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5일 월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보나벤투라 성인은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바뇨레지오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의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의 권위 있는 저서도 많이 남겼다. 1274년 무렵 선종한 그를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존경받고 있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묵상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10,42).
오늘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새기고자 『성경』에서 칼이 뜻하는 의미를 살펴봅시다.첫 번째로 아브라함의 칼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 때문에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칼을 들어 찌르려고 하였습니다. 이때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사랑하는 이를 포기하는 하나의 ‘결단’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로 할례의 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구분하려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칼로 할례를 합니다. 곧 깨끗하지 못한 것을 잘라 내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겠다는 다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칼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하느님의 참백성이 되려는 하나의 ‘결단’입니다.
세 번째로 성모님의 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시메온은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게’ 된다고 예언합니다(루카 2,35 참조). 곧 예수님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을 견뎌 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칼의 의미를 아우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칼이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습니다”(묵시 1,16).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요컨대, 『성경』에서 칼이란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하나의 결단이며, 그 결단의 원인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려고 오셨으니, 결단력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연이나 학연, 더 나아가 혈연보다도 우선시하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