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 교리/주교회의 교리

[스크랩] [예비신자 교리] 16과. 한국 교회사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1. 3. 11. 16:29

【 16과. 한국 교회사 】



◎ 천주교가 전래되기 전의 조선
천주교가 이 땅에 전래되기 이전의 조선 후기(18세기 말엽)에는 극심
한 당파 싸움으로 불안이 그치지 않던 시기였고 당시의 계급차별(양반. 
중인. 상민)이 심하여 구조적 변화를 갈망하는 요구와 움직임이 있었고, 
더불어 해마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사회 변화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어 
천주교가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부각되고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을 통하여 ‘천주실의’등의 천주교 교리
서가 들어와 실학파들과 남인계 학자들 사이에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학문적 호기심으로 연구되던 천주학은 천진암과 주어사의 연구모임인 
‘강학회’를 통해 신앙적 실천운동으로 발전하게 되고 마침내 이벽,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철신, 권일신 등은 천주교에 대한 지식의 
폭을 넓히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게 되었다.
◎ 교회의 창설(1784년)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많은 교리서와 
성경, 성물을 가지고 귀국한 뒤 뒤이어 이벽 등이 영세 입교하였고 서울
의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종교집회를 마련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신앙공동
체가 형성되면서 한국교회가 탄생되었다.
한사람의 전교 신부조차 찾아간 적이 없었던 한국에 하느님께서는 기적적
으로 신앙의 싹을 튀웠고,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오랜 박해 기간동안 신앙
을 증거하고 키워왔던 자랑스런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 주문모 신부의 입국
명동성당 자리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 집회를 열고 전교를 하던 교회의 
지도자들이 추조(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됨으로써(을사추조 적발사건)집
주인인 김범우가 믿음을 굽히지 않아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86년 성직자가 없었으므로 임의로 북경교회를 본떠 소위 가성직제도
(假聖職制度)를 만들어 2년 동안 주일미사와 세례, 견진, 고해성사 등
을 베풀었다.
이는 잘못된 교리 해석의 결과로 1789년까지 계속되다 북경주교에게 문
의한 후 시정하기에 이르렀다. 
1794년 교우들의 성직자 영입운동으로 주문모신부가 들어와 신자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위기를 느낀 조선왕조는 체포령을 내렸다.
여회장 강완숙은 주 신부를 나무 광에 숨겨 보호하는 등 모진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조선 천주교회의 전교는 계속되어 나갔다.
◎ 박해
천주교가 이 땅에서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사상적으로 유교의 신분사상
과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갈등을 빚었고, 사회적으로 조상제사를 미신
으로 간주하여 이를 거부함으로써 전통질서와 가치관을 파괴한다는 
우려를 주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당파싸움에 천주교가 이용되었기 때문
이다.
1795년 주문모신부가 입국한 후 신자수가 1만영으로 급격히 증가하였고, 
순조즉위 후인 1801년 당파싸움에 권철신, 정약종, 이승훈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 300여명과 주문모신부가 순교하였다(신유박해).
1836년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의 입국으로 활기를 띠었으나 1839년 
정부는 ‘척사윤음’을 반포하여 세명의 성직자와 정하상을 비롯한 신자 
200여명을 처형하였다(기해 박해).
그후 십여년 동안 박해가 뜸하게 되고 최양업 신부와 열두 명의 프랑스 
선교사의 노력으로 신자수가 2만3천명에 이르렀다.
병오박해(1946년)로 김대건 신부 등 10여명이 순교하였다.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집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대대적
인 박해를 가했다. 
1866년 아홉 명의 성직자와 만 여명의 신자가 순교하였다(병인박해).
* ‘척사윤음’ 이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 그를 배척하기 위해 
임금이 내리던 윤음. 즉 임금의 말씀이다.
◎ 신자들의 신심(信心)생활
한번의 성사를 보기 위해서 평생을 모험 속에서 ;
조선 시대에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단정하였기에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초대 신자들은 믿음을 받아들이고 언제나 순교할 각오로 
살았다.
단 한번의 성사(聖事)를 보기 위해 평생 사제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
했고 단 한번의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수백리 험한 산길을 걸어 한밤
중에야 비밀리에 미사 참례를 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 재현 ;
교우촌은 물질의 궁핍 속에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초근목피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상태였지만 같은 생업에 종사하며 
서로 돕는 이웃사랑이 사도행전(2,44-47);4,32-37)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방불케 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선교사에게 교리를 배우면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진리, 생명의 말씀을 정성과 노력으로 공부했다.
성령의 역사 ;
200년전, 이 땅에 복음의 전래가 선교사 없이 이룩되었고 1801년 큰 
박해이후 성직자가 한분도 안 계셨던 30여년을 신자들은 쫓기고 숨어 
살면서 믿음을 살리고 교회를 지켜옴은 교회 안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 한국 최초의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무명의 순교자들
치명순교 선열 중에 뚜렷한 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이다. 
한국최초의 신부로서 1846년 9월16일 26세의 나이로 한강물 굽이쳐 
흐르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이외에도 103위 성인이 1984년 성인품에 올랐으며 무명 순교자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룩해 놓았다.
* 군문효수형이란 ? - 공개적으로 사형수의 죄상과 판결문을 낭독한 
후 양쪽 귀에 화살촉을 위로가게 꿰고 사형수의 웃옷을 벗긴 후 목을 
베어 군문(軍門)에 높이 매달아 놓는다.

출처 : 미사의 종소리
글쓴이 : 청하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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