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던 에페소 성모마리아 대성당 유적. 기 간 : 431. 6. 22 - 7. 17, 5회(회의) / 첼레스티노 1세 교황(422-432) 배 경 니체아 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하여 삼위 일체론이 신학적으로 규명되자, 교의사의 초점이 그리스도론에 집중된다. 당시 교의 신학의 과제는, 그리스도안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존재함을 고백하며동시에 이 두 본성이 한 위격 안에서 이루는 일치의 성격을 구명하는데 있었다. 불행히도 이 신학적 발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던 두 신학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 사이의 불목과 투쟁으로 얼룩졌다. 안티오키아 학파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428)가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theotokos)'로 불릴 수 없고 다만 한 인간 예수를 낳은 한에서 단순히 '그리스도의 모친(christotokos)'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려 이에 두 학파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치릴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의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자 이에 네스토리우스가 치릴로에 반발, 황제 테오도시오 2세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공의회 소집을 요구하게 되었다. 과정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일치하여 하나의 본성을 이룬다고 강조하였다. 즉 양성은 스스로 존립하고 혼합되지 않으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병렬됨으로써 그 속성들이 서로 교환되어야 한다(표현의 교환). 하지만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을 확실히 구분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인성과 신성의 결합은 의지적 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상반되게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매우 강조하였으며, 양성의 외적인 결합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신성과 나란히 인성을 자립시켰다. 즉 신적인 로고스가 인간 예수 안에서 마치 성전처럼 거처를 취했다는 것이다. 치릴로는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의장직을 맡았으며,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인 요한을 비롯한 안티오키아 학파 신학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공의회를 진행하였다. 이 때문에 네스토리우스는 에페소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세 번씩이나 참석하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치릴로는 그리스도의 양성의 위격적 결합(위격적 일치-구체적이며 자존하는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강생한 예수그리스도의 일치를 뜻함)에 대한 교리서한을 낭독하였으며 의결을 통해 마리아에 대한 '천주의 모친'의 칭호가 채택하였다. 수일 후, 안티오키아 주교들이 그들의 총대주교 요한의 인도 하에 도착하며, 즉시 네스토리우스의 편을 들었고, 대립공의회를 열었다. 쌍방이 악의적인 공격을 일삼자 황제는 치릴로와 네스토리우스를 체포하고 치릴로는 알렉산드리아로 보내고, 네스토리우스는 상부 에집트로 추방함으로써 일단락 지었다. 결과 및 의의 주요 결정 사항 -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이단 선고 -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둘러 싼 5세기 그리스도론 논쟁이 극단적으로 치달은 결과로 낳게 된 산물이다. 당시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는 데 역점을 둔 반면,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 됨을 강조하였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안테오키아학파의 주장을 극단으로 몰고 간 이단으로 하느님의 성자(聖子)와 인간 예수를 서로 다른 두 위격으로 간주한다. 한편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극단적인 주장은 단성설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 인성을 완전히 흡수하여 그리스도 안에 오직 하나의 본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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