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론 Vom Kriege〉 등의 저서를 통해 적의 모든 영토·재산·주민을 공격 대상으로 하는 전면전(全面戰) 개념을 주창했다. 가난하지만 전문직업을 가진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792년 프로이센군에 입대했다. 1793~94년에 프랑스 혁명군과 벌인 라인 전투 때 임관되어 이후 수년 간 수비대에 근무했으며, 그곳의 여건을 이용해 상당한 시간을 공부에 쏟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1801년 베를린에 있는 육군대학 입학허가를 받았다. 베를린의 육군대학에서 스승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의 지도로 군사학을 배웠고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으며, 독자적인 기본 전략개념을 발전시켰다. 샤른호르스트의 소개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장래에 아내가 될 마리 폰 브륄 여백작과 만났고 샤른호르스트의 주선으로 아우구스트 대공의 부관에 임명되었다. 대공의 부관으로 예나 전투(1806)에 참전했다가 프렌츨라우에서 프랑스군에게 사로잡혔으며, 1808년 프로이센으로 돌아왔다. 그는 샤른호르스트가 주도한 프로이센 군대개혁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직전에 사임하고 다른 독일 애국자들처럼 러시아군에 들어갔다. 1812년 원정에서 그는 러시아군 참모장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러시아의 성공적인 퇴각 전략에 일부 책임을 맡았고 타우로겐 회의 개최를 위한 협상에 참여했다. 이 회의를 전환점으로 프로이센은 프랑스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1813~14년의 전쟁에서 여러 직책을 거친 뒤 프로이센군으로 돌아왔으며, 워털루 전투 때는 군단 참모장으로 일했다. 1818년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육군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2년 동안 클라우제비츠는 한직인 이 자리에 있으면서 역사연구서와 전략문제를 다룬 주요저서 〈전쟁론〉을 집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큰 명성을 얻은 이 책에서 그는 프리드리히 대제와 나폴레옹의 전투 경험을 기초로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들을 밝혀냄으로써 군사적 천재성의 역할을 분석했다. 그의 결론들은 오늘날에도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기술적 논의는 가급적 생략했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읽혔다. 그는 어떠한 전략적 체계도 만들지 않았으므로 그때까지의 틀에 박힌 기계적인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신 심리적 요소와 치밀한 계산을 할 수 없는 우발적인 요소의 중요성과 전략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군사 지도자가 직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자세히 논의함으로써 독자들이 이론에 입각한 군사적 판단력을 갖도록 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모든 적절한 요소들을 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략 수립의 3대 목표는 적의 세력·자원·사기이며, 방어전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강점이 많다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을 완성하기 전에 브레슬라우로 전속되었고 1830년의 폴란드 혁명을 감시하기 위해 배치된 프로이센군을 맡았다. 그러나 브레슬라우에서 돌아온 직후인 1831년 11월 16일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 그의 원고는 헌신적인 미망인에 의해 편집·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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