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예화, 인용

정복자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4. 7. 5. 13:07

정복자 (앙드레 말로) △

인간의 행동과 고독

필자가 문학청년이었던 시절,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학 2학년 무렵인가 이 <정복자>를 읽게 되었다. 그때가 1960년대로 막 접어든 때여서 우리나라에 카뮈, 사르트르 등과 함께 말로의 작품이 한창 소개되어 '부조리의 문학'이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인식되었고, 그런 한편 말로는 생텍쥐페리, 헤밍웨이와 묶여져서 '행동주의 작가'로 청년층의 독자에게 크게 어필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또 이 무렵엔, 소설 작품이 정공법의 기법을 따르고 있는 자연주의나 사실주의 문학엔 염증을 느낄 때였고, 로망류의 연애물이나 일본 문학의 사소설에는 거부반응을 일으키던 객기와 긍지가 뒤섞이던 그러한 나이에 이 장편을 읽고서 온 근육이 경직될 만큼 매료되었던 적이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찬탄과 공감이 우러나왔던 것 같다.

'유유히 아랫입술을 깨물며, 붕대에서 상처난 팔을 빼고 일어선다. 우리는 힘껏 포옹했다. 공허한 모든 것과 절박한 죽음으로 환기된, 심각하고 절망적이며 알 수 없는 어떤 비애가 나의 가슴속에 용솟음치고 있다. 불빛이 한 번 다시 우리의 얼굴을 비칠 때 가린은 나를 응시하고 있다.'

이 구절이 우리를 압도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것을 막연하게나마 앙드레 말로의 문학적 특성과 결부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첫째, 그것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이 장편에서 여자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외부적 조건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여기에는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 점이 주의를 끈다. 가린의 침실에서 두 나체 여인이 언뜻 비쳤던 장면이나, 클라인이 참살된 장소에 한 여인이 잠시 다가선 일 외에는 여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이 항상 곁에 따르고 있음에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적 달성의 원대한 포부와 목전의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지혜와 용기가 긴박감 속에 응축되어 있다. 사색보다 행동이, 관망보다는 감행이 우선해야 하는 상황이 시종 일관한다. '유유히 아랫입술을 깨물며, 붕대에서 상처난 팔을 빼고 일어선다'라는 구절은, 한 투철한 혁명가가 자신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서도 도중하차해야 하는 비애가 스며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픔보다는 어떤 결의를 내포하는 듯한 힘찬 문맥을 보여준다.

둘째로, 또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은 인간의 고독한 모습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가린, 보로딘, 클라인, 니콜라예프, 그리고 홍, 이 모든, 일견 무자비해 보이고 혁명과 모험과 대결에 삶의 의의를 걸고 그 와중을 즐기는 듯한 프로패셔널한 인문들에게서 우리는 고독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나'가 있고, 동지가 있고, 그리고 모두에게 공동의 투쟁 목표라는 연대감이 있지만, 그러나 그들 개개인간에는 결국 단절이라는 인간 조건이 금 그어져 있으며, 그보다 그들 개인에게 내재해 있는 떨칠 수 없는 고독을 초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허한 모든 것과, 목전에 절박한 죽음으로 환기된 심각하고 절망적이며……'라는 문장은 직접적으로 그 고독감에 연결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장편 전체에 관류하고 있는 느낌을 환기케 해주는(혹은 암시하는) 정서를 내포하고는 있다고 보아진다.

행동은 전혀 관념이 아니다. 그러나 고독은 관념일 수도 있다. 광동 전역에 걸친 영국 자본주의에 대항한 노동자의 파업, 변절자에 대한 테러, 영국의 후원을 받는 군벌과의 전투, 게다가 내부세력의 마찰과 붕괴, 이러한 극도의 동적인 상황 가운데서의 주역들의 행동과 고독은 이 소설의 힘차고 명료한 문장 속에 미묘히 녹아 신선한 감동과 매력을 안겨 준다. 20대에 갓 들어선 청년층에게는 이 장편이 단연코 새로운 경이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정복자>는 광동 혁명을 소재로 하고 있다. 더 자세히, 중국 대륙에서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맺어진 후, 손문이 타계하고 신흥 소련 세력이 국민당 정권을 원조하던 1925년부터 이듬해까지, 광동을 무대로 하여 영국 제국주의 외세에 대항하여 투쟁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의 자유와 독립, 통일을 꿈꾸는 광동정부와,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자기네의 영향 하에 두고자 하는 영국, 이들 두 세력의 근거지는 광동과 홍콩이라는 인접된 두 도시에 두고 있다.

'홍콩. 이 섬은, 지도 위에는 까맣고 선명하게 문빗장처럼, 구강(球江)을 가로막고 있고, 이 강 위에 회색 덩어리로 광동이 펼쳐져 있다. 이 광동은 영국 포대에서 불과 수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점철로 표시된 희미한 교외를 가지고 있다.' 소설 서두의 묘사처럼 광동과 홍콩은 지정학상으로 근린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홍콩은 영국 자본이 물밀 듯 들어오는 동남아 진출의 창구이며, 광동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국을 사수하고자 하는 민족세력의 본거지이자 전초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곳에서 광동정부가 부두의 쿨리를 비롯한 전 노동자에게 영국세력에 대항하여 전면 파업의 지령을 내리는 것으로 막을 올려, 이듬해 진형명의 군대를 격파하고 북벌이 시작되는 즈음에 대단원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의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격동기였던 시기를 내레이터인 '나'의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문학 형식상으로는 완전한 르포르타주 문학이 된다 하겠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말할 나위 없이 작자 자신이지만 그는 작중에서는 혁명에 직접 관여치 않고 다만 관전과 서술만을 맡고 있다. 등장인물의 묘사, 사건의 전개, 그리고 혁명의 성격과 그 역사적 허실까지도 모두 상대방의 대화로써 표현하고 있다. 등장 인물 중엔 가린의 비중이 크긴 하지만, 그러나 여느 소설처럼 결정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는 없을 듯하다. 보로딘, 클라인, 니콜라예프 등 외국인의 혁명 가담자와 진태, 테러리스트 홍 등 내지인 모두가 각자의 개성과 활동의 폭을 가지고 주요 역할을 맡으며 움직이고 있다. 그들을 소묘해 보면 이러하다.

가린은 스위스인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권력에서 돈도 우대도 존경도 바라지 않는, 오로지 열망하는 것은 권력 그 자체'뿐인 사람이다. 소련의 인터내셔널에 의해 광동정부에 파견되어 외국인 고문으로 선전위원직을 맡아 경찰을 휘하에 넣고 '열망하던' 권력이 성취되는 그때에 열대병으로 귀국하게 된다(발문에 의하면 후에 그는 자살했다).

보로딘은 '레토니아 소도시에서 주위의 경멸을 받으며 장래 시베리아를 꿈꾸고 마르크스 탐독에 열중한 젊은 유대인의 청년기 추억'을 가진 자로서, 역시 고문의 직책으로 있으면서 노동자 조직을 관장하다가 후에 육군 및 항공국장까지 맡아 권력의 정상에 오른다. 그는 소련 정부에 밀착한 인터내셔널을 대표하는 자로서 극도로 부지런하고 용감하며 대담하게 자기 행동에 열중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진태. 그는 중국의 간디로 일컬어질 만큼 사심 없고 결백하며, 전 중국인의 존경을 받는, 특히 우익의 정신적 지도자로 군림하는 노인이다. 노동자가 제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보로딘, 가린 등과 견해를 다리하게 되고 테러 행위를 종식시키려다 결국 테러리스트들에게 희생을 당한다.

가장 개성적인 인물은 테러리스트인 홍일 것이다. 피 끓는 개구쟁이 같은 청년, 위험과 테러 그 자체를 탐닉하는 듯한 아나키스트. 말로의 다른 대표적 작품 <인간 조건>의 테러리스트 진을 연상시키나 그보다 더 단순하고 무서운 반항아이다. 광동정부 수뇌들의 명령을 거역하다가 종국에 처형되는 운명을 택한다.

이 밖에도, 소련에서 정보원으로 전전하다가 광동정부에 고용되어 경찰국장까지 오른 러시아인 니콜라예프, 독일인으로 동맹파업의 유럽 조직자 클라인 등이 혁명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클라인의 죽음은 이 소설에 있어서 이런 세계에 투신한 용감한 자들의 최후가 얼마나 전율할 만한 것인가를 시사해 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에게 인질로 잡혀 가서 두 눈까풀이 예리한 칼날에 도려내지고, 면도칼과 군도에 의해 입이 처참하게 찢겨지는 고문을 당한 끝에 죽어 갔다. 혁명이 아무런 희생 없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테러리스트 홍의 팔에 새겨진 문신의 글 '마지막 한 방울의 피……'라는 뜻과 함께 혁명의 와중에 뛰어드는 일의 험난함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이 장편소설은 혁명의 과정을 평면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기록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인간의 이야기를 쓴 소설임은 부인할 수가 없다. 소설의 전3부 소제목이 <접근> <권력> <인간>으로 구분지어져 결국 인간에로 귀착시킨 것에는 작자의 의미심장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가린이 비록 여느 소설에 있어서처럼 단일한 주인공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작중의 주역이고 그에게 앵글이 쏠려 있음은 분명하다. '나'가 광동으로 가면서 가린의 이력을 정보 보고서를 통해 파악하는 전반부나, 혁명을 직접 주도하고 병력을 손수 배치시키며 전투를 지휘하는 것이나, 후반부에 홍콩에 기항하는 모든 선박의 광동 입항을 금지시키는 법령을 공포케 하는 그 모든 것으로도 그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이런 점보다는 오히려 가린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미로프의사의 말과 함께, 그가 죽음(열대병에 걸려 있으므로)을 도외시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고독에 짓눌러져 있음은 인상적이다. 그런 한편, 작자가 제3부의 소제목을 '인간'으로 한 의도도, 그리고 이 작품을 인간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근거도 이런 면에서 타당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작자의 '발문'의 한 구절을 인용해 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는 드물게도, 자기 작품에 대해 작자의 의견을 토로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학가의 룰을 깨뜨리고 진지하게 피력하고 있으니까. '이 책의 잔존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혁명의 여사여사한 에피소드를 그렸기 때문이 아니고 행동의 천품과 수련과 지혜를 한몸에 구유한 영웅의 전형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말로(Malraux, Andre;1901~76)

프랑스 소설가·비평가.

파리 태생으로 중학을 마치고 곧 동양어학교에 진학하여 범어·안남어·중국어를 익혔다. 21세에 프랑스를 떠나 페르시아·인도·태국·인도지나·몽고 등 동양에서 모험에 찬 생활을 보낸 바 있다.

행동주의 문학의 주창자로서 제1차대전 후 문단에서 활약하며 <정복자> <왕도(王道)> <인간조건>을 속속 발표했다. 1936년에 스페인내란이 일어나자 인민전서파에 가담, 좌익적 태도를 보였으나 제2차대전 후 전향하여 드골정권의 문화상으로 입각하고 반공의 대열에 섰다. 그 밖에 장편 <희망>이 있으며, 해박한 지성으로 문단과 사상계에 끼친 공적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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