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프란츠 카프카) △
고독, 회의, 불안에 떠는 현대인을
옌간히 인내심 있는 독자라도 눈살을 찌푸리게 되고, 웬만큼 소설적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고 난 후 에 놀라운 얼굴을 짓게 하는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적 본령은 어떤 것이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령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그런 대답을 기다린다.
초기의 주요작품 중편 <변신>에서 주인공인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침상에서 자신이 흉물스런 한 마리 벌레로 변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모멸을 받고 사회와 등진 채 내적 고투를 겪으며 숨져 간다. 작가가 이를 발표했던 20세기 초의 독문단은 표현주의가 기세를 울린 때였으므로 그 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설이 있다.
카프카의 문학에 경도되었던 김정진 교수는 이렇게 적은 바 있다. '표현주의는 종래의 소위 외계의 감각적 인상을 수동적으로 받아 들여서 묘사하려는 태도를 배척하고, 외계에 대하여 자아를 굳세게 대립시키고, 자아의 내면생활의 표출을 예술의 사명으로 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주관에 의하여 개조된 세계를 형성하려고 시도한다'------<변신>은 이 방법론에 어느 정도 부합하고 있다.
후기의 주요작품인 <성>에서는 마을에 도착한 측량사 K가 성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를 들을 수는 있으나 천신만고의 노력을 해도 끝내 이르지 못하고 만다. 성은 신의 은총을 상징하며 들어가고자 해도 좌절하고자 마는 주인공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현대인의 초상이라 함직하다.
재론할 여지가 없이 카프카는 후대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가들에게 큰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위의 장편을 비롯한 여타 작품은 이 사조의 효시가 되있을것이다. 사회의 모든 기성 가치는 믿을 수 없고 절대자 앞에서 얻는 고독과 절망만이 실조이라는 것 그리하여인간 삶은 부조리할 수 밖에 없다는 명제는 그의 소설 등장인물이 온몸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바다.
이런 이색적이고 비현실적 극한상황을 그린 소설 사이에 장편 <심판>이 위치해 있다. 주인공 요제프 K(이름으로 보아서도 유대인일게 틀림없다)는 작가 카프카 외의 다른 사람일 수 없다. 그가 겪는 공포,불안,위기의식은 세계 1차대전을 유랑민 유대인으로 겪으면서 경제적 고오항과 뒤범벅이 되어 통째 사회 지반이 흔들리는 절망적 상황을 살았던 작가 자신의 정신적 풍향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소설의 서두는 충격적이고 다분히 상징적인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누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무슨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그가 체포된 까닭이다. 집 주인인 그루바흐 부인의 식모는 매일 여덟시만 되면 조반을 가져 왔지만 이날 아침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신 감시인 2명을 대동한 감독이 나타나 체포당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재판정에 회부될 거라고 예고한다.
K는 은행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간부(업무주임)로 공사간의 생활에서 조금도 흠이나 범법사실이 없는 선량한 독신 하숙자 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건 넌센스에 불과하며 어떤 착오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대수롭잖게 치부한다. 하필이면 30회 생일을 맞는 날에....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우선 주위 사람들의 심상찮은 태도에서 K는 알지 못할 옥죄임을 느낄 밖에 없었다.
다음 일요일에 재판소에 출두해서는 기괴하고 악몽을 꾸는 듯한 사태가 속출한다. 방청객들은 편이 나뉘어져 소란을 피우고, 예심판사와의 문답은 전혀 조리가 닿지 않았다. 이날 K는 작품 전체의 성격을 꿰뚫는 중대한 발언을 한다. "오늘 이자리에서 받을 심문의 배후에는 커다란 조직체가 하나 있습니다. 이 조직체는 매수할 수 있는 감시인이나 몽매한 감독, 그리고 좋게 말해서 겸손한 예심판사가 고용살이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제프 K는 자신이 은행에서 유능했던 만큼 이 오해가 개재된 재판건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양으로 동분서주한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적어도 예의를 지키려는 시늉이나마 하고, 잘못된 관습을 인정하면서도 묵묵히 순종하는 '기계화된' 자들이다. 때문에 재판소에서 일하는 여인은 "당신은 여기서 뭘 좀 개선해 보시려는 거지요?" 하고 캐묻는다. 과연 K를 둘러싸고 있는 사법제도, 그 구성원들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카프카는 유대인 부상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프라하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한동안 생계를 꾸리기 위해 노동자 재해보험국에 근무한 경험이 있다. 그런 경험이 이 장편의 표면적인 틀 비리,모순투성이의 법제도와 형식주의에 빠진 관청의 행정 절차를 신랄하게 비판할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표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지향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카테고리와 관료조직의 비리 속에서 불안,공포에 시달리며 턱없이 희생당하는 현대인의 위기의식을 작가는 구체적인 재판소,예심판사,변호사,사형 집행리를 빌려서 제시한다.
K는 집안 아저씨의 충고에 따라 변호사를 만나 사건을 의뢰하지만 그는 늙고 병들었으며 권위만 내세우는 자라 자기를 위해 돌보아 줄 능력이 전무하다는 걸 알게 된다. 한 달이 넘도록 변론 서류 하나 꾸며내지 못하는 건 차치하고라도 의뢰인에 대한 무죄의 확신 예심판사와의 법리 투쟁에는 관심조차 없이 뒷구멍으로 손을 써서 적당히 재판을 이끌어 가려는 속셈만 내비친다.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던 첫날, K가 거기서 시중드는 처녀 레니를 만나 정사를 가질때 그녀는 이렇게 충고한다. "당신의 잘못을 버리고 너무 고집을 부리지 말아야 해요 아무래도 이 재판에 항거할 수는 없고 결국은 고백을 해야 하는 걸요." 또 재판소에 소속되어 판사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 티토렐리의 힘을 빌려 재판을 무마하려고 만나자 그는 무죄 판결이란 있은 적도 없고 형식적인 무죄와 재판 지연술에 대해 말할 뿐이어서 혐오한다.
막다를 골목까지 쫓긴 케이씨는 은행의 고객을 안내하기 위해 성당을 찾아갔다가 신부와 기묘한 대화를 나눈다. 신부는 법정 문지기와 시골남자의 우화를 들려 주면서, 자신도 이 지상에 관계맺은 사람일 뿐이며 자유의지로 스스로 어떻게 하길 암시한다. 체포당한뒤 1년이 지난 밤에 케이씨는 사형집행자 두 명에게 끌려 거리를 지나 채석장에 이르렀다. 한 사내는 그의 목을 돌덩이에 밀착시키고 다른사내는 칼로 심장을 두 번 찔렀다. 죽기 전에 케이씨는 상급 재판소는 어디 있느냐? 라고 자문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개처럼 죽는다!"케이시까 말했다. 비록 육체는 죽었지만 굴욕만이 살아 남는것 같았다.
이런 대강의 줄거리만 볼지라도 독자들은 이 장편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제재를 환상적으로 전개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카프카의 문학적 개성이다. 가장 병적인 현실을 파혜치자면 병적인 방법으로 접근 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심판의 초현실주의와의 관련성이 잦아진다. 카프카도 자기자신의 내적 경험을 심리의 흐름에 따라서 표현하고 있으며 이지와 논리를 배격하여 어디까지나 꿈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를 위대한 잠재의식을 가지고 정신분석적인 정치성을 띠며 묘사하는 수법을 쓴다는 지적에 귀기울여 봄직하다.
이 장편에는 체포 재판 사형 집행이란 본류 외에도 케이씨의 은행에서의 불안 하숙집 처녀 뷔르스트너 재판소 급사의 처 변호사 조무원 레니 따위 여인과의 얘기가 곁가지로 덧붙여진다. 은행 지점장은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듯 하지만 차석인 지점장 대리는 여차하면 그를 곤두박질치게 하려한다. 때문에 케이씨의 불안심리는 가주왼다. 하급자들도 눈치만 보려 할뿐 진정한 동료애는 찾아볼 길이 없다. 여인들의 문란한 성희는 다른 의미에서 저속한 세태와 재생이 불투명한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이 장편은 세토막의 프롤로그가 그의 사후에 덧붙여져 간행되었다. <미완의 단장> 이란 제목아래'지점장 대리와의 싸움' 이 그것이다. 이런 덧붙이는 글이 있다 하더라도 작품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되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심판은 난해한 소설임에는 틀림없지만 현대문학을 이해하기위해선 그 입문서로 손색이 없고 모름지기 예술가의 고독한 작업이 어느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깨우치는 첩경이 아닐까 싶다. 그보다 이런 소설을 대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공포심을 갖고 되돌아 보며 전율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의 삶에 대한 지식 문학적 교양이 한단계 더 성숙한 수준에 다다르리라.
<카프카>
독일 소설가.
프라하에서 태어나 한참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2차세계대전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함께 문명이 드높아져 카프카 붐을 일으킬 정도의 이색적인 작가에 속한다. 중편 <변신>이 출세작이 되었고 <심판>,<성>,<아메리카>가 나왔는데 후자는 카프카의 <파우스트>라 불리운다. 많은 작품을 썼는데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그의 진가는 빛을 발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