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교향악 (앙드레 지드) △
사랑이라는 이름의 전차
신화적 의미와 결부된 견해이긴 하나 사람의 모든 행위는 사랑에 말미암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이 진선미한 것이든 위악이든간에. 신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연대,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도 사랑을 떼어놓고는 이해와 해석이 불가능하다.때문에 동서고금의 대다수 문학작품들은 예외없이 이런 사랑을 취재하여 조명하는 데에 기꺼이 기여하고 있다.
단언하건데, 사랑을 주제로 한 세계명작 가운데서 프랑스의 뛰어난 현대작가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을 비견할 바 없는 백미편으로 손꼽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성싶다. 비록 그리스도교 문화권(신·구교를 포함하여)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여기에는 사랑에 대한 신과 인간의 시각, 사랑으로 얽힌 한 가족 구성원들을 모델로 하여 사랑이 위선이나 진실도 되고, 위로와 고통, 구원과 죄악이 됨을 이 작품은 극히 절제된 문맥과 고도의 세련된 향기로써 제시한다. '사랑'이나 '전차(電車)'는 그 정서적 욕구나 형태로 보면 앞뒤가 같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귀착점은 전혀 다를 수가 있다. <전원 교향악>을 운위하는 글의 제목으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의 제명을 차용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붙였던 소이는 이런 까닭에서다.
그런데 이렇듯 저명한 작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감동을 안겨 줄 이 작품을 실제로 읽은 이들은 우리 주위에서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장차에 있어서나 현재 한 가정의 '사랑의 분배자'또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여성들에게는 아무리 강조해도 무방하리라. 때문에 길지 않은 분량인 이 명작의 대강 줄거리를 요약할 필요성을 느낀다.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중년의 목사 '나'는 아주 남루하게 살다가 운명한 노파 때문에 그 집에 기생하다가 고아로 내던져진 눈먼 소녀 제르트뤼드를 집으로 데려오게 된다.
그 대목은 이러하다.
'그 눈먼 아이는 마치 의지 없는 고깃덩어리같이 끌려 나왔다.그녀의 얼굴 생김새는 선이 확실하고 제법 아름다웠으나 전연 표정이 없었다. 나는 방안 한 구석 다락으로 올라가는 안쪽 충계 밑에 있는 짚으로 만든 요 위에서 담요 한 장을 가져왔다. 아마 이 애는 언제나 이 짚으로 만든 요 위에서 잔 것 같았다.
이웃 여인은 친절을 보여 주어, 내가 조심스러이 그 애를 담요로 싸는 것을 도와주었다. 밤은 청청하게 맑고 쌀쌀했다. 마차 등불에 불을 켜고 내게 기대어 웅크리고 있는, 넋도 없는 살덩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기체 형식을 빌린 이 소설 '첫째 수첩'의 189X년 2월 10일에 기록된 문구이다. '나'에겐 묵묵히 인종하는 아내와 청소년기에서 유아에 이르기까지 슬하에 다섯 남매를 두고 있다. '마치 의지없는 고깃덩어리같이 끌려 나온, 얼굴 생김새는 제법 아름다웠으나 아무 표정이 없는' 눈먼 거지소녀가 나타난 걸 달가워할 가족은 아무도 없다. 그 소녀는 장님일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대화에 볼 상대를 가져 보지 못했으므로 벙어리에다 귀머거리에 다름없었다.
'나'는 소녀의 지적(知的) 개발을 위해 용의주도하
고 현명하게 헌신한다. 아내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우리의 여러 아이들중 누구에게 그런 관심을 보여 주었던가 하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목사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예리한 감수성으로 현저하게 새로운 세계를 깨달아 가는 한편, 아름다운 처녀로 변신한다. 필연적으로 부부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심화된다.
맏아들 쟈크는 신학부로 진학하여 도시에 나가 있던 중 방학을 맞은 귀향 때에 순결한 눈먼 처녀의 가치를 새로이 인식한다. 미구에 견혼까지를 생각하는 아들을 보고 '나'는 몸을 떨며 둘 사이를 떼어 놓는다. 부부의 갈등에서 부자간의 대립으로 심화되면서 그리스도의 비유 말씀과 성 바울의 성서주석에 입각한 미묘한 논쟁이 배음으로 깔린다. 제르트뤼드는 은인인 목사로부터 터득한 하느님의 사랑과 스스로의 영혼으로 찾아낸 사랑과의 괴리, 혹은 양심과 의리의 불협화음에 흔들리다가 은인을 사랑하기로 하고 입맞춤한다.
스토리의 변전은 수술의 성공으로 눈먼 처녀가 개안함으로써 촉발된다. 그녀는 소녀적에 '나'의 호의로 함께 음악회엘 가서 '전원 교향악' 연주를 들었을 땐 세상이 무척 아름다울 것이라 추상(追想)했으나, 막상 눈을 떠 보니 세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파국은 그 이전에 두 사람의 이런 대화로 예상이 되었던 바다.
"인간이 세상을 더럽힌 것만은 사실이지."
"저만은 이런 인간악을 조장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확신하고 싶어요."
눈 수술에 성공하여 시골로 돌아온 날 오후에 아름다운 처녀 제르트뤼드는 자살한 양으로 찬 개울물에 몸을 던졌다. 병원에 입원한 동안 개종한 쟈크를 만났었고, 그 쟈크가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로 간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은 은인인 목사가 아니었고,그 은인의 아들인 쟈크였던 것이다. 제르트뤼드는 목사한테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 아시다시피 저는 목사님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지나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제가 목사님 곁으로 돌아왔을 때 당장에 눈에 띈 게 바로 이거에요.아니면 적어도 제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다른 여자의 자리였고, 그분은 그 때문에 슬퍼했을 거에요. 아니면 적어도 ---왜냐하면 저는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목사님이 저를 사랑하도록 내버려 둔점이지요. 이런 참에 갑자기 그분의 얼굴이 나타나자, 그 을씨년스러운 얼굴에서 그렇듯 슬픈 빛을 보자, 그 슬픔이 제 탓이라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목사는 자기 아들과 이 처녀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애를 썼다. 결혼에 이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쟈크는 성직자의 길을 택한다. 그 절망을 안고 제르트뤼드는 이튿날 숨져 갔다.
이 줄거리가 명확하게 전달하는 바처럼(<전원 교향악>은 우리 문단의 관행대로라면 중편소설 분량에 해당하는 소품이면서도)첫머리에 진술한 사랑의 총체적 총합적인 반영, 문제 제기, 해석을 훌륭히 포괄한다. 너무나 신학을 인간적인 얘기로 꾸몄는가 하면, 인간사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규명했다고도 볼 수 있다.
오늘의 우리 시대는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너무 범람하든가 하면 상반되게 증발한 양상을 직면하게 된다. 사랑이 사악해질 수도 있고, 그렇게 사악해진 세상에선 사랑만이 유일한 구원 통로임을 쉽게 판별할 터이다. 이런 세태 와중에서 <전원 교향악>의 재미 있고 뜻 깊은 이 얘기는 더욱 광채를 띠지 않을까? 아무리 즉물적 항락주의, 진지함을 상실한 시대라 하더라도 죄악과 구원의 문제는 인간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원초적 명제이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장님인가? 착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이 합리화될 리는 없다. 참사랑에 눈뜬 쟈크, 그리고 위선을 깨닫고 내적 양심에 귀기울일 줄을 안 처녀야말로 눈뜬 사람이다. 아울러, 개신교도로 파리법대 교수인 아버지와 엄격한 가톨릭 집안 태생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작가의 정신적 토양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대목은 작가의 개인사정과 한 작품의 허구(Fiction)에만 결부될 뿐 종교적 가치세계와는 전현 별개임은 밝혀 두어야 할성싶다.
■지드(Gide, Andre:1869~1951)
프랑스의 소설가·비평가
파리에서 법학 교수인 아버지와 엄격한 애정을 지닌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났다. 부유한 환
경에서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는 한편, 시인 말라르메의 문하에 출입하여 문학에 정진했다.
사촌누이와 연애 끝에 부부로 맺어졌는데, 그 고뇌가 처녀작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로
나타났고, 대표작 <좁은 문>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문학·사상·평론과 그 밖의 산문분야에서 끊임없이 자기쇄신과 고투를 통해 깊은 경
지를 개척하여 현대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좁은 문> <
교황청의 지하도> <시사벨> <보리 한 알이 썩지 않으면> <사전꾼들> 등이 있으며 수
필·일기 등도 금자탑을 이룬다. 1947년 노벨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