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스탕달) △
현란한 연애심리소설의 압권
<적과 흑>운 세계문학사상 연애심리소설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진다. 이런 근거는, 시골 출신의 한 재능있고 출세욕에 불타는 미청년이 자신의 향리에서 고용주인 시장 부인과 통정하고, 나아가서 파리의 세력가인 후작 영양의 사랑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심리의 추잉와 사랑의 기교에 말미암는다. 따라서 남녀간의 델리킷한 감정교류가 주류를 이루면서 사련에의 발각과 탈출, 보복의 총성과 단두대의 처형 등 극적 전환이 부수적으로 따름으로써 흥미를 증폭시킨다.
그러나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 가운데 하나로 손꼽을 만큼 진가를 얻는 데에는 이런 단순한 사랑 얘기를 넘어서는 여러 가지 묵중한 주제가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런 요인들을 간추려보면, 첫째, 인간의 과만한 야심에서 오는 파멸에의 경고, 둘째, '1830년의 연대기'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이 시기에 프랑스의 두 세력(진보적인 공화주의자와 귀족 및 성직 계급)간의 갈등, 그리고 세 번째로 인간의 안식처와 구원이 어디 있는가를 작지 나름대로 천명한 점이다.
그러므로 이 장편소설은 이런 복합적인 문제들이 뒤얽혀서 한 시대상과 인간의 진실을 규명해내고 있다 하겠다. 인간의 주위환경에 순응할 수 없을 때 본능적으로 그 타개책을 모색하게 된다. 시골의 가난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난 줄리앙 소렐은 자신의 처지를 억울하게 생각하고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본다. 천부적으로 상냥함과 총명과 미모를 가진 위에 그는 교활이라는 발톱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여서 주교와 신부의 지위가 우대되고 교권이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때였으므로 그는 처음에 신학생을 택한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행운이 주어졌을 때는 이에 탄력성있게 대처한다. 기품있는 얼굴과 날렵한 자태를 이용하여 파격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성직을 꿈꾸었던 청년이 사련의 소용돌이에 휘감긴 사정을 불문학자 김붕구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줄리앙의 심리와 일거일동에는 계급의식이 항상 악착스레 따르고 있다. 만일 줄리앙에게 '사내 대장부가……'라는 자의식이 발동되지 않았더라면, 또는 개인적으로는 그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면서고 계급적으로는 '그들과 같은 무기로 싸울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그들의 종 노릇을 해야 한다는 계급적인 반항심--그 자존심과 귀족에 대한 경멸이 없었던들, 또 어떤 방법으로든지 출세를 하고 그들과 같은 자리에 올라서야겠다는 야심만만한 공리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던들 천사 같은 레날 부인의 마음을 정복할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이며, 은인 라 몰 후작의 딸을 유혹할 계략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출세욕으로 인한 간계와 몸부림을 수용해들일 만큼 관대하지도, 허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줄리앙은 그가 꿈꾸었던 것을 다 성취시켰다고 해도 좋을 시점에서 자의에 의해 좌절당하고 그리고 죽음 직전에 비로소 진정한 사랑에 눈떠 행복을 맛본다. 인간의 영혼은 권위주의적인 종교에서보다도 진실한 사랑을 쏟는 여인에게서 구원받고 있다.
이 장편은 18세의 미청년이 정숙하고 아름다운 유부녀를 유혹하고, 그 덫에 걸린 부인이 고통을 감내하며 연인관계를 지속하려 안간힘을 쓰는 전반부에서 한결 소설대운 정채를 띤다. 후반부는 작위적인 사건이 중첩되고, 연애의 능란한 기술, 음모와 배신 따위 드라마틱한 국면이 나열됨으로써 사회적 요소가 강한 데 비해 전반부는 긴장미가 넘치는 소설적 묘사로 전개된다.
지방의 소도시 베리에르에서 가난한 대목의 막내아들로 자라난 줄리앙은 무지막지하고 인정이라곤 없는 가족들의 구박 속에서 헤어날 기회를 포착한다. 그 고장의 늙은 사제로부터 라틴어를 배운 게 널리 소문이 나서 레날 시장 집의 가정교사로 불리어 간 것이다. 시장은 지독한 구두쇠였지만 좋은 가정교사를 두었다는 평판을 얻으려는 심산으로 좋은 보수를 줄 것을 자청했다. 그런데 시장 부인은 명문가 출신으로 세상물정을 모르는 선량하고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부인은 후리후리한 키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여인으로서, 이 산간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이 고장 제일가는 미녀였다. 부인의 행동에는 어딘지 순진하고 젊은 기색이 엿보인다. 만약 그 순진하고 쾌활하며 자기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부인의 매력이 파리장의 눈에 띈다면, 도리어 달콤한 정욕을 자극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줄리앙은 이러한 레날 부인한테 단지 부에 대한 증오감으로 접근하게 되지만 그녀를 품에 안은 후부터 차츰 열렬한 사랑을 느낀다. 시장에겐 철저한 위장과 아이들에겐 헌신적인 봉사로써 신뢰를 갖게 하면서. 한편, 레날 부인도 그의 고아한 인격과 청순한 젊음에 반해서 깊은 신앙과 귀족의 체면을 걷어찬 채 줄리앙한테 매달리기에 이른다.
이런 둘 사이는 이들을 각기 탐하던 하녀와 이 고장 유지인 발르노의 간교로 인해 들통이 나고, 줄리앙은 레날 부인의 협조에 힘입어 브장송의 신학교로 입교하고 만다.
교권은 강대했지만 교계가 타락한 시대여서 성직자라 할지라도 나름이겠으나 줄만 잘 타면 부와 명예, 권력까지도 손아귀에 쥘 수가 있던 때였다. 이 소설의 제목이 <적과 흑>인바, 작자 스탕달 자신이 시사한 바로는 '赤'은 줄리앙이 처음에 추구했던 자유·급진의 공화주의를 나타내는 것이고, '黑'은 성직자들로 대표되는 반동적 세력을 지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은 붉은 옷을 입은 군대와, '흑'은 검은 승복을 입은 성직을 표상하며 권력계층을 암시한다는 설이 유력한 편이다.
어떻든 성직자에의 길은 왕정복고시대에 있어서 영화를 누림을 뜻함에는 틀림없다. 줄리앙은 이러한 영달의 방편을 택했다가 뜻밖에도 신학교 교장인 피라스 사제의 눈에 들어 파리의 세력가인 드 라 몰 후작의 비서로 천거되어 인생이 급전한다.
이러기까지 줄리앙과 레날 부인과의 애정관계, 영혼의 교감을 묘사하는 대목들은 가히 연애소설의 백미편이라 이를 만하다. 스탕달이 스스로도 떠들썩한 연애를 연출했고, 독서계에 널리 회자된 <연애론>의 저자였듯이 줄리앙이 상류계층의 부인들을 매료시키는 테크닉이나, 레날 부인이 양심과 관능 사이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장면은 연애심리교본으로서 손색이 없다. 귀부인의 침실로 잠입해드는 청소년의 모습은 애교와 함께 사랑의 무분별함성을 명징하게 빚어놓는다.
주인공 줄리앙 소렐은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위장이나 간계도 서슴지 않는 위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의식이 강해서 굴종이나 능멸을 당하고는 참지 못하는 기상을 갖춘 청년이기도 하다. 고향에서 유부녀를 농락한 전철이 있는 그는 파리에서 다시 불가능할 법한 지체 높은 규수를 자기 여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 방법이 극히 위선적이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어떻든 인간적이란 면에선 득의한다.
후반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후작의 가정에 들어간 줄리앙은 처음엔 시골뜨기라 하여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으나 마침내 그의 재능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후작의 슬하 남매중 막내딸인 마틸드는 미색을 갖춘데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처녀였다.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를 흠모하여 늘 싸고도는 크라즈놔 공작을 비롯한 숱한 귀족 청년이 있지만 그녀는 이들을 마음으로 경멸한다. 그녀는 영웅시대의 기사 같은 남자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앙은 오직 그녀의 콧대를 꺾어놓기 위해 정복할 것을 결심한다. 마틸드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속기가 없는 정신과 핸섬한 모습에 마음이 끌려 일시 몸을 허락하지만 이내 후회한다. 줄리앙은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자 연애교본에 따라 마틸드와 친교가 있는 원수(元帥)의 미망인에게 열애하는 척함으로써 마음을 되돌려놓는다. 이런 대목들은 오늘의 시각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유치할 수도 있으나, 이 장편이 발표된 1830년대의 프랑스 상류사회 풍속도를 감안한다면 신선한 화제일 법도 하겠다.
임신한 마틸드가 격노한 아버지를 설득하여 결혼을 승낙받음으로써 그의 야심이 성취되는 듯도 했다. 후작은 평민 사위를 볼 수 없다 하여 그를 기병 중위로 임관시키며 영지를 하나 물려준다. 그런데 레날 부인에게 줄리앙의 행실을 조회한 결과 중상하는 회답이 옴으로써 이 행운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신앙심이 깊은 레날 부인은 속죄했던 사제의 구술에 따라 본의 아닌 회답을 보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줄리앙은 부인을 응징하고자 베리에르로 내려가 미사에 참석한 옛 여인을 저격한다. 그녀의 상처는 대단치 않아 곧 회복되었지만 이로인해 줄리앙은 사형 언도를 받는다. 마틸드는 신분의 탄로를 무릅쓰고 백방으로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허사가 되고, 오히려 감옥에서 레날 부인의 진심을 안 줄리앙이 그녀로부터 사랑의 환희를 찾게 됨으로써 신고(辛苦)를 맛본다.
작품의 말미는 줄리앙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지고, 마틸드가 그 목을 몰래 장사지내며, 며칠 후 레날 부인이 충격으로 숨을 거두는 걸로 끝난다. 마틸드의 헌신적 애정을 외면하고 레날 부인의 사랑에서 지복을 누리는 결과가 주제로 등장한 셈이다.
<적과 흑>은 일면 달콤하고, 또 한편으로 출세가도를 향해 질주하는 세속적인 스토리로 일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대담한 모험을 감행하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와중에 인간의 정력의 원천인 정열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결정(結晶)됨으로 인해 허영이나 타산적인 삶을 초월하여 순수한 사랑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지금까지 주인공이 추구했던 가치가 얼마나 무위로운 것인가,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소이이기도 하다.
<적과 흑>의 시대적 배경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처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공화제가 실시되었다가 그의 퇴장으로 인해 귀족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여 왕정으로 되돌아간 사회였다. 이럼으로써 청년계층과 다수의 민중에게 싹텄던 자유·급진 사상은 된서리를 맞았다. 흐르는 물은 되돌릴 수 없는 게 역사의 순리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회는 이 천리를 역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화파였던 스탕달은 이 작품에서 계급투쟁에도 배려하고 있어 작가로서의 그의 넓은 영역을 맛보게 한다.
줄리앙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살길을 찾자면 그런 길은 열려 있었다. 그런데 배심원 앞에서 최후 진술을 할 때, 그의 마음 한편에 자리잡고 있던 고상한 품성이 고개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
"설사 본인의 죄가 훨씬 가볍다 치더라도 어떤 분들은 동정을 살 만한 본인의 젊은 나이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나를 벌주려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본인을 처벌함으로써 본인과 같은 청년에게 영원히 용기를 꺾어놓으려는 것입니다. ……본인의 눈에는 배심원적에 한 명의 부유한 농민을 찾아볼 수가 없고 오직 분개한 부르주아 제공들뿐입니다."
이런 진술은 목수의 아들 같은 평민이 상류계층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제어하는 사회에 대한 고발이며, 배심원의 편파적인 구성으로 불이익이 돌아올 수밖에 없는 하층민의 절규이기도 하다.
또 작가는 주인공의 독백을 빌려 기득권 계층의 하나인 교계에 대해서도 심각한 회의를 나타낸다. 줄리앙이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아! 참말로 진정한 종교가 있을 수 있다면……나도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 지금 마음이 약해진 내가 고딕 성당과 그 어마어마한 색유리를 보고서, 그 색유리로 거룩한 사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판이다. 내 영혼이 그러한 사제를 희구하고 있으니 그런 분이 있다면 그를 이해할 수도 있으련만." 하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장대한 고딕 건물과 미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그 위엄과 권능을 과시한다. 그러나 인간 영혼의 구원은 이런 외형적인 권위나 제도로써는 이룰 수 없고, 오직 양심적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에 따라 사는 사제의 자세로 가능함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스탕달은 문학가인 동시에 사회개조가요 신앙 본연을 되찾도록 촉구한 회개사이기도 하다.
줄리앙 소렐은 로맨티시즘이 풍미하던 시대의 한 반항적인 초상으로 끝나는 인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신귀족을 지향하며 부단히 돌진하는 청년상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보다 더 부유해지고 싶고, 보다 더 나은 지위에 오르고 싶은 건 인간의 상정이다. 그런데 과연 줄리앙처럼 마음 밑바닥에 고귀한 귀족성을 간직하면서, 위선적인 행동도 그 사회로부터의 박해를 벗어나기 위한 가면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작품은 많은 불륜과 부도덕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줄리앙의 내적인 갈등과 훼손될 수 없는 품성으로 인해 이를 해소시키고 있다. 더구나 진실한 사랑을 찾고 거기 만족하면서 죽음을 맞는 순애는 많은 도덕가들의 비난을 무력하게 하기에 족할 듯싶다.
■스탕달(Stendhal ; 1783∼1842)
프랑스의 소설가.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1800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때에는 소위로 참전한 후, 육군성 경리관으로 독일·오스트리아 원정군에 종군하기도 했다.
여러 분야의 저술에 종사하며 사교계에 드나들다가 숱한 염문을 뿌리기도 했는데 유명한 저서 <연애론>은 그 소산이다. 나폴레옹이 몰락함으로 하여 한때 실의에 빠졌으나, 나중에 영사로 부임하여 죽을 때까지 외교관 생활을 했다.
<적과 흑> <파르므의 수도원> 등 명작을 발표했으나 당대에는 소수의 식자들에게만 인정을 받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재평가받기에 이르러 지금은 발자크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 소설의 2대 거봉으로 중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