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예화, 인용

벽초 홍명희 소설 임꺽정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6. 9. 16. 21:01

[의적 임꺽정]

  임꺽정은 16세기 중엽 명종 때에 활동한 인물로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의적으로 불리운다. 의적이라 함은 단순한 무법자와는 달리 민중에게 칭송을 받고 ,지지받고, 원조 받는 영웅 내지 투사를 말한다. 이들은 민중의 염원, 희망의 대상이 되어 당대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불사설로 전설이 될 만한 인물이다.

  임꺽정은 양주 백정 출신으로서 지혜가 있고 용감하며 날쌨다. 조선시대의 백정은 도살업, 고리제조업, 육류판매업 등을 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신분적으로 노비는 아니었으나 그 직업이 천하다 하여 노비보다 더 심한 천대를 받았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칠반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패랭이는 벗겨 버릴 것'을 폐정개혁안의 하나로 요구할 정도로 백정에 대한 신분적 차별 대우는 심했다.

  임꺽정은 최하층 천민 출신으로 조선 봉건사회의 권위를 총체적으로 부정한 혁명아다. 임꺽정이 봉건지배층의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 결연히 항거한 점에 주목한 벽초 홍명희(1888-?)는 식민지 통치기의 암울한 사회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설 <임꺽정>을 일간지에 게재함으로써 가장 조선 적인 정조를 지닌 인물로 임꺽정을 부활시켰다.



    [흉년, 세금 그리고 가렴주구]

  임꺽정 부대의 주력은 가난에 쪼들린 자, 침탈을 견디지 못한 자, 죄가 두렵고 부역을 피하기 위한 자, 위협이 두려워 무리에 합류한 자들이다. 이들은 몰락농민, 도망노비, 백정, 장인, 역자 등 당시 사회에서 각종 천대와 수탈을 받는 최하층민들이었다. 이밖에 각종 기밀을 제공해 준 아전과 약탈한 물건을 내다 판 상인들이 합세하였는데, 이들은 임꺽정 부대의 보조세력이다.

  이들이 도적활동을 하게 된 원인으로 먼저 잇따른 흉년과 기근을 들 수 있다. 도적활동은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경제적 위기가 닥쳐오는 시기에 만연한다.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과 흉작은 농민의 생활상태를 악화시키고 도적활동을 부추긴다. 서양의 경우 16세기 말엽 지중해지방에서 비적단이 놀랄 만큼 늘고 있었는데, 이는 이 시기에 농민의 생활 상태가 두드러지게 낮아진 것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에서도 16세기 중엽 잇따른 흉년과 만성적인 기근이 농민들의 유망과 도적활동의 원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과중한 부세 부담을 들 수 있다. 흉년과 함께 과중한 세금은 백성들로 하여금 지쳐서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었다. 임꺽정 부대의 활동 근거지인 황해도에는 두 가지 큰 폐단이 있었다. 각종 공물의 폐단이 그 하나로, 나라에 바치는 물품이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감당할 수가 없었다. 황해도의 토지, 인구, 물산이 남쪽지방에 비해 훨씬 못하나 진상물품의 종목과 수량이 하삼도보다 훨씬 더 많고 까다로웠다. 다른 하나는 군역과 관련된 폐단이었다. 황해도의 군인은 서울 번상과 도내 국방 외에 의주, 이산, 강계와 같은 평안도 변경 요충지에 가서 방비를 서는 부담 하나가 더 있어, 군정을 색출할 때 민심이 늘 소란하였다. 이 때문에 임꺽정 부대가 한창 기세를 부릴 즈음, 정부는 피역인이 가세할 것을 두려워하여 군정 색출을 잠시 중단하기도 하였다.

  고을 수령의 침탈 역시 도적활동의 중요 원인이었다. 수령의 가렴주구는 권세가의 비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권세가는 공공연히 벼슬을 팔아 무뢰한 수령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약탈하도록 부추겼다. 재상들의 탐욕이 한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섬기기 위해 수령은 가축까지 잡아들이는 등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임꺽정 부대가 재상, 관료, 양반 등을 백성의 적으로 여겨 처단하려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게릴라 활동]

  임꺽정 부대의 규모와 전술, 활동 거점 등에 관해 <명종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해도의 도적이 비록 방자하다고 하지만 그 우두머리는 8, 9명에 지나지 않으며, 모이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다. 깊은 산골에 나누어 숨어 붙잡을 만한 자취도 없고, 적국처럼 진을 치고 침입하여 교전할 수 있는 것과도 다르다.

  임꺽정 부대는 8, 9개의 소부대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임꺽정은 각 부대의 우두머리를 거느리는 총대장이었다. 일반적으로 비적의 이상적인 단위는 20명 이하였으므로, 임꺽정 부대가 관군의 추격에 맞서 기동성 높은 유인전술을 구사한 점으로 보아, 이들은 상당한 정도의 훈련을 받은 수준 높은 정예군이었다.

  임꺽정 부대는 산악 지형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들이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을 구사한 것은 무장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임꺽정 부대는 창, 칼, 활, 화살, 도끼 등 단순한 무기로 무장하였을 뿐 총포류 등 화약무기는 없었다. 관군에 비해 화력과 병력면에서 열세인 까닭에 이들은 진을 치고 관군과 정면으로 맞서서 교전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반면 이들은 지형지물에 익숙하였으며 기병대를 거느리고 있어 기동력 면에서 탁월하였다. 임꺽정 부대는 효과적인 게릴라 활동을 위해 황해도 구월산, 서흥, 신계 등을 중심기지로 삼으면서, 평안도의 성천, 양덕, 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별도의 활동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 근거지가 산악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이들이 모여 도적활동을 할 경우에는 산악을 거점으로 하면서도 관군의 추적을 피해 민가로 흩어질 경우, 의복과 언어가 백성들과 다름없어 고발하지 않으면 비록 천여 명의 병사를 동원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한 한 번 모였다 다시 흩어지면 반드시 각자 행동하고 늘 민가가 많은 곳에서 지냈는데, 개성과 평약, 서울 등이 분산하여 활동할 때의 주요 거점이었다. 비적들도 먹어야 살고 무기도 보급 받아야 하므로, 노획물을 팔아 필요한 물자로 바꾸어야만 한다. 임꺽정 부대가 개성, 평양, 서울 등 상업이 발달한 도시와 황해도 봉산과 같이 교역의 중심지를 근거로 활동한 까닭은 물자의 약탈과 판매 처분이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악질관리 처단]

  당시 지배층은 임꺽정을 포악무도한 도적이라 하여 무법자, 약탈자로 매도하였다.

  적이 난동한 지 3년만에 다섯 고을의 수령이 피해를 입었고, 여러 도의 군사를 동원하여 겨우 한 적을 잡았으며, 양민의 죽음은 헤아릴 수 없었다.

  임꺽정은 단순히 물자를 약탈한 비적이 아니라 통치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적이었다. 실제로 임꺽정 부대는 대낮에도 관청문을 포위하여 수령의 나졸을 사살한 후 옥문을 부수고 갇힌 일당을 구출해 갔으며, 사신을 맞이하는 관군을 살해하고,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을 횡행하면서 포도대장을 역임한 자들의 신변을 위협하는 등 대담한 활동을 벌였다.

  임꺽정 부대에 의해 희생된 최초의 관리는 개성부 도사 이억근이다. 이억근은 개성부 포도관으로 평상시 임꺽정 부대를 추적, 체포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수십 명을 잡은 공로가 있기에 미움을 샀다. 임꺽정이 개성부 관할지에 침입했다는 신계현령의 재보를 받고 개성부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임꺽정을 포위하자, 이억근이 그 틈을 타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새벽을 이용하여 적의 소굴에 들어갔다가 일곱 대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듬해에 임꺽정은 서울 중부 장통방에 잠입하였다가 관군에 발각되어 포도대장 남치근의 추적을 받았으나 격투 끝에 탈주에 성공하였다. 임꺽정 부대는 서울 넓은 거리에서 관군에 대항하여 부장을 쏘아 맞혀 포위망을 뚫었다. 임꺽정 체포에 실패한 책임으로 좌변포도대장 남치근과 우변포도대장 이몽린이 체직되었고, 포획하는 데 실패한 부장, 군관 등은 모두 의금부에 이송되어 중한 처벌을 받았다.

  서울 탈주에 성공한 이후 임꺽정 부대의 기세는 더욱 드높아져 관을 사칭하고 여러 고을을 출입하여 수령에게 접대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임꺽정 부대가 황해도 일대를 온통 장악하여 대낮에도 통행이 막혔다. 이들은 빼앗은 재물을 실어다 서울에 두고 판매하였으며, 공공연히 조정의 관원이나 감사의 족속이라고 사칭하면서 행동하였다.

  임꺽정 부대가 황해도 일대를 손에 넣자, 정부는 임꺽정 부대의 소굴이 있는 봉산군 군수에 이흠례를 임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임꺽정은 이흠례를 살해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흠례가 일찍이 신계현령으로 있을 때 임꺽정 부대를 많이 잡아들여 그 공로로 지금 봉산군수직에 올랐으니, 먼저 이 사람을 해치면 군대의 위엄을 세울 뿐만 아니라 후환도 없앨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흠례를 처단하려는 계획이 모사 서림의 체포로 사전에 누설되어, 임꺽정 부대는 도리어 관군에 포위 당하게 되었다. 선전관 정수익과 봉산군수 이흠례가 봉산군대를 이끌고 평산군 북면에 있는 어수동에 먼저 이르렀으며, 금교찰방 강려와 평산부사 장효범이 평산군대를 이끌고 어수동에 와서 합류하였다. 관군 500명이 평산 마산리로 진격하여 무성한 숲과 깊은 골짜기를 출입하면서 추격전을 벌이자, 임꺽정 부대는 이들을 깊은 계곡으로 유인한 후 골짜기 아래로 도망쳤다. 관군의 부장 연천령이 강려의 역마로 바꿔 타고 봉산 군사 1인과 산 아래로 곧바로 달려가 이들의 퇴로를 차단하였으나, 도리어 임꺽정 부대에게 살해당하고 역마마저 빼앗겼다.

  선전관을 통해 임꺽정 체포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국왕은 정부의 핵심 관료들을 비밀히 한 자리에 모이도록 한 후, 새로운 차원의 대책을 직접 지시하였다. 관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거리낌없이 관리를 살해하여 국가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임꺽정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 등 5도의 군사를 출동시키라는 강력한 토벌책이었다. 이에 대해 대신들은 5도에 대장을 파견하여 군대를 동원하면 백성들이 소요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병조로 하여금 종이품 무신 2명을 가려서 순경사라 이름하여 황해도 강원도 두 도에만 내려 보내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다.



    [순경사 파견과 가짜 임꺽정 소동]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임꺽정 부대가 도사, 수령, 부장 등을 거리낌없이 처단한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나라를 역보이고 국가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행위이므로, 임꺽정 부대는 단순한 도적떼인 '군도'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역집단인 '반적'이라 생각하였다. 또한 정부는 평산전투를 계기로 임꺽정 부대의 전략 전술과 전투력이 탁월한 수준임을 주목하였다. 국왕이 민폐를 무릅쓰고 순경사 파견을 독려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임꺽정 체포의 책임을 단순히 한 도의 감사나 군현의 수령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군사를 동원하여 중앙정부 차원에서 토벌하겠다는 것이다. 군사를 징발하려는 계획에 대해, 흉년이 심하고 군대를 뒷바라지하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민심이 이반할 것이라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국왕과 척신세력가인 윤원형 등은 장수를 보내 황해도의 도적을 섬멸해야 한다는 당초의 강경론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1560년(명종 15년) 12월 초 정부는 황해도와 강원도에 순경사를 파견하면서 각각 군대를 지휘할 장교를 50명씩 뽑아 거느리고 내려가 임꺽정 부대를 섬멸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후 얼마 안 되어 도적의 괴수 임꺽정을 잡았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그러나 황해도 순경사가 체포한 인물은 임꺽정이 아니고 임꺽정의 형 가도치인 것으로 드러났다. 순경사가 고문을 가해 임꺽정이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냈던 것이다. 가짜 임꺽정 소동은 군대가 출동한 지 오랜 시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공이 없다는 비판이 일자, 순경사가 일단 혐의쩍은 사람을 잡으면 진위를 따지지 않고 심한 고문으로 협박해 자백을 받음으로써 책임을 모면하고 상도 받으려 한 때문에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순경사 파견에 대한 비판론이 다시 일어 황해도 순경사는 파직되고 새로운 순경사 파견은 중단되었다. 이듬해 9월에도 의주목사 이수철이 대적 임꺽정과 대당 한온 등을 붙잡았다고 아뢰었으나 역시 거짓임이 판명되었다.



    [토포사 파견과 서울 교란 전술]

  순경사를 파견하여 임꺽정 부대를 토벌하려 한 정부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런 와중에 임꺽정 부대의 기세는 날로 충천하여 황해도 지방과 그 일대를 계속 장악해 나갔다. 황해도 일대가 임꺽정 있는 줄만 알고 나라가 있는 줄은 모르는 이른바 '적국의 형세'가 되자, 좌의정 이준경은 토포사를 파견하여 임꺽정 부대를 토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황해도를 사방에서 공격하고 포위하기 위해, 경기도,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등의 네 도가 서로 약속하고 일제히 군대를 일으켜 도적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토포사가 황해도를 향해 떠난 지 약 20여 일 뒤인 10월말 경, 임꺽정 부대가 대대적으로 서울에 잠입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는 관군의 토포 병력을 분산시키고 지배층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임꺽정 부대의 절묘한 교란전술임에 틀림없다. 소문을 들은 국왕은

임꺽정 부대가 총공세를 펴 서울을 직접 침공해 오는 것으로 이해하여 비망기를 내려 임꺽정 부대의 서울 잠입을 철저히 막도록 지시하였다.

  도성문은 인정을 치기 전에 미리 닫고 해뜬 다음에 열도록 하였으며, 도성문을 닫은 이후부터 그 다음날 해뜨기 전까지 아무도 통행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목멱산, 인왕산, 백악, 타락산 등 네 산의 성곽 중 도적이 넘어올 만한 곳에는 우선 군대를 매복시켜 살피도록 하였다.

  이어 피역인들이 임꺽정 부대에 합세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들의 활동이 잠잠해질 때까지 군정 색출을 중지시켰으며, 다음날에는 경복궁과 창덕궁 각문의 수문장을 더 배치하여 평상시보다 갑절 엄하게 기찰하도록 하고, 시장을 열지 못하도록 은밀히 지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꺽정 부대가 서울에 가득하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오부로 하여금 호를 헤아려 통을 만들고 기찰하도록 명하였다. 국왕을 비롯한 봉건지배층은 임꺽정 부대에 의해 도성이 언제 함락될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감에 싸여 있었다. 이처럼 임꺽정 부대의 서울 출현 소식에 위아래가 모두 허둥지둥하고 온 나라가 동요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는 나라가 곧 망할 지경에 이른 것으로 비춰졌다.

  토포사 파견을 통한 관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임꺽정 부대의 주력은 타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임꺽정은 토벌군의 포위망을 뚫고 구월산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2차 포위망에 걸려 1562년 1월 황해도 서흥 한 노파의 집에서 사로잡혔다. 임꺽정을 체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명종은 '반적이 일어나 매우 한심스럽게 여겼는데, 이제 잡기 어려웠던 적을 포획하여 백성들이 베개를 높이고 편안히 잘 수 있게 되었다'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봉건정부가 토포사를 파견하여 임꺽정 부대를 토벌하는 전과를 올리기는 하였으나, 이에 따른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임꺽정을 보는 역사가의 눈]

  임꺽정은 관군과의 3년에 걸치는 전투 끝에 생포되어 1562년 초에 최후를 마쳤다. 임꺽정 부대의 활동은 봉건국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도사, 수령, 부장 등을 서슴없이 처단하였으며, 재상, 관료, 양반 등 봉건지배층을 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봉건정부는 이들을 단순히 물자를 약탈하는 도적의 무리인 군도가 아니라 국가 기틀을 뒤흔드는 반적으로 여겨, 많은 반대와 희생을 무릅쓰고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꺽정 부대의 활동은 봉건지배층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황해도를 비롯하여 그 일대는 국가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적국의 형세가 되었고, 국왕이 거처하는 서울은 곧 함락될 것만 같은 위기감에 싸였으며, 지배층 내부에서조차 '나라가 언제 망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변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는 탄식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이는 지배체제의 위기와 개혁의 필요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임꺽정의 반란은 훈구와 사림세력의 교체를 촉진하였다. 기존의 지배세력을 역사의 무대에서 끌어내리고, 새로운 사회세력을 전면에 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임꺽정 자신의 문제인 천민층의 신분해방은 해결하지 못했다. 그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사실은 의문이다. 그는 원초적으로 봉건지배층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항심을 지녔지만, 모순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생산대중의 힘을 결집하여 해결하려는 사회의식은 지니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저항은 생산활동에서 유리된 채, 잉여물을 약탈하는 도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봉건사회 변혁운동은 생산현장에서 유리된 사회 주변부세력이 주도하는 산발적이며 일시적인 저항으로부터, 생산활동에 뿌리를 내린 농민대중의 지속적이며 견실한 저항으로 발전해 간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16세기 임꺽정의 활동은 봉건사회 변혁운동의 초기적인 형태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덕성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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