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大地) (펄 S. 벅) △
땅과 인간과의 윤리에 대해
<대지>는 여느 세계명작처럼 남녀의 사랑이니 격정의 갈등 혹은 사회적 모순을 해부하는 그런 유형의 소설은 아니다. 인간의 선성과 원시적 생명력을 땅의 자연적 힘과 동일시해서, 그 합일을 통해서 가치를 조명해보고자 한 작품이다. 대지는 정직하고 땀과 근면을 요구하며 베푼 만큼의 수확을 약속해준다. 주인공 왕룽(王龍)의 인생은 이런 의식에 확고히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대지는 그를 저버리지 않는다.
펄 벅은 생후 4개월이 되었을 때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 민중 속에서 성장했다. 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3년여를 고국에서 보냈을 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반생애를 보냈다. 그러므로 <대지>는 작가가 몸소 겪은 생생한 체험과 중국 농민, 그들의 역사에 대한 동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쓰지 않고 뱃길 수 없는 순순한 작가적 의지가 그녀를 일약 문호의 위치에 올려놓았으며, 자신이 접해본 농민들의 절실한 삶의 모습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조형하고 리얼하고 담담한 객관적인 묘사로 이 여류작가는 훌륭한 서사시적 장편을 다듬어 낸 것이다.
첫머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 왕룽의 결혼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궁핍한 탓에 여염집 처녀를 얻을 형편이 못 되므로 그곳의 대지주인 황가집 계집종 하나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왕룽이 아내를 얻으러 그 댁 노부인을 찾아갔을 때 아편에 취한 노부인의 모습은 중국 대가집의 악습을 완벽하게 그려 보인다. 노부인은 아란(阿蘭)을 내어주며 동냥치에게 자선을 베푸는 듯 거드름과 자애로움을 섞어 말한다.
"이 여자는 열 살 때 들어와 스무 살이 되는 오늘날까지 이 집에서 자랐다. 흉년이 들어 이 애의 양친이 먹을 것을 찾아 남쪽으로 왔을 때 내가 산 거다. 보는 바와 같이 이 애는 몸도 건강하고 양쪽 볼도 모가 져서 튼튼하게 생겼다. 너를 위해 농사일도 잘할 게고 물도 잘 길을 것이며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이 여자는 머리가 영리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음씨는 비길 데 없이 착해. 또 내가 아는 바로는 틀림없는 숫처녀야……"
아란은 못생긴 얼굴이었으나 정직하고 부지런했다. 왕룽은 그녀의 외모와 말이 과묵한게 아쉬웠으나, 그런 까닭에 주인댁 아들들의 희롱을 받지 않았을 터이므로 처녀 아내를 얻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줄곧 부엌에서 매질을 당하며 살아왔기에 대지와 같은 인종이 몸에 밴 여인이었다.
아란이 가족이 된 뒤부터 부부가 들에 나가 함께 열심히 일했으므로 왕룽 일가의 생활은 점점 윤택해졌다. 수확은 모두 돈으로 바꾸어 벽틈에 감추어두었다가 몰락해 가는 황가집에서 논을 조금씩 사들여 제법 넓은 토지를 소유하게끔 되었다. 더구나 여자는 일 잘하고 사내아이를 많이 낳는 게 가장 큰 미덕으로 삼았던 풍습에 맞추어서 아란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앟았다.
넷째 아이를 배고 있을 때 이 지방에 극심한 한발과 기근이 엄습했다. 하늘을 바라보고 땅만 믿고 사는 사람들에겐 이 천재지변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말라 쩍쩍 갈라진 땅에서 아무 것도 얻어낼 것이 없자 생명 줄이나 다름없는 곡물 종자 씨와 가축을 깡그리 먹어 치웠다. 왕룽 일가는 기아 직전에 다다라도 토지만은 결코 팔지 않았다. 남쪽 지방은 기근이 들지 않았으므로 그곳 도시로 내려가 구걸로 연명할 작정을 하고 세간을 팔아 난생처음으로 기차를 탄다.
남쪽 도시는 피난민들로 아비규환이었다. 왕룽은 열심히 인력거를 끌고 아란은 길거리에서 동냥바가지를 들었지만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 왕룽은 남겨두고 온 토지에의 애착 때문에 자주 고향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어보나 그때마다 아란은 극구 만류한다. 좋은 일이 생겨 한밑천 잡게 될 태니 그때까지 기다려보자는 거였다. 과녕 그녀의 예감이 들어맞았는지 이 도시에 전쟁이 일어난 걸 계기로 수많은 빈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부자집에 밀려들어가 살상과 약탈을 자행했다. 왕룽 내외도 그들의 물결에 휩쓸려 한 대가댁의 저택에 들어갔는데, 천성이 정직한 이들은 처음엔 재물다툼에 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왕룽은 우연히 뒤처진 몸이 되었다가 안채 골방에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주인댁 한 사내로부터 거금을 빼앗는다. 마침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딸 하나를 팔려던 참이었으므로 선량한 왕룽에게도 이런 용기가 우러났던 것이다. 한편 대가집의 구조에 익숙한 아란은 아수라장 속에서 숨겨둔 보석들을 찾아내어 간직한다.
재산을 손에 쥔 일가는 곧 소도 한 마리 사고 각종 씨앗도 마련하여 금의 환향한다. 고향으로 돌아와선 옛 주인인 황가집의 전답을 싸게 사들여 넓은 땅을 갖게 되고, 게다가 7년 동안이나 풍적이 계속되었으므로 왕룽은 일약 거부가 된다. 천성이 근면 소박하나 이런 변화에 마음이 들뜬 왕룽은 연화(蓮花)라는 예쁜 첩을 얻기도 하고, 아들 3형제 왕일·왕이·왕삼에겐 그들의 적성에 따라 학자와 상인, 농군으로 교육시킬 계획도 세운다. 그러는 중에 그토록 자기에게 내조했고 평생의 반려로 일해주었던 아란이 병들어 죽는다.
왕룽이 비로소 아내에게 애잔한 동정을 느낀다. 특히 그녀가 보석 중에서 진주 두 개를 남겨 가지고 그토록 애지중지 간직해왔던 걸 자기가 빼앗아 연화에게 주었던 일이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그녀를 묻고 돌아온 날, 왕룽은 "그 땅에는 내가 보낸 반평생이 묻혔다.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묻고 오는지도 모른다." 하며 아내의 죽음을 조상한다.
이런 줄거리로 <대지>는 평면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극적 국면과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이 여러 곳에 깔려 있다. 처음 이 장편을 읽은 이래 오늘날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대목은 기근이 들었을 때의 참상이다. 선량한 이웃이 도둑질을 하고, 자기의 자식을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굶주릴 때에 흙을 파먹는 대목이 그것이다.
'며칠 전부터 그들은 '자비로운 대지의 여신'이라 불리고 있는 이 흙을 물에 풀어서 먹고 있었다. 이 흙으로 목숨을 이어갈 수는 없으나 다소의 여양분은 섞여 있었다. 죽처럼 걸쭉하게 해서 먹이면 일시적이기는 하나 아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줄 수가 있고, 딱 달라붙은 그들의 뱃속에도 무엇이건 간에 들어가는 셈이었다.'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헐값에 토지를 구입하러 다니는 상인에게 결코 토지를 팔지 않는 아란이 진주 두 개를 왕룽에게 청해서 갖게 되었을 때의 수줍은 미소와 왕룽이 아내를 장사지내고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것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장편을 펄 벅이 38세 되던 1930년에 집필해서 이듬해 출판되어 곧 퓰리처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뿐만 아니라 왕룽의 아들들 세대를 그린 제2부<아들들>과 손자들의 시대인 <분열된 가정> 등 전3부작을 발표한 후엔 노벨상(1938년)을 수상하기도 했다. 펄 벅에게 노벨상이 주어졌을 때 세계문단 일각에서 비판적인 반응이 사뭇 높았다. 사실 그녀의 작품은 <대지>(제1부)를 제외하곤 문학적으로 평가받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장편도 서구인의 눈을 통해 동양의 이색적인 정황이 리얼하게 묘사된 경이감의 득을 한몫 단단히 보고 있는 셈이다.
어떻든 <대지>는 수백 권의 중국에 대한 사회과학서적보다 종국인을 알리고 이해시키는데 있어서 더 큰 효과를 얻고 있다. 이 점이 바로 문학예술의 효능일 것이다. 광막한 토지에 밀착되어 있는 중국인의 의식구조, 자연에 투영된 농민들의 불굴의 혼은 이런 사실적인 문학작품에 의하지 않고는 전달될 수 없을 터이다. 펄 벅이 후반 생애를 고아들의 구호를 위해 진력했던 휴머니즘도 <대지>에 깔려 있는 동정심, 이를테면 허기진 아란이 넷째 아이를 낳았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고, 그 핏덩이가 늑대 밥이 되어 버렸던 참혹한 운명에 대한 연민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