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인격 (도스토예프스키) △
거장이 그리는 ‘의식의 분열’의 의미
많은 사람들은 <이중인격>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작으로서, 그 이후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완성했던 인간 고뇌의 탐구라는 명제의 첫 시도작이라는데 주목을 보낸다. 그러한 주목은 완전히 타당하고 또 충분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후기의 대작들을 일별해 보면 가장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고 잡약될 수 있는 것은 역시 주인공의 성격적불균형에서 파생되는 비극, 또는 인간 심리의 복잡한 다면성, 무한한 모순, 분열 등을 전율할 만큼 박력이 넘치는 필치로 묘사한 점을 들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무신론적 초인사상 의식에 의해 파생되는 죄와 벌이라는 테마를 설정하고는 이상 천재의 심리를 추적하고 있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선 성격이 전혀 다른 네 아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성격과 내면 의식이 어떻게 행동으로 전개되어 나가는가 하는 심층적 심리를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작품을 포함해서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대할 때, 작중 인물의 행위 그 자체에보다 그 행위가 발생하게 되는 저변――즉 인물의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고뇌・증오 등의 갈등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거기에서 무한한 깊이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은 다른 작가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을 한결같이 띠고 있다. 현저히 병적인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행동보다는 의식의 영역이 훨씬 지평이 넓고 깊으며, 또 정상보다는 비정상적 요소가 훨씬 더 많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스토예프스키는 현상의 인간보다 현상 뒤에 있는 보다 복잡한 인간의 덩어리, 보다 거시적으로 인간을 투시하려 했던 위대한 예술가였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중인격>은 이러한 그의 병적인 인간, 인간 심리에 내재한 제 비극적 양상을 구현하려 한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시발이라는 데에 우선은 그 의의를 둘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정은 도스토예프스키에만 악센트를 주었다는 편견을 면치 못할 것 같다. 비록 이 작품의 플롯이 단조롭고 전개가 지루하다는 당대의 비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가 지닌 공감력과 더구나 현대 문학의 예언자적 임무를 완수했다 할 만큼 새로운 문학기법을 이룩한 것으로 충분히 걸작이라 일컬어져야 할 것이다.
주인공 골라드킨은 소심하고 정직하며 예의바른 사람이다. 관청에서는 9등 문관의 명맥을 근근히 유지하고 있는 사나이다. 직속 과장인 6등 문관 안드레이 필립포비치를 만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당황하게 되고, 지나쳐서는 침착하지 못했던 처신을 후회하는 왜소한 직업관리이다. 또 풋내기 14등 문관들 앞에서는 제법 어엿한 투를 내려고 애쓰기도 한다. 문벌도 재력도 재능도 없어 출세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없음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늦도록 장가를 들지 못했으나 하인(봉건 러시아에선 하인 하나를 데리고 있다는 건 조금도 대단한 일이 아니다)과 같이 월세 아파트를 빌려 살고 있다. 내핍하여 모은 7백 50루블을 깊이 감추어 두고 흐뭇해하는 그런 위인이다.
이러한 우리의 주인공 골랴드킨은 그러나 불행히도 정신 상태가 정상적이질 못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데서 비롯된다. 약삭빠르지 못하다는 무능감, 자기를 대수롭잖게 보는 상사나 동료에 대한 소외감, 출세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뭉쳐 그의 의식을 짓누루고 있는 것이다.
그가, 눈비가 뿌리는 음산하고 침울한 페테르스부르크를 배경으로 등장한 서두에서 자기의 주치의, 크레스치얀 이바노비치를 방문했을 때부터 극도의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 즉, 초조감과 피해의식으로 묶여질 수 있는 기미가 그의 동작과 언행에서 쉽게 노출된다.
“그건 그렇습니다, 네, 크레스치얀 이바노비치. 저는, 크레스비치얀 이바노비치, 아마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무척 온순한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가는 길은 독자적인 겁니다. 크레스비치얀 이바노비치. 인생의 길은 넓습니다……제가……크레스치얀 이바노비치, 이 말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용서하십시오. 크레스치얀 이바노비치, 저는 말재주가 도무지 없어서 말입니다.”
이런 대화의 공소함을 상기해 보면 그의 증세에 우리는 땀이 나기 시작한다. 계속 상대방의 이름만 거듭 부르면서 마디마디 끊어지는 말을 지껄이고 있지만 정작 전달하려는 내용은 오리무중이다. “그 녀석들은 소문을 꾸며 댔습니다. 우리가 곰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그의 조카인 우리의 중보가 여기에 끼어든 겁니다. 물론 그 녀석들은 호소엔 그의 피해의식의 윤곽이 대체로 드러난다. ‘곰’은 과장인 안드레이를 지칭하며, 중보라는 시니컬하게 부른 사람은 과장의 조카로 8등 문관으로 승진한 젊은이 블라지미르 세묘느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복선이 깔려 있다. 골랴드킨이 의사와 헤어져 곧 자기가 초대받지도 못했던 올스피 이바노비치의 무도회에 무리하게 나타나 결정적인 창피(알다시피 정신질환의 결과로 인한 것이지만)를 당하고 쫓겨나게 되는 것과도 긴밀한 함수관계를 지니고 있다. 자기의 은인이기도 한 이바노비치에겐 클라라 올수피예브나라는 어여쁜 딸이 있다. 골랴드킨은 이후 줄곧 그에 대한 사랑의 망상에 빠진다. 그렇지만 블라지미르 때문에 그는 곤혹한 선망과 시기에 몸부림쳐야 했다. 그 젊은이는 출세에서나 사랑에서 그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앞서 있고 유리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 하루 망신을 당하고 돌아올 때에, 이 작품의 주요 포인트인 이중인격이라는 의식의 분열을 일으킨다. ‘2월의 눅눅하고 안개기 짙은, 비와 눈이 뒤섞여 오는, 그리고 모든 염증, 코감기, 열병, 편도선염,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열병――한 마디로 말한다면 페테르스부르크의 2월의 모든 선물은 그 속에 가진 무서운 밤’에 에워싸인 폰탄카 강둑을 걸으면서, 그는 갑자기 자기와 닮은 한 분신을 또 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 작품은 골랴드킨이 새로 나타난 신 골랴드킨에게 조롱과 수모를 당하다가 결국에는 극도의 자기 함정에 빠져 정신병자 수용소로 끌려가는 비극적 말로까지 다다르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이중인격의 개념은, 한 개인이 두 개의 완전히 독립한 성격이나 의식으로 분라하여 존재하는 것, 즉 이중의식 또는 교대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 그 제 1인격과 제 2인격이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경우와 종종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불행히도 골랴드킨은 후자에 속하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이중인격>은 의식의 분열이라는 정신적 질환을 가진 한 인간의 파멸을 다룬 극히 이색적 소재의 장편이다. 이러한 작품 패턴은 후일, 카프카 등의 작품 세계와 관련지어지고, 또 여기에서 다룬 무의식의 세계, 독백 등을 통해서 엿보이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법은 세계 문학사를 진동시킨 마르셀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의 새로운 문학과 밀접한 연결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이 후대 작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문할뿐만 아니라철학・종교・사회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가 뻗쳐나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운 문제를 제기해 주고 있음은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그러나 <이중인격>이 단순히 정신질환자의 파멸을 다룬 것으로 받아들여서느 ㄴ안된다. 왜 이러한 의식의 분열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파악해 봄으로써 보다 인간의 조건, 그 실존의 비극성이라는 큰 문제에 맞닥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편에서는 신 골랴드킨에게 속물 근성――약삭빠르게 처신하고, 상사나 동료의 비위를 잘 맞추며, 기회를 포착하여 자기를 뚜렷이 과시하려는 성격을 부여한다. 그러기 위해선 의리도 인정도 없고, 때로는 냉혹하며 때로는 간사스러워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구 골랴드킨에겐 없었던 성격, 그래서 구 골랴드킨의 무의식 속에서 ‘이러해 봤으면’ 하고 희구했을 그런 면이 새로운 독립된 성격으로 분리되어 나타나진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만일 그 새로운 성격에 골랴드킨의 생활을 보완해나갈 수 있다면 문제가 달라지지만, 전혀 상반되게 나타난다. 여기에 비극이 있다. 분리된 제 2의 인격은 본래의 제 1인격을 끊임없이 학대하고 짓밟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간사하고 몰인정하며 후안무치한 본신에게 본래 선량하고 정직하며 적당히 예절바른 우리의 주인공이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작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운명을 페테르스부르크라는 무겁고 침침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조명하고 있다. 사흘간의 시간적 배경과 일정한 무대를 선정하고, 그 한정된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의 의식・무의식 행동의 전모를 예리한 묘사력으로 펼쳐 보인다. 방계적 사건도 인물도 없이 지루할 만큼 주인공 한 사람에게만 시점을 보내며, 빈번히 독백을 삽입시켜 이끌어 나가는 작자의 역량 앞에 우리는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된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묘사력은 셰익스피어에 필적한다, 라는 평가는 지극히 적절하다. 그러면서 작품 기법에 있어선 앞으로 올 문학을 예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천재성을 한층 뚜렷이 한다. 시대가 갈수록 도스토예프스키가 재평가되고, 그의 작품이 더욱 폭넓은 공감력을 획득하게 되는 요인에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현대적 기법으로 표현한 데에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 F. M. : 1821~81)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문호, 소설가.
모스크바에서 가난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포공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 한동안 군에 복무했다. 출세작 <가난한 사람들>이 호평을 받아 문단에 등단했으나 곧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 집행 직전에 감형되어 시베리아에 유형된 전말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독특한 소재와 인간성의 밑바닥을 뚫어보는 예리한 관찰력이 작가의 귀중한 체험 속에 훌륭히 살아 있으며, 최초의 걸작 <죄와 벌>과 <백치><악령> 등 그의 문학적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장편소설이 잇달아 쏟아져나왔다. 특히 필생의 대작인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최고의 작품이다.
근대문학의 특징인 인간심리의 복잡한 다면성, 무한한 모순・분열 등을 무서우리만큼 박력에 넘치는 필치로 묘사하여 현대문하게 끼친 공적이 다대하다.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종교・철학・사회문제 등 각 방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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