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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4. 7. 5. 13:20

대위의 딸 (푸시킨) △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소설

러시아 국민시인으로 칭송되는 푸시킨은 그의 짧은 생애의 말기에 하나의 기념비를 세우듯 아름다운 소설을 남기고 갔으니, 그것이 우리 나라에서도 학생들 사이에 애독되는 <대위의 딸>이다.

남녀간의 사랑은 지선하고 아름답고 건실하며, 희생적이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한편 사랑은 감미롭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어서 거기엔 질투로 인한 갈등, 느닷없는 시대 혼란으로 야기되는 고난, 그리고 상대편의 곤경으로 시련이 중첩되기도 한다.

이 장편소설은 이러한 요소들을 다 수용하면서 아름다운 결합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까닭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푸시킨은 한 토막의 사랑의 이야기를 저 유명한 '푸가초프의 반란'이 러시아 대륙을 강타한 흉흉한 시대에서 길어올렸다. 틈만 있으면 러시아 황실의 지배를 거부해오던 가자흐 족과 바슈키르·키르기스 등 소수민족이 푸가초프라는 한 걸출한 반역아를 정점으로 하여 반기를 들고 궐기한 역사적 배경과, 한 귀족청년과 변방 요새 사령관의 딸 사이에 맺어지는 사랑은 분명 너무나 이질적인 대비를 이룬다. 잔혹과 무질서한 붕괴의 터전에서 꽃피운 사랑이기에 더한층 선명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하겠다.

그러나 문학적 관점으로 볼 땐 남녀간의 운명 자체보다 그것을 형상화시킨 문학기법에 더욱 시선이 쏠린다. 어떻게 보면 <대위의 딸>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단순하며, 흡사 한 편의 설화를 읽는 듯한 해피엔딩이 눈에 거슬릴 수도 있겠다.

사실 이 작중에 거짓말 같은 우연이 자주 겹쳐지기에 경박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를테면 주인공 표트르 그리뇨프가 열일곱 살의 애송이로 군무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떠나서 변방 오렌부르크로 가는 동안 두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

한 사람은 눈길에 파묻혀 오도가도 못할 궁지에 빠져 있을 때의 수상스런 농부로서 길 안내를 해주었던 자이다. 이때 그리뇨프는 사례의 뜻으로 술 한 잔을 사주고 토끼가죽의 덧저고리를 동정심으로 주었다. 또 한 사람은 기병대 대위로서, 묵고 있던 여관에서 만나 당구내기를 유혹해서 거금 백 루블을 갈취한 건달이었다.

그런데 농부는 나중 반란군의 괴수가 된 푸가초프였던 탓에 요새가 함락되었을 땐 이때의 온정을 생각하고 생명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사령관의 딸인 마리야 미로노바까지 구출하여 탈출을 도와준다. 또 그리뇨프와 마리야가 탈출해 오던 중 반군의 패거리로 오인되어 절박한 처지에 빠졌으나 마침 지휘관이 백 루블을 얻어냈던 주린 기병대위였으므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특히 말미에 이르러선 더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다. 그리뇨프가 마리야를 구출하기 위해 정부군 진지를 무단이탈하여 벨로고르스크 요새로 되돌아가 푸가초프의 환대를 받은 것이 당국에 밀고되어 사문위(査問委)에 회부되었던 것이다. 마리야는 이 벨로고르스크 요새에서 저항하다가 부모 모두가 장렬하게 처형당했으므로 그 처지를 십분 활용해 사랑하는 이의 구명을 탄원하러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간다. 그곳 아침 산책길의 공원에서 한 귀부인을 만나 하소연하게 되었는데 그 귀부인이 잠행나왔던 여왕 예카테리나 2세였다.

현실생활에선 천부당만부당할 것 같은 이런 우연은 항간의 설화에나 있음직한 것이어서 소설에선 기피하는 요인이다.

게다가 지체 높은 신분의 그리뇨프가 일개 작은 요새의 지휘관인 미로노프 대위의 소박한 시골뜨기 딸을 사랑하게 되는 사정도 당시의 풍속으론 무리가 없잖다. 그가 식사를 하려고 사령관 댁에 들르면 그녀는 얌전하게 수만 놓고 있었다. 첫 대면의 묘사는 이러하다. '이때 얼굴이 둥글고 불그레한 열여덟 살 가량의 처녀가 들어왔다. 연한 블론드 머리를 양쪽 귀 뒤로 빤빤하게 빗어넘겼는데, 그 귀는 수줍음 때문에 새빨갛게 물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리뇨프가 자주 이 집에 출입하면서 둘 사이는 가까워지고, 나아가서 그는 마리야를 성실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처녀라고 호의를 품게 된다. 그 결과로 그녀를 염두에 두고 쓴 연시가 빌미가 되어, 그동안 그녀를 짝사랑해오던 요새의 선임장교 슈바브린과 결투를 하게 되고, 그 부상 치료가 빌미가 되어 두 남녀는 급속도로 친밀해진다.

곧이어 반군이 몰려들어 처형이 자행되었으므로 마리야는 가련한 천애의 고아가 되고, 그리뇨프는 반군 압잡이가 된 슈바브린의 간계를 무릅쓰고 이후 처녀를 구출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아버지의 강경한 반대나 자신의 생명의 위험도 개의치 않고 거의 만용에 가까운 의기와 무모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사랑의 힘은 그 어떤 논리성도 배제하고 제약도 초극한다 하지만 이런 돈키호테식의 행위는 너무나 낭만적이다. 그런 한편 정열적인 단순 명쾌함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마력을 휘두른다, 그래서 <대위의 딸>은 아름답게 다가온다.

푸시킨의 대표적인 운문소설 <에프게니 오네긴>을 두고 '당시의 전형적 귀족청년인 오네긴과, 단순하고 솔직하며 굳은 의지력을 가진 건전한 러시아 여성의 전형인 타치아나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지적은 이 장편에도 그대로 적용될 듯싶다. 단순성은 진실 그 자체일 수 있고, 이야기를 간명하게 서술함은 선명한 인상을 불어넣어줄 수가 있을 터이다.

그리뇨프와 마리야는 모두 청순한 마음씨와 단순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아울러 행동이 솔직하고 굳센 의지력과 건전한 사고력을 갖춘 젊은이다. 이런 심성이 그리뇨프로 하여금 오렌부르크 진지를 이탈하여 적중의 요새로 향하게 했으며, 시골 처녀 마리야가 페테르스부르크로 가망도 없는 탄원 길에 나서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구한 정열엔 반드시 보상이 따르듯 행운이 그들의 결합을 감싸주었던 셈이다.

<대위의 딸>은 푸시킨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836년에 발표되었다. 이 무렵이라면 유럽 문단에선 뛰어난 소설이 다수 등장했지만 러시아에선 소설문학이 미명기였던 시기이다. 이 장편으로 인해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이 뿌리를 내렸고, 이후의 모든 작가와 문학유파가 푸시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된다.

그런 사정을 감안할 때, <대위의 딸>에서 세련된 소설기법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당한 요구가 아니다. 그러한 시각보다는 참혹한 상황이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추구해야 할 고귀한 것, 진실한 용기가 필요할 때 외면하지 않고 당당하게 돌파하는 의지,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바칠 값어치가 있고 그러한 노력에는 응분의 결과가 초래된다는 전말을 이처럼 힘차고 명징하게 그려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될 줄로 안다.

이 장편에서 대다수의 천한 농민은 그들의 신분에 맞게 비열·저급한 인간일 뿐이고,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은 모두 고상한 긍지와 자존심을 지켜 마땅하다는 양분법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또 주인공 그리뇨프는 귀족들이 지니는 온갖 장점의 품성을 유감없이 구현하고 있으나, 같은 계층인 슈바브린은 더러운 질투, 간교한 반역, 추악한 밀고인으로 묘사한 극단적인 대비도 전근대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일찍이 반동적인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에 가담해서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했던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의 항쟁을 두고는 '보다 훌륭하고 항구적인 개혁은 어떤 종류의 폭력적인 행위도 동반하지 않는 풍습의 개선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고 있음은 의외롭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소설은 사상서가 아닌만큼 이러한 근시적 안목이 있다 하더라도 그리뇨프와 마리야라는 순정한 젊은이의 초상을 창조하고 그들의 사랑의 절대성, 그 추구의 진실한 가열성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대위의 딸>의 불멸의 가치는 간명하고 낭만에 넘치는 기법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낸 소설이란 점에 있다.

■ 푸시킨(Pushkin, Alexander S. ; 1799∼1837)

러시아의 시인. 근세 러시아 문학의 시조라 불린다.

귀족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문학적 재능을 나타냈으며 청년기에는 바이런을 애독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추방생활 및 숱한 염문을 뿌리며 방탕한 생활로 보낸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운문소설 <에프게니 오네긴>을 발표하여 주목을 모은 이후, 국민시인의 영예를 누리며 <대위의 딸>로 더욱 부동의 명예를 얻었다. 그는 진실한 러시아 정신, 러시아 사회의 현실적인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국민문학을 창시했다는 찬사와 함께, 러시아어의 연마, 독자적인 예술형식의 구축으로 불멸의 공적을 남겼다. 결국 연애사건으로 파탄을 일으켜 결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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