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톨스토이) △
가련한 카추샤, 불멸의 여인
흔히 스토이의 <부활>을 가리켜 문학적 정서라 일컫는다.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렇게 불려지는 듯싶다.
첫째, 성서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나 사흘 후 부활한 예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듯이 이 명작에서는 주인공 네플류도프와 카추사의 영혼의 부활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이 대문호가 이 작품을 쓰게 된동기에서 풍기는 인상이다. 당시 러시ㅏ의 국교인 정교는 그 나라의 정치·사회와 미찬가지로 극도로 안일에 빠져 부패했다. 게다가 정교에서 분파되어 나간 여타의 기독교 종파에 대해선 심하게 탄압했다. 성령부정파 교도도 그 중의 하나로, 이들이 영국 등지로 망명을 허락받았음에도 자금이 업ㄱ어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안 톨스토이는 그 돈을 조달해 주겠다는 박애적 목적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성서가 인간의 죄악과 가식에 찬 제도를 질타하듯이 이 작품에서도 도처에 러시아 사회의 모순―귀족사회의 비윤리적인 생활, 제반 제도의 횡포와 관료들의 악덕, 교회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마치 성서가 민중의 혁명(?)을 유도하듯이 이 소설도 사회혁명을 부르짖는 전에선 흡사하다.
이 명작이 문학상의 가치 이상의 뜻을 지닌다고 보는연유는 이런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성싶다.
우리의 유행가 가사에도 등장하듯이 카추샤는 불해에 빠진, 그러나 애련한 정서를 환기시키는 여인의 이미지를 풍긴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감상적으로 그 일면만 본 탓이다. 오히려 그녀에게선 온갖 모순되 제도와 억압적인 운명에 시달리는 러시아 민중의 고난을 표상하면서도 그로한 부당성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싱싱한 잡초의 풀냄새가 난다.
카추샤는 네플류도프 공작의 고모인 두 늙은 여지주의 집 농노의 사생아로 태어 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집시와 잠시 놀아난 탓에 아이를 낳았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않던 중 이내 죽고 말았다. 어린애를 불쌍히 여긴 여지주가 그녀를 거두어 하녀 반, 수양딸 반 삼아 키웠다. 그래서 이름도 카체리나의 애칭인 '카챠'나 비칭인 '카첸카'로 불려지지 않고 그 중간인 '카추샤'가 된 것이다.
그녀가 열다섯 살 되던 때에 주인의 조카되는 대학생 네플류도프가 이 영지에서 여름방학을 지내기 위해 왔다. 그는 고상한 이상에 불타던 청년이였으므로 예쁘고 생기발랄한 그녀에게 호감만 가졌을 뿐(놀이를 하다가 문득 입맞춤을 한 적은 있었지만) 그 이상의 욕망은 품지 않았었다. 그러나 2년뒤, 근위장교가 되어 임지로 가는 길에 다시 들렀을 때는 판이한 상황이 전개 되었다.
네플류도프는 방탕한 생활을 겪는 끝이라 카추샤를 정목하겠다는 사특한 정념에 지배되어 이 순진하고 깨끗한 처녀를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 백 루블을 던져주고는 떠난 뒤, 몇 개월 후 복무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는 고모집을 들러보지도 않은 채 지나쳐 갔다. 단 하룻밤의 유혹은 이 처녀의 삶을 산산히 부숴놓은 결과를 초래했다. 임신을 하고, 쫓겨나고, 어린애를 잃고, 몇 군데 짐의 하녀로 들어갔다가 농락만 당하고는 끝내는 창녀로 전락하고 만것이다. 나태하고 방탕한 생활이 그녀는 영혼과 육신을 짓이겨놓았지만 하얀 피부, 새까맣게 빛나며 약간 사팔뜨기 같은 눈동자, 풍만한 가슴, 살짝 비웃음이 스칠 때 입가에 잔주름이 지긴해도 여전히 미모와 매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창녀로서 어떤 상인을 따라 여관에 갔다가 불의의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법정에 서게 된다. 실은 그 여관의 종업원 두 남녀가 상인의 돈을 훔치고자 독살하고 그 사건을 카추샤를 얽어 넣은 것이다. 지난 8년간 그녀에 대해 잊고 살아온 네플류도프는 배심원 법정에 나갔다가 그녀를 알아본다. 카추샤는 무성의한 법관의 자세와 배심원들의 부주의로 인해 4년 유형언도를 받고 시베리아로 떠나간다.
자신의 위선과 과오를 참회하게 된 네플류도프는 카추샤에게 향한 속죄와 그녀를 구원하고자 지금까지의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유형지로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만 허락한다면 결혼할 작정이었다.
이런과정을 거친다음에 카추샤의 진면목이 들어난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증오하는 가운데 아직도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는 한편, 유형지로 가는 도중에 정치범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뜬다. 마침 정치범 중의 한 청년이 구애를 해왔으므로 카추샤는 네플류도프의 청혼을 거절하고 황제의 사면조치로 유형에서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유형지로 향한다.
즉,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택함으로써 보장되는 평안한 생활, 부와 명예를 뿌리치고 정치범 유형수와 함께 고통의 삶을 살 그 길을 따른것이다.
'"용서하세요." 하고 그녀는 들릴락말락하게 작은소리로 말했다. 두 삶의 눈이 마주쳤다.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묘한 사팔눈의 시선과 애처로운 미소로 그녀가 한 말은 "안녕히 가세요"가 아니라 "용서하세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카추샤의 모습에서는 애처롭기보다 오히려 당당하고 건강한 생명력이 내비친다. 흡사 러시아 대륙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분위기와도 같이 슬프고 괴로운 러시아 민중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언젠가는 신이 그네들을 구원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의지를 카추샤라고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이 작품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살아있는 개성적 인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톨스토이는 탁월한 작가인 동시에 인류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위대한 사상가이자 예언가이다.
그는 80여평생을 올바른 사회, 정의와 이상이 구현을 위해 모든 관심과 노력을 경주했다. 젊은 시절에 고향 야스나야폴랴나로 낙향하여 농노들의 생활개선을 활동한 거나, 농민의 자제를 위해 학교를 설립한 것을 시발로 하여 지주에 의한 농토의 독점, 재판의 위선 러시아 정교의 부패 등 제반 현실에 대해 전신으로 항거하며 투쟁했다.
아마도 톨스토이는 그의 만년에 이러한 인도주의적 사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싶은 의욕으로 이 소설을 쓰게 된 것 같다(이런점이 바로 그의 문학이 계몽적이고 공리성에 치우쳤다 해서 반대론자의 맹공을 받는 표적이 된다.)
네플류도프는 이상이 드 높았던 청년시절에 토지의 사유화에 반대하여 유산의 일부이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농토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눠준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대학 졸업 후 현실세게에서 안주하고 상류 사교계를 출입하면서부터 고상한 품성은 퇴색되고 무위도식하는 인텔리겐차로 주저 앉고 말았다. 생활의 굴레가 될 뿐인 결혼도 멀리하고 귀족 유부녀와 정사를 벌이는가하면 유안 공작 영양과 교제를 즐기는 생활에 탐닉한다.
그의 영혼이 갱성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로 인해 타락한 카추샤의 불행을 목도한 대서 비롯된다. 톨스토이가 궁극적으로 믿는 '인간의 앵심의 발분'으로 그는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다.
카추샤의 억울한 판결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변호사를 찾고,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가 고등법원에 상고하고, 그것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드디어 황제에게까지 탄원서를 제출한다. 그의 도덕성은 자기로 인해 불행에 빠진 여인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구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부르고, 또 그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동안 카추샤가 갇힌 감옥을 드나들고 또 시베리아 유형에 다라가는 동안 네플류도프는 '못 가진 자의 슬픔'과 사회제도의 비리를 통감한다. 좀 센티멘탈한 면이 없지 않으나 카추샤가 자랐던 영지의 땅을 농민들에게 회사하는 거나, 약한 수감자의 입장을 변호해서 여러 가지 편의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이 그의 변신을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전편을 통해서 카추샤는 자각된 근대인으로 개성적으로 그려지고있으나 네플류도프는 작가의 희구하는 이상적 인간, 오류로부터 각성하여 갱생한 인물이란 도식에만 부합할 뿐, 사실주의 문학의 주인공으로선 뚜렷한 개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아진다. 그것은 스스로도덕성 회복에 만족해하는 장면이나 어떤 심적 동요만 있으면 자기의 처신으 회의의 눈으로 되돌아보는 유약성에서 드러난다.
카추샤를 위해 노심초사 하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권력계층인 미모의 마리에트와 상면하고는 '그녀의 웃는 모습이 마치 그녀가 그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히 떠오르자,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시베리아로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재산을 포기하는 일은 또 어떤가? 하고 그는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하고 갈팡질팡하는 대목에서 이르러선 아연해질 따름이다. 이런 동요를 겪은 이튿날 아침에 그러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걸 보노라면 문학의 한계같은 걸 느끼게 된다.
혹시 작자가 네플류도프를 통해 이상적 인간상, 다시 태어남의 가능성을 예시하는 한편, 자기(작자도 지주인 백작 가문 태생이 었다)와 같은 부류의 허약성을 표출하고자 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네플퓨도프는 어떤 정신적 탈바꿈을 거듭해도 카추샤와 같은 풋푸한 대지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주목해볼 만한 일이다.
<부활>의 첫머리는 두 젊은 남녀의 정념과 양극화의 과정, 그리고 카추샤에 대한 재판을 둘러싼 관련자들의 동정을 아름다운 문장과 치밀한 표현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네플류도프가 부활절 밤에 순결한 처녀를 유란하는 부분은 소설미학의 어떤 완벽미를 보는 성싶다. 그러다가 중반을 넘어서부터 점차 작품의 색깔이 달라진다. 모두에서 판사·검사의 자세에서 엿보였던 러시아의 암울한 현실이 확산되면서 거기에 항거하고 개조를 시도하는 힘이 작중 분위기를 압도한다. 여러계층의 죄수들과 연관된 저간의 사장이 그러하고 재생한 네플류도프의 의식에 비친 사태가 또한 그러하다.
톨스토이는 <전쟁과평화> <안나카레리나> 등의 대하장편을 이미 발표했지만 그의 사상―즉, 톨스토이즘이 본격적으로 피력되고 구체화한 건 이 작품에서였다. 그 사상이란 어떤 것인가?
"그의 사상은 현대의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사해동포의 관념에 투철한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하여 근로·채식·금주를 표방하는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와 자기완성을 신조로하여 사랑의 정신에 의해 전세계의복지에 기여하려는 것이다었다."
이런한 김학수 교수의 지적처럼 그의 사상은 종교, 인간의윤리·사상에의한 사회개혁으로 대별해볼 수 있겠다. 이것은 물론 그 어느때보다 도덕성을 상실한 제정러시아의 말기적인 사회현상에서 비록된것이었다.
판사는 전에 자기 집 가정교사였던 여인과의 밀회시간만 생각하고 있고, 검사보는 간밤에 도박을 한 후 유곽에서 지낸뒤라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며, 여타의 변호사나 증인선서를 하는 사제도 하나같이 무기력하고 속물근성을 나타내는 인물 일색이다. 이런 인물들에게서 어똫게 공정한 사건 처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부터 출발한 개인의 비극이 그 사회를 전체의 비극으로, 드디어는 인류의 불행한 운명으로 확대되어간다. 지방법원의 인물들의 확대판이 바로 페테르스부르크의 귀족 권력층들이요, 또 그 무리가 바로 인류역사를 오도하는 지배자·탄압자가 아닐 수 없다.
이 장편은 1889년에 집필이 시작되어 10년후의 1899년에 발표되었고, 그 얼마후 노일전쟁을 거쳐 러시아혁명이 돌발했다. 로마노프 왕조하에서 신음했던 민중이 다시 볼셰비키의 압제 밑에 들어간 것은 참담한 일이겠으나, 그 왕조의 붕괴를 예언한<부활>의 내용은 예언자적 메시지가 되기에 충분하리라.
이러한 톨스토이의 <부활>은 암흑의 일제하에서 근대화의 갱생에 몸부림치던 한반도 지식인과 우리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도 이상주의적 인도주의와 민중의 계몽에 매진하며, 창작을 이념 실천의 도구로 삼았던 춘원 이광수에겐 절대적이었다. 우선 그 자신이 열렬한 톨스토이 숭배자였으며, 약한자 또는 보호받아 마땅한 것에 대한 애정, 전인격주의자에의 선망(네플류도프)은 그가 창조한 인물에게서 예외없이 우러난다.
예컨데<유정>의 최석 교장, <사랑>의 안빈의사, <흙>의 허숭 변호사는 모두 톨스토이에 감화된 사랑의 구도자라 할 만하겠다. 아울러 춘원은 톨스토이가 "내 소설도 나의 철할적 교훈 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봉사해야 한다."라고 천명한 공리성에 철저히 다랐던 점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톨스토이(Tolstoi, L. N.;182∼1910)
러시아 세계적 문호로 서소설가이자 사상가.
러시아 귀족중 손꼽히는 명문 집안에서 출생하여 잚은 한때는 세속적 쾌락에 빠졌으나 문학에 심취됨과 아울러 루소의 감회를 받아 심기일전했다. 군대생활을 청산하고는 잠시 교육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나 결혼을 계기로 평화로운 가정생활에 들어가 창작에 전념했다.
6년간에 걸쳐 연재한 대하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는 세계문학사의 최고의 명작으로 손색없다. 그 다음에 역시 대하장편인 예술적 원숙을 기한 <안나 카나레나>를 내놓았다. 이러는 사이, 죽음의 공포, 삶의 문제 등으로 사상적 동요를 경험하여 과학·철학·종교에 그 해답을 구하고자 했으나 실망하여 자살을 기도한적이 여러번 있었다. 이후 농민의 참상에 크게 동정하여 자기 사유재산을 모두 회사하면서 박애주의자·인도주의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 세계 도처에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만년의 명작 <부활>은 예술적 성서로 일컬어지며 그 외에도 <무저항론>등의 저서와 민화·인생론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가족들과의 불화로 집을 뛰쳐나와 조그만 시골역사에서 병으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