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기사로서의 명성을 추구했던 사람, 두둑한 지갑 덕에 동네 청년들 사이에서 ‘대장’으로 통했던 사람, 그러나 마침내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거지가 되어 맨발과 가난을 실천한 사람, 바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가난하고 병든 이, 고통 받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심지어는 무생물마저 형제 자매로 여겼던 그는,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단순하지만 열정적 사랑을 간직한 채 가장 낮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 때문에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가리켜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렀으며, 오늘날까지도 시대와 종파, 사상을 초월하여 가장 사랑받는 성인으로 꼽힌다.
최근 분도출판사에서 출판된 <프란치스코 저는>은, 예수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기도와 노동의 수도생활 안에서 배어나온 체험과 영성을 글로 엮어오던 카를로 까렛도(1910~88) 수사가 이러한 성인의 삶을 일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작품으로, 춘천교구장이신 장 익 주교님이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자신의 삶을 독자들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는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는 8세기 전 아시시에서 태어났어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마치 어린이들과 대화를 나누듯 성인의 생애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이 기법은 마치 독자가 직접 성인과 대면하며 그분의 깊은 속내까지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카를로 까렛도 수사는 철저한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 이 책을 12장으로 나눠 구성했으나, 그는 여기서 단순히 8백여 년 전에 살았던 성인의 삶을 전해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형제들에게는 온유하라고, 다투지 말라고, 시비를 따지지 말라고 당부하며 말과 표양으로 평화를 실천하고, 스스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아간 성인의 목소리를 통해, 이제는 우리가 ‘사랑을 심는 전령’이 되어야 함을, 그리고 이기주의로 갈라지고 메마른 이 세상에게 ‘모두가 한 형제 자매가 되어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함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장익 주교는 역자 후기를 통해 "프란치스코 같은 참 성인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 모두의 영혼을 늘 적시고 되살리는 그 생명수가 마를 줄을 모른다"면서 일독을 권하고 있다.
예레미야에서 너무 어려워 그만 막혀버리고 나서 영적인 독서를 못했었기에 그토록 굶주린 기분이었는가 봐. 엊그제 다시 예전에 사놓고 너무 다 아는 것같은 이야기라서 밀쳐두었던 <프란치스꼬 저는>이란 책을 잡아서 어제까지 다 읽었는데 마지막에 얼마나 감동이 큰지 가슴이 벅차오르더라구.
이탈리아에서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오래 하다가 '예수의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회에 들어가 사하라 사막에서 10여년간 은수자 생활을 하고 돌아온 까를로 까렛도라는 분이 쓴 프란치스꼬 전기인데 문장이 얼마나 쉽고 재미있는지 금방 읽히면서도 핵심적인 것이 분명히 드러나서 정말 좋더라.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은 내 소망이 프란치스꼬 성인과 일치하기 때문에 나를 재속 프란치스꼬회에 불러주신 것도 하느님 은총이라 생각하지만, 또 한편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가난하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두려움도 없진 않았었거든.
그런데 그 성인의 입을 빌어 주님이 하신 말씀 "자네들 일생의 저녁기도 때가 되면 사랑에 대해 심판을 받지 가난에 대해 심판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사랑은 바로 하느님 자신인데 가난은 단지 겉옷일뿐이라네."라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그리고 글라라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평생동안 이끌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하느님 은총이 얼마나 감격적인지. 그들의 사랑이 서로의 수도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이제 우리 헤어져야만 하겠다고 다시 만나지 말자고 선언하는 프란치스꼬의 말에 그러자고 동의하면서도 그래도 다시 만나고 싶어 그럼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간절히 묻는 글라라에게 프란치스꼬가 장미꽃이 필 무렵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니?
그때가 한겨울이었는데, 언덕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는데 갑자기 온 들판에 장미가 솟아나는 장면은 그들의 걱정이 너무나 쓸데없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메세지이자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여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만날 수 있어서 어떤 멋진 영화보다 더 감격적인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어.
그리고 엄마가 제일 신나는 것은 프란치스꼬 성인이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다는 열망으로 손과 발에 오상을 받으셨을 때 깨달은 하늘나라의 신비가 바로 엄마가 깨달은 하늘나라의 신비와 너무나 일치하는거야.
삶과 죽음은 동일한 것의 양면이라는 것, 아픔과 기쁨,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이 현실은 하나의 문에 의해 반반으로 나뉜 것만 같이 하늘나라와 반반씩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 이쪽으로는 땅과 보이는 것과 시간과 공간이 있고 저쪽으로는 하늘과 안보이는 것과 영원과 무한과 피안이 있다는 것, 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동시에 이쪽과 저쪽을 사랑으로 다스리시는데 그 사랑이 이쪽에서는 십자가에 달려있고 저쪽에서는 영광에 싸여있다는 것, 이쪽에서의 고통은 저쪽에서의 희망과 영광이라는 것.
이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성경도 읽어지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거잖니? 예수님이 알려주시고자 한 이 하늘나라의 신비는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구원해 주시고자 함인데 그걸 제대로 못 깨달은 사람은 성경조차도 자기 맘대로 해석해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남들을 다 행복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게 현실이잖아.
그이가 평생 주님의 뜻대로 가난하게 살며 터득한 진리를 아빠는 너의 죽음으로 별로 아프지도 않고 깨달았다는 것이 감사해서 책을 덮고 오래오래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하여 엄마에게 사랑을 가르쳐주는 너를 생각했단다. 내 곁에서 아니 내안에서 숨쉬고 말하고 행복하게 웃는 너의 모습을, 아니 하느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