. 때문에 토니오는 그와의 산책 시간을 고대하고, 자기에게 조금만 소홀히 대해도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서 그의 주의를 끌려고 노심초사한다. 그 안간힘이 여간 애달프게 마음을 사로잡는 게 아니다. '누구인가를 지독하게 사랑하면 패배 당한 자이고 괴로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 이 간결하고도 악착스런 진리를 그 열 네 살 짜리의 마음은 인생으로부터 벌써 받아들이고 있었다.'
산책 중에 한스는 토니오가 읽기를 권하는 쉴러의 <돈 카를로스>에 약간의 관심을 나타내다가 우연히 다른 급우를 만나자 그와 승마에 대한 화제에 열을 올린다. 토니오는 생각하기를, 왜 이 친구는 둘이만 있을 때는 얼마쯤 호의를 나타내지만 제 3자가 개입하면 자신을 희생시켜 버리는가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
그로부터 이태가 지났을 즈음, 토니오는 여전히 한스에게 경도된 채, 그 보다 더 강렬한 감정으로 한 처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땋아서 길게 늘어뜨린 숱이 좋은 금발머리와 웃음을 띤 푸른 눈의 잉게보르크였다. 그의 눈은 그녀에게서 떠날 줄 몰랐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도 않는 듯 했다.
토니오는 깊은 번민에 빠진다. 그녀가 무심코 한 일련의 동작을 본 후 이렇듯 매혹 당하다니! '사랑은 너무나 고뇌와 불행과 굴욕을 가져다주는 것이며, 평화를 깨뜨려버리고 심정을 달콤한 멜로디로써 가득 채워 어떤 일이 되도록 꾸미거나 마음을 턱 놓고 온전한 것을 다루어 낼 수 없게 하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짝사랑은 어이없는 실수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 도시의 상류층 가정에선 큰 도시의 무용사범을 초빙하여 자기 자녀들에게 무도 강습회를 갖게 했는데, 어느 날 4인조 무도(카드리유)를 연습하면서 토니오가 실수를 해 조롱거리가 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깔깔대며 웃을 때 틀림없이 그녀도 조소를 보냈을 터이다.
토니오가 고향을 떠난 지 13년이 지났을 무렵에 그는 한 여류화가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다. 이 부분은 거의 긴 대화로 일관하며 토니오의 입을 통해 작가의 예술론 혹은 예술가의 길이 피력된다. 그를 사로잡는 명제는 이러하다.
'그는 사라기 위하여 일을 하는 그런 자들과 같이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원치 않는 사람으로서 일을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자기에 대하여 아무런 가치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창조자로서 보아주기만을 바랐다.' - 나아가서 철두철미하게 창조하는 자가 되려면 죽어야만 한다고 까지 생각한다.
그해 가을에 토니오는 여류화가 리자베타에게 덴마크로 여행을 하겠다고 알린 후 북쪽으로 출발한다. 그 도중에 고향 도시에 들렀는데, 자신의 집안이 영락하여 팔아 넘긴 대저택은 '민중도서관'이 되어있었다. 아버지가 급작스레 사망한 후 가세가 기울었고, 곧이어 어머니마저 신발짝 바꾸어 신 듯 개가하여 이탈리아로 가버린 고향에서 그는 한낱 이방인에 불과했다. 묵었단 호텔에서는 지명수배자를 수사하는 경찰관에게 잠시 심문 당하는 불쾌감까지 맛본다.
이 여행의 종착지인 덴마크의 한 해안도시의 호텔에 숙박하고 있던 차에, 그 지방인의 무도회가 열리게 되었다. 거기서 우연히 자시이 한 대 그토록 경모했던 두 남녀, 즉 한스와 잉게보르크가 다정하게 나타난 것을 엿보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토니오는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때 문단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지만 그들 앞에 떳떳이 나서지를 못한다. 10여 년을 격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가 우러러보아야 할 대상이었고, 자신은 그들 앞에서 패배자에 다름 아니었다. 토니오는 아직도 몽상가를 벗어나지 못해 잉게보르크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한스와 같은 아들을 얻게 된다면 오죽 좋으랴 하고 상념 한다.
따뜻한 실내에선 평화롭고 명랑하게 춤을 추는 속인들, 그 속에 한스 커플도 원무를 추며 돈다. 토니오는 창피함도 잊고 베란다를 통해 그 모습을 엿본다. 그는 자신과 상관없는 잔치에 취하고 시기심으로 피곤해져 외롭게 자기 방으로 돌아온다.
날이 바뀌어 그는 약속대로 리자베타에게 편지를 썼다. 분명히 자기 마음속에서 정리되고 형성될 것을 원하는 작품에의 열정을 적은 뒤, '하지만 저의 정말로 깊고 가장 은밀한 짝사랑은 금발머리, 푸른 눈을 가진 맑고 씩씩하며 행복스럽고 사랑스러운 평범한 사람들한테 기울고 있음을 고백한다.
토니오의 성격에는 위와 같은 상반되는 이질성이 내재해 있다. 그것은 부모의 혈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북유럽 태생인 아버지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엄격하다. 그러나 먼 남쪽 출신인 어머니, 다시 말해서 피아노와 만돌린을 잘 치고 정열적이며 어느 한켠엔 부실한 면이 있는 미모의 어머니는 그 정반대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향한 동경은 부계(父系) 체질이고, 작가로서 정착된 생활을 하지 못하는 기질은 모계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이 소설의 전반에 수놓인 사랑에 얽힌 장면은 산문으로서 아름답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중반의 장황한 대화는 독일 특유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절대적 정신을 중시하는 교양소설의 유형을 고수하고 있다 하겠다. 그런 한편, 이 소설을 부계와 모계의 상충, 시민성과 예술적 기질의 괴리에 따른 갈등이 골격을 이루면서 한편의 자전적인 성장 소설로 우뚝 선다.
■ 만(Mann, Thomas ; 1875∼1955)
독일 최대의 작가. 형 하인리히 만도 소설가로서, 뤼베크의 거상(巨商) 집안에서 태어났다. 문학과 철학에 심취하여 학업은 중도에 포기하고 일찍부터 그의 최고 걸작인 대하 장편소설 <부덴브루크 가(家)> 집필에 매달렸다. 그 외에도 유미적인 작품 <토니오 크뢰거>, 예쑬가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베니스에서의 죽음>, 걸출한 소설 <마(魔)의 산>과 전설에서 취재한 이색적 명작 <선택된 인간> 등 숱한 작품을 남겼다. 192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
고아 단정한 스타일리스트로서 현대 작가 중 최고봉인 한편, 평론 수필 분야에서도 일류의 대가로 손꼽힌다. 나치스 정권과의 불화로 만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 시민권을 얻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