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희망의 편지 ♡
여기 한 쌍의 연인이 있습니다.
호젓하게 둘이서만 있습니다.
둘이서 함께 있으면서 서로 마음에 있는 사랑과 정과 생각을 제한 없이 나눕니다.
기도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기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랑의 나눔입니다.
기도는 대화요 동반행(同伴行)이요 동거(同居)입니다.
그러나 명상은 실제로는 둘이서 함께 있는데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고 내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자신 안에 있는 자아(自我)와 독백을 나누는 것입니다.
명상(冥想)에서 명(冥)은 어둠을 뜻합니다.
자신 안의 어둠에 들어가 자신 안의 가아(假我)를 털어내고
진아(眞我)를 찾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명상은 그리스도 없이, 하느님 없이,
성령의 비추임 없이 하는 자아성찰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상은 독백(獨白)이요 독행(獨行)이요 독거(獨居)입니다.
때문에 명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명상은 오로지 자아만을 상대로 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명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화, 무용화, 배제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방법을 곧이곧대로 따르게 되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
분명히 밝히거니와 우리식으로 호감을 갖고 적당히 생각하는 '명상은
저들이 생각하고 설명하는 '명상'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명상을 '기도로 알고 배우려 합니다.
그러나 명상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닙니다.
명상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입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명상이 기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기도가 명상보다 훨씬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립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없이 기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당신과 함께 사시도록 초대하고
항상 그분을 의식하며 기도하고 살아야 합니다.
명상을 말하면서 자세나 호흡법 등 외적인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방법적인 요소들은 꼭 명상법으로부터가 아니라도
본래 좌식 생활권에 해당하는 동양에서는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이미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기도법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명상을 한다고 하면서 부처와 예수, 범신과 창조주 하느님 이름을 뒤섞거나
환치시키는 그런 혼합주의적인 접근법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는 확실한 것을 버리고 불확실한 것을 취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 6)이신 분으로서
그것을 명백하게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성서 말씀이 이미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이렇게 명백한 것을 떠나 '어둠(冥)으로 들어가서
답답하게 진리를 유추, 추론, 탐색, 번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이 이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미 길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상이 아니라 성서 말씀을 마음에 새겨듣는 묵상입니다.
묵상으로 충분합니다.
묵상이 막연한 명상보다 훨씨 알찬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서를 제대로 읽지 않으니까 명상을 하겠다고
이리저리 사찰이나 선방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기 때문에 명상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답답하게 추론하고 있는 것을 예수님은 명철하게 '진리'로서 선포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진리로 선포하는 것을,
예수님은 이미 현실로 사시면서 우리에게도 실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귀 기울여 보았습니까?
그 넓고 깊은 가르침을 과연 얼마만큼 공부하고 받아들였습니까?
그것이나 제대로 소화하였습니까?
2000년이라는 전통의 창고에 쟁여있는 '영성의 보화'를 얼마나 꺼내어 누려봤습니까?
그것이나 제대로 음미해봤습니까?
생각해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