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4. 8. 2. 21:12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최근에는 조금 뜸해졌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여전히 세계 어딘가에서는 상영되고 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의 포스터만큼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1930년대 할리우드의 영화 포스터와 비교하자면 이 포스터는 굉장히 잘 디자인되었다.

무엇보다 메인 비주얼과 서브 비주얼의 관계를 확실히 대비시켜놓아 주목도가 높다. 글꼴도 잘 선택되었으며 어느 한 구석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없다. 사실 할리우드가 황금기 시절을 보낼 때조차도 영화 포스터는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타이포그래피가 엉망이었는데, 실력 없는 디자이너가 영화의 개성을 부여한답시고 독특하게 해서 더 망가진 포스터들이 흔했다. 이들과 견준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포스터는 군계일학처럼 세련되었다.

이는 이 영화의 제작자인 데이비즈 셀즈닉(David Selznick)의 힘이 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감독인 빅터 플래밍의 영화가 아니라 제작자인 셀즈닉의 영화다. 그는 [스타워즈]의 제작자인 조지 루카스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고 관여했다. 심지어는 한창 촬영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감독을 두 명이나 해고했다. 무난한 성격의 빅터 플래밍만이 마지막까지 연출직을 보장받았다. 1930,40년대 할리우드에서 대부분의 감독들은 그저 연출가였다. 모든 촬영이 끝나면 감독은 집으로 돌아갔다. 편집과 같은 중요한 후반 작업과 광고, 홍보는 모두 강력한 파워를 가진 스튜디오의 몫이었다. 따라서 포스터에서 감독의 흔적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셀즈닉은 스튜디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 제작자였으므로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세련된 포스터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셀즈닉은 화면에 나오지도 않는 배우의 속옷까지 최상급을 고집하여 제작비를 낭비하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런 그의 손길이 포스터의 완성도까지도 높였음이 분명하다.

포스터는 레트 버틀러 역을 맡은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이 스칼렛 오하라 역의 비비안 리(Vivien Leigh)를 들어서 키스하려는 장면이다. 두 주인공의 의상을 보면, 한밤중에 술 취한 레트가 점점 마음이 멀어져 가는 아내인 스칼렛을 강제로 안아서 계단을 올라가 2층 침실로 가려는 장면에서 발췌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키스는 하지 않고 단지 여자를 번쩍 들어 올려서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만 보여준다. 이들이 침실에서 무슨 일을 할지 암시할 뿐이다. 당시는 검열이 삼엄했던 1930년대가 아니던가.

그러나 포스터에서는 이 상황을 좀 더 자극적으로 묘사했다. 당시 할리우드의 모든 포스터는 영화 장면보다 훨씬 강력한 섹슈얼리티로 무장하여 관객을 유혹했다. 실제 영화에서는 나오지도 않은 외설적인 장면을 표현하는 일도 흔했다. 또 잠깐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장면이라도 좀 자극적이다 싶으면 포스터에 크게 강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포스터는 영화 주제의 압축이나 상징 따위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저 대중의 시선을 포스터에 정지시키는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여배우의 의상이나 신체도 선정적으로 왜곡하기 일쑤였다. 이 포스터에서도 비비안 리의 가슴은 실제보다 훨씬 더 풍만하게 묘사되었다. 단추가 풀려 속살이 보이는 클라크 게이블의 모습도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사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이나 영화 모두 대중의 통속성에 호소하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포스터 역시 여기에 소개한 다른 포스터에 비해 디자인적 혁신성이나 아이디어가 뛰어나지는 않다. 세련되게 잘 디자인되었지만 평범하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이 포스터는 감수성 예민한 중고등학생 시절 설레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화려하게 제작된 연애 영화를 보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비비안 리, 느끼하지만 남자다움의 전형을 보여준 클라크 게이블, 그들의 빼어난 외모와 화려한 의상, 흥겨운 파티와 아름다운 남부의 저택들은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 포스터는 우리가 전혀 겪지 못했던 미국 남부의 럭셔리하고 드라마틱한 삶에 대한 어린 시절의 막연한 동경을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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