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언덕 (에밀리 브론테) △
사랑과 증오가 격동하는 언덕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많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이보다 더 강렬한 사랑은 좀체 찾아보지 못할 거 같다.
작작 에밀리 브론테가 성장한 요크셔 지방으로 짐작되는 황량한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길에서 주워와 길러진 히스클리프가 주인의 딸인 캐서린을 사랑하는 인연부터가 <폭풍의 언덕>의 극적인 강도를 더한다. 주위에 이웃이 없어 험한 바위산과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에서 야생마처럼 뛰놀며 자랐던 캐서린에게도 히스클리프는 영혼을 다 바쳐 사랑한 상대였다.
나는 이 소설을 읽노라면 어쩔 수 없이 에드가 앨런 포의 뜨거운 연시 <애너벨 리>가 떠오른다. 삭막한 구릉지대와 바닷가 왕국이라는 공간의 차이는 있지만, 천사조차 연인의 사이를 질투한 탓으로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사별한 정황이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나이 먹은 어른들,
똑똑한 어른들의 사랑보다도
훨씬 훨씬 강했어요.
저 하늘 위 천사들도 바다 밑 물귀신도
어여쁜 애너벨 리의 영혼과
내 영혼을 떼놓을 수 없답니다.
달만 뜨면 언제나 찾아드는
어여쁜 애너벨 리의 꿈.
별만 뜨면 언제나 눈에 선한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동자.
그래서 밤새도록 나의 애인, 나의 사랑,
나의 목숨, 나의 색시 옆에 누워 있어요.
과연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 남의 아내가 되어서 해산의 후유증으로 죽고 난 후 더욱 그녀와 가까워진다. 그녀의 무덤을 파헤쳐보기까지 하면서 그녀의 환영과 더불어 살다가는 스스로도 식음을 전폐한 가운데 허물어진다.
이 장편은 영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혀지려니와 우리 나라에서도 청소년계층에서 열광적으로 읽혀지고 있다. 자연과 인사(人事) 어느 것 하나도 강렬하지 않는 게 없어서 이 책을 읽고는 열병을 앓으며 사랑에 대해 짐짓 눈을 떠가게 되리라.
무대가 되는 곳은 캐서린의 아버지인 언쇼 씨의 조상 전래의 저택인 '워더링 하이츠'이다. 워더링이란 이 지방 사람들이 사용하는 고유한 형용사로서 폭풍이 불어 하늘 모양이 거칠어진 모습을 뜻한다고 한다. 제법 떨어진 곳에 단 하나의 이웃인 린튼 가의 저택 스러쉬크로스 그렌지가 자리잡고 있다. 눈과 폭풍이 불 때는 황량하지만 들꽃이 무성하게 자라서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고장이기도 하다.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언쇼 씨가 큰 도시인 리버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루한 기아히스클리프를 주워오게 됨으로써 작품의 서막이 오른다. 가족으로는 아내와 열네 살 된 아들 힌들리, 여섯 살인 딸 캐서린, 그밖에 농사일을 돌보는 집사와 하녀들이있다. 이 이야기는 하녀 가운데 넬리라는 여인의 회상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보다 나이가 조금 위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질이 거만하고 악독한데가 있으나 언쇼 씨의 생전에는 자식 취급을 받으며 주인의 편애를 받았기에 자유롭게 자란다. 하지만 이 댁의 양주가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며 죽자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힌들 리가 가업을 계승하고는 그를 머슴처럼 부리며 학대한다. 그는 타고난 천성에 더하여 음침하고 고집스런 청년이 되어간다.
활달하고 천진스럽기만 한 캐서린은 유일한 벗이며 마음에 맞는 히스클리프오 짝이 되어 들녘을 누비며 성장한다. "항상 유쾌하며 쉴새없이 혀를 움직여 노래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여, 다른 사람이 자기와 똑같이 행동을 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괴로움을 끼쳤던것입니다. 이렇게 말썽꾸러기 말괄량이이긴 했지만 마을에선 가장 아름다운 눈과 귀여운 미소와 상큼한 다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둘 사이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열렬한 사랑이 자연스레 싹튼다.
그런데 캐서린이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이따금 교유를 가져왔던 이웃 그렌지 저택의 에드가에게 마음이 기울어진다. 속마음까진 그렇지 않으면서도 거름일을 하는 히스클리프가 불결해 보이고, 에드가의 핸섬하고 교양인다운 태도에 호감을 느꼈던 것이다. 캐서린이 에드가를 알게 된 것도 히스클리프와 함께 그렌지 저택을 장난삼아 기웃거리다가 개한테 물려 그 집에 묵으면서 치료를 받았던 게 빌미였으니 운명은 아이러니컬하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 하녀 넬리에게 에드가의 청혼을 받아들일 의사와 함께 자기를 험담하는 말을 엿듣고는 그 길로 집을 뛰쳐나간다. 그 후에 곧 캐서린은 에드가의 아내가 되어 시누이 이사벨라와 함께 그렌지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민다.
이로부터 3년쯤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홀연히 히스클리프거 완전히 변하여 훌륭한 신사의 모습으로 그렌지 저택을 찾아온다. 그는 그동안에 어디선가 거금을 번 모양으로 행동거지조차 억세고 당당해졌다. 마침 워더링 하이츠의 힌들리는 외지에서 아내를 얻은 후 헤어튼이란 아들을 낳았지만 부인을 사별하여 홀아비로 살고 있었다.
이때 힌들리는 술과 도박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으므로 큰돈이 있음직한 히스클리프를 자기 집에 묵게 한다. 자랄 때 구박 받았던 구원(舊怨)이 사무친 히스클리프에겐 복수하기에 안성맞춤인 형편이었다. 캐서린에 대한 사랑이 사무치는 만큼 에드가에 대한 적개심도 당연히 뒤따랐다.
도박에서 잃은 힌들리의 어음을 사들이고 또 돈을 빌려주어 그 저당으로 소리없이 하이츠를 제 것으로 만드는가 한편, 한편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품은 에드가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집으로부터 뛰쳐나오게 하여 결혼을 한다. 그 결혼은 다분히 복수를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신부를 사랑해주기는커녕 혹독하게 냉대한다.
여기까지가 전반부에 해당하는 스토리로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에게 사랑의 맺어짐과 파탄에 이르는 전말이다.
꿈에도 못 잊을 히스클리프를 재회하고부터 캐서린은 시름시름 앓는 날이 많아진다. 둘 사이에 옛사랑의 불씨가 상존함을 안 에드가는 히스클리프의 방문을 거절했으나 그는 여전히 그렌지 주위를 배회한다. 어떤 날은 에드가가 집을 비웠다는 걸 알고는 뛰어들어와 병상의 캐서린을 부둥켜안고 같이 도망할 것을 간청하기도 한다.
그날 밤, 캐서린은 에드가의 딸인 캐시(엄마 이름을 따서 캐서린이라 했지만 여기선 편의상 애칭인 캐시로 씀으로써 혼란을 피하기로 한다)를 낳고 숨을 거둔다. 비극은 이것으로 끝이 나지 않고 중복된다. 이사벨라는 사랑도 없는 히스클리프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넬리에게 다음과 같이 하소연할 정도였다.
"그이는 인간이 아녜요. 저의 친절 같은 걸 요구할 권리가 그이에겐 없어요. 전 그이에게 온 마음을 바쳤고, 그이는 내가 준 것을 받아 목 졸라 죽인 뒤에 도로 내게 집어던진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그이는 내 마음을 부숴버렸기 때문에 제게는 이제 그이를 위해 바칠 친절의 힘이 없어요. 또 설령 그이가 지금부터 죽는 그날까지 캐서린 때문에 피눈물을 흘린다 해도 전 동정을 하지 않겠어요."
이사벨라는 드디어 히스클리프 곁을 떠나 런던 근교에 살다가 어린 린튼을 낳고는 외롭게 죽는다. 캐서린이 운명한 지 13년쯤 뒤, 그리고 어린 린튼이 열두 살이 되었을 무렵이다.
린튼은 어린애 때 잠시 그렌지에 맡겨졌다가 히스클리프가 찾아가 길렀지만 생부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을 만큼 무정하고 험하게 키운다. 그리고 힌들리마저 심신이 탈진하여 나중에 죽게 되는데 이로써 워더링 하이츠 가의 힌들리와캐서린 남매, 그렌지가의 에드가와 이사벨라 남매는 모두 이승을 하직하고 다음 세대의 얘기가 전개된다.
그들은 힌들리 소생인 헤어튼, 에드가의 딸인 캐시, 그리고 히스클리프의 아들 린튼으로서 악마의 화신같이 변한 히스클리프의 그늘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폭풍의 언덕>은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관계를 옥죄며 무리를 범하고 있지 않나 싶다. 우선 히스클리프가 미스터리 소설 고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단기간 거금을 벌어 금의환향하는 것부터가 황당무계하고, 양가의 규수인 이사벨라가 근본도 모를 히스클리프를 금세 좋아해 결혼을 하는 것도 의외성이 높다.
또 간교한 변호사를 히스클리프가 매수했다고는 하나, 에드가의 생전에 이미 그렌지 가의 재산이 누이의 소생인 어린 린튼에게 돌아가 히스클리프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나, 히스클리프가 캐시를 집 안에 감금시켜 병약한 린튼과 결혼하도록 하여 며느리로 삼는 대목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가 하면 제 핏줄인 린튼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기하며 복수의 방편으로만 이용하는 점도 소설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살리려는 의도로써만 수긍이 될 따름이다.
이런 의아스러움은 작자 에밀리 브론테의 아마추어적인 창작 경력과 동떨어져서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더구나 강한 인상을 불어넣는 배경이나 두 남녀의 영혼을 다한 사랑도 그녀의 생애를 떼놓고는 이해할 수 없을 성싶다.
<제인 에어>를 쓴 샬롯 브론테의 여동생인 에밀리는 1818년 요크셔 주의 한 교구목사의 1남4녀중 넷째로 태어났다. 얼마 후에 어머니의 건강 탓으로 호워즈 교구로 이사를 했는데 주위는 히스가 무성하고 언제나 강풍이 휘몰아치는 황야였다고 한다.
위로 두 딸이 폐결핵으로 죽었으므로 에밀리는 언니 샬롯과 동생 앤과 함께 기숙사와 집을 전전하며 외롭게 습작생활을 했다.200여편의 시를 쓰기도 했지만 겨우 한 편 완성한<폭풍의 언덕>이 30년의 짧은 생애에서 유일한 소설이었다. 언니의 <제인 에어>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녀의 작품은 빅토리아 왕조의 교훈적이며 고루한 풍토 속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어떻든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거의 전생애를 아버지의 집에서 칩거하며 은둔의 생활로 보냈다. 이런 처지가 그녀의 공상에 나래를 펴게 했고, 병약한 인간과 강인한 생명력의 대비, 정염에 끓는 사랑과 편집광적인 복수극을 꾸며내게 했을 것이다. 여인은 홀로일 때 더욱 기괴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폭풍의 언덕>에서 극단적인 사랑과 증오의 교차, 전반적으로 낭만성이 충일한 가운데 격정과 박력이 소용돌이치는 묘사도 그녀의 비정상적인 생애로 말미암았을 터이다.
작품의 말미는 에밀리으 문학적 개성이 더욱 가열하게 드러난다. 에드가마저 세상을 뜬 후 히스클리프는 유서깊은 두 집을 독차지했으나 그의 사악한 심혼은 한층 침전되어 썩어간다.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은 자기가 수모를 당했던 그대로 무식쟁이 머슴처럼 성장하게 한다. 아들 린튼이 병사한 뒤론 아름다운 캐시를 원수의 씨처럼 경원하며 한집에서 지낸다.
뿐만 아니라 사촌지간인 헤어튼과 캐시도 처한 환경과 개성에 따라 견원지간으로서, 매사에 다투고 저주하는 걸로 해를 넘긴다. 이기적인 광신자인 집사 조셉 영감과 함께 집안 어느 곳에도 인정과 사랑이 고사해버리고 증오와 파멸만이 충전할 따름이다.
히스클리프는 차츰 사람이 싫어지는 것과 반비례로 죽은 애인 캐서린에 대한 사모의 정만 깊어진다. 때로는 캐서린의 환영을 보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다가 드디어 나흘간 식음을 폐한 끝에 캐서린의 환상에 싸여 죽어간다.
히스클리프가 사라진 후 캐시에게 참다운 영혼이 소생한다. 고종오빠이기도 한 헤어튼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면서 새 삶에의 희망과 사랑이 싹터 둘은 결합하고 그렌지 저택에서 행복한 가정을 건설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연히 그렌지 집을 잠시 빌렸던 '나'에게 두 가문에서 오래 몸담아왔던 하녀 넬리의 입을 통해 술회된다. 때로는 '나'와 넬리가 내레이터가 되고 있어 시점의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또 사건의 전개가 넬리의 장황한 설명에 의자하고 있어 묘사의 객관성이 결여되는 단점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인의 무덤까지 파헤치며 그 환상 속에 죽어가는 애증의 적나라한 소유자 히스클리프를 창조한 이 규수작가의 문학적 개성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교양과 보편적인 인정마저 증발한 악인 히스클리프를 독자들이 동정하게 되는 것도 그녀의 혼이 빚어낸 강한 개성의 결과임을 볼 때, 문학의 생명은 역시 개성에서 좌우됨을 도리없이 인정하게 된다.
■브론테(Bronte, Emily ; 1818∼48)
영국의 여류 소설가.
샬롯 브론테의 바로 아래 여동생, 시로서도 영국의 여류시인 중에 출중한 편이나 유일한 장편 <폭풍의 언덕>으로 불세출의 영광을 안았다. 이 작품은 10세로 요절하기 한 해 전인 1847년에 간행한 박진감 넘치는 연애심리소설의 백미편이다.
스토리의 구성상으로는 부자연스러움이 없지 않지만, 황량한 요크셔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무한한 애증에 불타는 악마적인 성격을 묘사하고, 그 감정의 심각성에 있어서 영국소설의 으뜸으로 찬사를 받는다. 자매가 단 한 편씩의 명작을 남긴 예는 문학사에서 희귀한 일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