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책 소개)

단테의 신곡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1. 9. 1. 22:42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니,/ 나도 영원히 남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알리기에리 단테가 쓴 「신곡(神曲·La Divina Commedia)」 ‘지옥편’에 등장하는 지옥문에 새겨진 글귀다. 끓어오르는 지식욕을 주체하기 힘들었던 중학교시절 읽었던 책이었던 만큼 그 감동과 충격도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신곡」에서 단테는 서른세 살 되는 해 성 금요일 전날 밤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며 번민의 하룻밤을 보낸다. 이튿날 빛이 비치는 언덕 위로 다가가려 했지만 세 마리의 야수에 가로막혀 올라갈 수 없게 된다. 그때 단테가 아버지처럼 존경하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를 구해 길을 인도한다. 그는 먼저 단테를 지옥으로, 다음에는 연옥의 산으로 안내하고는 베아트리체에게 단테의 앞길을 맡긴다.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된 단테는 천국에까지 이르고, 그 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이 「신곡」의 줄거리다.

「신곡」은 원래 Commedia(희극)라는 제목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근대소설의 선구자로 불리는 보카치오가 Divina를 첨가해 지금의 제목으로 불린다. 이는 이 대서사시가 지옥이라는 ‘슬픈 시작’으로 출발하지만 끝내 하느님을 체험하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주일에 걸쳐 지옥과 연옥, 천국을 차례로 순례하는 단테의 여정을 담은 「신곡」은 그 생생함과 역동성 때문에 이 시인이 정말 세 곳을 다 다녀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품게 만든다. 그 이유는 단테가 마치 지옥을 거닐어본 사람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테가 지옥의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지옥의 마지막 아홉 번째 단계까지 내려가면서 생생하게 전해주는 지옥의 곳곳에는 내가 알고 있던 영웅이나 현자, 신들이 벌을 받고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어린 나이에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지옥에 의외로 성직자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 의문은 나이가 좀 더 들어서 풀렸는데, 단테는 「신곡」을 통해 당시 종교의 부패상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단테가 「신곡」에서 표현한 지옥보다 더한 고통으로 넘치는 지옥도(地獄圖)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곳곳에서 연출되고 있다. 만약 단테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분열과 전쟁, 시기와 탐욕 등으로 넘쳐나는 우리 세상을 지옥과 등치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다. 다른 게 있다면 단테의 시어는 그 생생함으로 사실성을 띠지만 오늘날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그 자체로 현실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고통의 소리가 갈수록 격해지는 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단테가 그토록 보여주려 했던 하느님의 사랑이 고갈돼 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 교리만큼이나 난해한 ‘연옥편’은 「신곡」에서 가장 철학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그대가 고백해야 할 것을/ 부정하거나 입 다물어 버린다 해도 그대의 죄가/ 덜 드러나지는 않는다오. 저 심판관이 아시니까!”

‘연옥편’의 핵심이라 할 이 부분에서 단테는 인간 자유의지의 참뜻을 일깨운다. 여기서 그는 죄를 속속들이 고백해야 하느님의 뜻을 좇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구가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단테는 자유의지야말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며, 이를 삶 속에서 올바로 실현할 때 천국으로 안내하는 베아트리체를 만날 수 있음을 들려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따라 지옥이나 연옥을 거닐 수도 있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지옥은 바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과연 우리는 어느 자락을 거닐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