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북방선교 이야기/해외선교(중국)

[스크랩] 중국 당산 한단 선교 후기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2. 2. 25. 15:14

2010 1 15~22() 중국 당산, 한단교구 선교 보고서

 

오전 10 50분 출발 11 55분 천진 도착

우리 일행 8명은 김 박사님의 부재를 내심 걱정하며 공항에 도착, 마중 나오신 염 요셉신부님의 안내로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당산에 도착하여 먼저 호텔에 짐을 풀고 오후 6시 류주교님이 계시는 당산 주교좌 성당에 가서 류주교님을 뵙고 내일 성령학습 할 2층 사제회의실을 둘러본 다음 저녁식사 후 9시경 호텔로 돌아와 내일을 위한 휴식을 하였다.

참 좋으신 주님, 우리의 리더이신 박사님의 카리스마가 없는 그 공백을 서로서로 협동하여 메우고, 이곳의 신자들에게 주님을 전하고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중국어도 전혀 모르고 박사님도 안 계시고 서로 모르는 사람들의 집단이 이곳에 와서 주님의 영광 드러내고 선을 이루고 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성령께서 모든 것을 진행해 가시옵소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데 통역을 맡으신 조선족이신 염 신부님의 입을 통해서 우리가 하려고 했던 말보다도 더 합당하게 주님의 말씀이 그네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이곳에 온 우리 모두를 좋으신 주님께 봉헌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떼쓰는 봉헌기도를 마친 후 편안하게 잠을 잤다.

 

16일 오전 10시 당산 주교좌 성당의 성령 학습이 시작되었다.

2층 사제회의실엔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백승애 베로니카의 찬미와 김종두 스테파노님의 소개 강의로 성황리에 오전 강의를 시작하였다.

베로니카씨의 기쁜 찬미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어 모두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듯 하였고 우리들은 베로니카씨의 인도로 졸지에 노래 선교단이 되어 함께 성가를 불렀다.

찬미 예수님,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부자가부자가 못 가는 나라, 율동과 함께 부르는 성가는 처음엔 쑥스러웠지만 나중엔 우리도 무척 신이 났다.

율동을 맡겠다 자신 있게 자청하던 라파엘라씨는 성령기도회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는 용감한 율동 지원자, 우리는 많이 웃었으나 참으로 예비해 주시는 하느님의 인도로 20여 년 성령기도회 참석의 경험을 가진 김인선 소화 데레사님의 이쁜 몸짓에 따라 열심히 율동도 따라 하고 서로 쳐다보고 웃어가며 찬미하였다.

우리는 모두 한 형제 자매, 모두의 얼굴이 환히 빛나고 기쁨이 넘치고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사제식당에서 수녀님이 준비해주신 소박한 식사로 점심을 먹고, 호텔로 가서 조금 쉬고 오기로 했는데 우리를 태워주는 자동차가 작은 접촉사고를 내는 바람에 230분에 시작하려던 강의가 3시가 조금 넘어 강의실에 도착해보니 세상에나..강의실이 사람들로 꽉 차서 앉을 자리도 없고 우리도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오전에 참석인원이 58명이었는데 오후에 보니 거의 두 배나 되는 사람들로 꽉 차서 앞을 주시하는 눈동자들이 반짝반짝 거리고 앞줄에 앉은 몇몇 열심한 자매님들은 하나라도 빠질세라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었다. 당산 주교좌 성당의 지도자급 자매님들 이신듯 듬직하고 열성적이었다.

오후에 김 민규 바오로 형제님의 죽음에서 구해주신 깊은 신앙 체험과 강의는 참으로 인산적이었다. 22600볼트의 고압전기에 감전되어 의사들도 모두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환자를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 드러내시려고 어찌 살려 주시고 어찌 들어 쓰시는지를 잘 증거해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치유능력으로 본인을 치료하고 다른 이들에게 치유의 은사를 베풀어 주는 그 모습에 진한 감동을 받았나 보다.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형제자매님들이 치유를 받았다고 전해왔다.

그 뒤에 내가 신앙체험 발표를 하려 하니, 난 정말로 할말이 없어졌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모든 것들이 감사하고 하루하루를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살고 주변에 잔잔하게 그 기쁨을 전하자는 말 밖에는죽음에서 구해내신 형제님의 할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저 평범하고 소극적인 신심에 마음이 얼고 입이 얼어 붙는듯하였다.

내 할 말은 그저 항상 감사하고 주님 안에 행복하다는 것, 그것으로는 일선에서의 선교란 무리인 듯싶었다. 그저 뒤에서 조용히 지원해주는 것 외에는……

시종일관 이사람 저 사람 하는 말을 모두 통역하느라 염 요셉신부님의 목이 아프고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우리 일행 7명의 입이 되어야 했고 중국 신자들의 대변인이 되어 우리들에게 전달해야 했으니 그 고충이 오죽했을까.

중국 신자들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성적이었으며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이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를 흡수하려고 지켜보고 있는듯하였다.

지난 여름 김 박사님과 스테파노님, 베로니카님이 먼저 와 토대를 잘 닦아놓은 결실인 듯 우린 비교적 성황리에 강의를 마칠 수 있었다.

아침 저녁 차량봉사를 해 주시는 분들도 어찌나 성실하고 열성적이고 수고가 많으신지 정말 예비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 분들께 감사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후엔 출타하셨던 방 주교님이 돌아오셔서 만나 인사하고 김 박사님이 써주신 친서를 전달하고 성당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17일 일요일 아침, 방 주교님의 미사 집전으로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그 큰 성당에 사람들로 가득 차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는데 난방이 되지 않아 우린 춥고 떨리고 발이 꽁꽁 어는듯 했으나 중국신자들은 아주 씩씩하게 성가도 크게 부르고 추운 기색이 없었다.

제단에 서신 주교님 일행도 추워하는 기색이 없고 온몸을 꽁꽁 싸맨 신자들도 잘 적응이 되어있는 듯 의연하였다. 아주 추운 날씨도 아니건만 우리 일행만 추위에 잘 대처하지 못하고 얼어있었다. 그런 중에도 베로니카의 미사 끝 묵상 특송은 충분히 감명을 주었다. 중국말로 또 한국말로 여러 사람들에게 성령이 우리 모두에게 임해 있음을 전하였다

미사 후 강의실에 가보니 세상에나 오늘은 남녀노소 어제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로 꽈 차서 출입문을 닫지도 못하고 다 앉지도 못하고 많은 신자들이 서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먼저 베로니카의 찬미, 그리고 손 용익 그레고리오 형제님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조리있는 강의, 김 인선 소화 데레사님의 육체적 고통인 질병을 치유해 주신 신앙체험과 정 신화 라파엘라 자매님의 양쪽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에 대한 간단한 신앙 체험은 여러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감동을 주었다.

또한 신학원 동기 학우이신 고 은상 로베르또 형제님의 재밌는 강의로 중국 신자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국적을 초월해서 하나되어 모든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본당 앞에 모여 기념 촬영을 하고 다시 내년을 기약하고 서로가 헤어지기 못내 서운해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리는 한단교구로 향하였다.

이동시간은 버스로 8시간 남짓, 버스엔 사람들로 가득하고 어찌나 짐들은 많은지……

난 옆에 앉은 바오로님 덕분에 그 긴 시간을 지루한 줄 모르고 바오로님의 새로운 이야기, 신앙체험을 들으며 갔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입구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마중 나온 주 신부님과 또 다른 신자 분의 차를 타고 한단교구로 향하였다.

한단교구는 인구 700만에 15만 신자가 있는 대교구로 사제는 67명이 있다고 한다.

그 안에 우리가 방문 할 영현교구도 70만 인구에 신자는 3만이라고 한다.

저녁에 도착하여 우리는 주 신부님이 배려로 친구가 잡아 주었다는 중국 공무원들의 영빈관, 즉 중국 공무원들이 이용한다는 호텔 같은 곳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이곳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인인걸 알면 안되기 때문에 우린 남들이 듣는 데서는 한국말을 쓰지 못하고 조용히 침묵해야 했다.

주 신부님은 참으로 조용하고 인품이 넉넉하고 클래식을 즐겨 듣는 참 사제상을 하고 계신 젊은 신부님이셨는데 김 박사님을 무지 존경하고 좋아한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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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자국민에게 선교하는 것은 아직은 불법이고 이곳은 우리가 처음 오는 곳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서 아침 일찍부터 모든 일정을 주 신부님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주 신부님이 이끄는 대로 본당신부로 정 신부님이 계시는 광평 마을, 구세주성당이라 이름 붙어있는 큰 성당에 들렀다. 그 곳에서 우리는 마침 혼인교리를 들으러 온 젊은 미래의 부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찌나 아름답던지..

노래도 불러주고 축하한다 말해주고 나왔다.

나이가 좀 들고 보니 젊은 이들이나 어린이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이곳은 대명 주교좌 성당으로 1918년 완공을 한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그리고 그 앞쪽에 있는 소 신학교에 들렀는데 정말 뜻하지 않은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1988년에 세워진 소 신학교로 현재 88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으며 배출신부 수는 80여명, 매 해 대신학교에 진학하는 숫자는 약 30여명이라고 한다.

각 처에서 교사를 초빙해 15명의 교사가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신앙이 없는 분도 있고 4분이 수녀님 5분이 신부님이라고 했다.

학교 설립 취지, 목표는 먼저 문화를 배우고 공부를 시킨 후 성소가 있다고 판명되면 대신학교로 보낸다고 하였으며 대신학교로 매년 2~30명 정도 보낸다고 하셨다.

자그마한 키, 아주 똘똘해 보이는 외모의 호 점민 요셉 원장 신부님, 얼마나 다부지게 아이들을 잘 통솔하시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은인들의 희생으로 학생들을 교육시키며 매년 6월 예수 성심성월엔 은인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달로 기도하며 교구의 성소를 위해 물심 양면으로 부탁한다고 하셨다.

1년에 드는 학비가 3000인데 부유한 가정에서는 1500원정도 가져오나 그냥 오는 학생이 더 많아 후원이 필요하다 하였다.

성당에서 학생들을 모아 놓고 기도와 찬미를 하였는데 중국 소신학교 학생들의 교가도 듣고 성가도 우리를 위해 불러주고, 순수하고 천진해 보이는 눈망울들이 참 보기 좋았다.

점심 식사를 소 신학교 식당에서 학생들과 같은 메뉴로 먹었는데 빵 한 개와 배추 된장국 한 그릇,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어린 학생들과 힘 자라는 대로 지원을 약속하고 단체기념사진을 찍은 후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병원에 계시는 88세의 한단교구 주교님, 양 샹하이 주교님을 뵈러 갔다.

깨끗하고 인자하신 모습의 주교님이셨고 어찌나 정정하신지 가져간 김 박사님의 친서를 안경도 쓰지 않고 읽어 내려 가셨다.

주교님께서는 인사말로, “한국서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한국 교회, 나라는 작지만 교회는 너무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 중국 교회는 정부의 관할에 있어 아직 진정한 종교의 자유는 없지만 이곳은 전 중국에서 비교적 좋은 교구에 속합니다. 남방에 비해 가톨릭이 강하고 각 교구마다 정황이 다르지만 교회에서 학교를 차리려면 정부에서 막고 있으며 유치원만 가능하며, 이곳 병원은 한단교구 교회병원인데 큰 병원에 속한다고 하셨다.  전 교구 전체를 대표해서 여러분에게 감사하며 4년 전(2007) 중국 공산당 후계자를 배양하는 학교에서 당원들도 종교에 입회할 수 있다는 결정이 나고 지금은 공산당원도 신앙을 가지자고 천주교회 입회를 허가한다는 문건이 내려와 있으나 아직 발표를 안 했다고 하셨다”. 양샹하이 주교님이 계시는 이 대명의원의 원장님은 장 신부님이시며 전 중국 교회병원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셨다. 박사님의 친서와 함께 홍삼 차와 금일봉을 전달해 드렸는데 참 좋아하셨다.

 

그 다음 또 한참 차를 타고 이동하여 왕 신부님이 본당 주임으로 계시는 예수 성심성당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엔 성당 마당에 초대 신부(손문원)의 동상이 서 있었고 그곳에서 교구의 신부님들 중의 대표이신, 3월에 주교로 발령이 나신다는 손 신부님도 만났다.

다음은 손 신부님의 말씀입니다.

본당 사제로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구속 스럽게 하지 마시고 자유스럽게 얘기 합시다. 이곳은 이 지역의 중심, 사제 휴식장소 입니다.

관할구역에 신자 수는 3만 명 정도이고 신자분포는 200여 개 공소에 고루 있습니다. 그 신자들을 7명의 사제가 관리하며 교구에서 이 지역에 관심이 있어 다른 지역보다 신부 수가 많습니다. 이곳은 영연교구 입니다. 이 본당은 초대 손 신부님부터 교구 특별 중시 본당이고, 우리는 신자가 양이 아니고 질적 성장을 꾀하고, 본당 관리와 수준 향상에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1978년부터 정부의 허락으로 선교를 시작하여, 선교사, 선생, 각 회장들이 탄생하였으며, 그 때는 신부가 1인이어서 그때부터 신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신부는 미사 중심으로 일합니다. 처음부터 신자들의 신심을 뿌리깊게 양성하여 이 지역에 장사가 많고, 전 중국의 열심한 신자들은 여기서 교육받고 나간 신자가 많고 이 지역을 떠난 신자들이 타향에서 봉사도 많이 하고 각지의 회장 직분도 많이 맡고 있으며, 이 본당은 올 해의 사목활동 계획을 신부가 짜면 총 회장, 각 지역회장 등으로 점차 진행되어 일을 분담하고 신부가 필요하다면 각 지역의 회장들이 시간을 희생하여 교회발전에 기여한다고 하셨다.

특히나 자랑스러운 것은 성경공부를 통해 신앙을 다지고 주님 사랑을 마음에 담는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이라 하셨으며 선교사도 많이 배출했다고 하셨다.

초대 손 신부님의 많은 수고 덕분에 이 본당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으며 지금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 진로 방향을 연구하고 구상 중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은 사랑 이십니다 라는 선교 대회도 열은 주 신부님이 계신 성당의 선교사 팀도 2년여 동안에 80여 번의 선교 활동으로 지역주민들에게 환영 받고 신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셨고, 교구의 수녀님 몇 분이 현재 한국에서 공부 중이고 이곳에 오신 여러 한국의 선교사들도 아낌없이 배움을 주고 갔으면 좋겠다고도 하셨다.

중국 천주교회는 개신교회와 서로 협조하고, 서로 그리스도인이라 호칭한다

이 지역만 1년에 500명 정도 영세를 받으며 발전하고 있다고도 하셨다.

 

다시 꼬불꼬불한 길을 마구 달려 주 신부님이 주임으로 계시는 성모성당으로 갔다. 미사가 7시라 했는데 신부님이 우리와 함께 늦게 가는 바람에 7 30분에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깜깜한 한 저녁에 남녀노소 함께 성당에 모여 있었다.

초대교회의 모습처럼 앞줄엔 어린 아이들이 주욱 앉아 있었는데 두꺼운 잠바들을 입고 조로록 모여 앉아 있는 모습들이 참 귀여웠다.

주신부님과 염신부님이 함께 집전하는 미사를 올리고 베로니카의 찬미와 스테파노 형제님의 인사말, 바오로 형제님의 신앙체험 이야기등, 우린 너무 추워서 가만히 앉아 있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어린 아이들과 신자들이 얼마나 환영하고 좋아하는지….

주 신부님 본당의 젊은이들의 노래와 춤도 멋있었다. 그 중국의 시골 본당에서도 젊은 남녀가 그리 노래도 잘하고 춤도 당당하게 멋지게 잘도 추었다.

주 신부님께서는 신자들 모으기가 쉽지 않으니 우리 모두가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하길 바라셨으나 우린 너무 춥고 밤이 깊어 어서 호텔로 가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다.

난 참 이 정도 갖고 내가 무슨 선교를 다닌다고 하나 하는 회의심이 자꾸 들었다. 추운 것도 잘 못 참고 불편한 것도 잘 못 참고 참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녀보니 중국 성당은 규모도 크고 전혀 난방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그 넓은 성당 안을 어찌 다 난방을 할꼬?… 아마 한국 같았으면 미사 참석 아무도 안 올 것 같았다. 그래도 그네들은 두꺼운 옷으로 무장을 하고 찬송도 크게 잘하고 춥다고 불평한마디 하지 않고 미사 참례를 잘하고 있었다.

암튼 아쉬워하시는 주 신부님과 신자들에겐 미안했지만 그 정도로 하고 끝맺기로 하였는데 밤늦게 우리를 호텔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오실 주 신부님을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정말이지 주 신부님은 말은 잘 안 통해도 사제로서 참으로 존경 받으실 만한 분인 것으로 느껴졌다.

호텔로 돌아와 내일 한단 교구에서의 마지막 날은 주 신부님이 이끄는 대로 하기로 하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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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또 다시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우린 주 신부님의 고향, 즉 주씨 집성촌으로 향했다. 거기에선 주 신부님 고모의 아들 즉 사촌 동생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는데 너무나 어린(22, 23) 신랑신부의 결혼식이었다..

곱게 치장한 신랑과 신부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문 앞에 나와 인사를 하고 우린 축하 노래도 불러 주고 잔칫집의 분위기에 끌려 잔칫상도 받고 술 잔도 받고 식사도 하고, 주 신부님의 큰 아버지, 할머니, 형님, 형수, 언니, 동생 조카 등을 모두 만나 보았다.

좀 떨어진 곳에 사시는 손주가 아파 잔치에 못 오시고 집에 계신 신부님의 어머니를 찾아 뵙고 인사도 드리고 그 곳에 있는 공소에 들러 기도하고 공소회장님께 금일봉과 묵주도 전달하고 이곳 저곳을 많이 다니며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모두 다 인심들이 좋고 순박하고 우리 일행을 스스럼없이 환영해 주었다. 다음 여름쯤에 계획을 세워 선교를 나설 기틀은 마련되는 듯싶었다.

종일 이곳 저곳을 차를 타고 다니며 돌아보고 호텔로 오는데 참 신비로웠다.

하느님께서는 어찌하여 주 신부님을 통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중국의 시골을 구석구석 을 우리로 하여금 돌아보게 하시고, 한마디 불평 없이 우리를 이끌고 차를 태워 주고 봉사해 주시는 신자 분들 하며 가는 곳마다 우리를 필요로 하고 환영하는 중국 사람들……정말 그 모든 게 신비 그 자체였다.

예비하시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우리가 계획하지도 못하는 것까지 채워 주시고 보태 주시는 분, 우린 당신 영광 위해 당신 태우고 다니는 당나귀들, 그 당나귀의 직분을 다 할 수 있게 해 주소서. 백 베로니카씨는 우린 당나귀 라는 말을 자꾸 하였다.

김인선 소화 데레사씨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 입니다라는 노래를 계속 하고 다니셨다.

참으로 오묘한 신비.

누구든 중국 선교를 온다고 말을 해도 이렇게 오기란 정말 어려운 것, 중국엘 자주 다니는 아들도 엄마, 중국은 자국민에게 선교는 불법이에요, 조심하세요.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선교의 명목으로 중국본토를 맘대로 다닐 수 있다는 것도 알고 보면 모두 김 박사님의 17년 동안의 희생과 노고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처음 온 사람들은 전혀 짐작도 못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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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한단 역에서 2층 기차를 타고 북경 역으로 향하였다. 우리 좌석은 2층에 있었는데 처음 타보는 2층 기차는 어찌나 깨끗하고 멋지던지…..

12 50분 북경 서역에 도착해 보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북경만도 한국전체의 17배나 된다니 그럴 수밖에….

택시는 거의 모두가 현대차이며 노란색인데 이건 손님을 황제처럼 모신다는 뜻이란다.

가이드가 나와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자금성과 천안문광장을 둘러보고 호텔로 향하였다.

에구머니 나….호텔이 얼마나 좋은지, 방도 여러 개고 더블 침대도 둘이나 각각의 방에 놓여 있었고 욕조가 있는 욕실이 있고 체력 단련 실, 업무용 책상과 스탠드까지…..

마지막 날 잠깐 잘건 데 아깝다 아까워 를 연발하며 샤워를 하고, 우리 방에 전부 모였는데, 이날 밤 드디어 김 박사님의 부재로 약간의 삐걱거림이 보였지만 모두 함께 기도로 풀고 내일 마지막 날을 위해 단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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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기상하여 7 30분 호텔 출발 하기로 하였으나 남자분들이 전날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조금 지체가 되어 만리장성관광을 나섰다. 그런데 하필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000가 운행을 하지 않는 바람에 학생들 수학여행 코스인 쪽으로 올라가 만리장성을 눈으로 조금만 보고 시내를 관광한 다음 비행장으로 향하였다.

중국엔 은행이 화장실 다음으로 많다더니 정말 곳곳에 은행이 무척 많았다.

조선족 총각 가이드 Mr. 고 말이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 달에 300원을 벌면 그걸 거의 다 쓰는데 중국인들은 그걸 다 은행에 저금하기 때문에 은행이 그렇게 많단다.

그리고 중국의 부자들은 돈이 그렇게 많다고 한다.

차림으로 보면 허름해 보이는 사람도 속으로는 굉장히 부자가 많으니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되고 그 많은 인구의 저력과 빨리빨리 발전하는 중국, 그냥 지나치면 안될 것 같았다. 우리나라와 경제 차이는 올림픽이 열린 차이만큼 즉 1988년과 2008년 즉 20년 정도라고 한단다. 우리도 자원이 적고 가진 게 적으니 인재를 잘 키워서 세계 속에서 한 몫을 하고 살아 남아야 할 것 같다.

볼수록 규모가 어마어마한 중국,

선교로 쳐도 그 넓고 넓은 나라 중국.

이전엔 우리가 중국을 통해 신부님을 들이고 전교를 받았지만 이제 우리의 풍성한 신앙을 전수 해 주어야 할 때, 참으로 막중한 사명감이 느껴졌다.

 

이 번 선교 여행을 통해서 시종일관 함께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같이 간 김 종두 스테파노, 손 용익 그레고리오, 김 민규 바오로, 고 은상 로베르또, 백 승애 베로니카, 김 인선 소화 데레사, 정 신화 라파엘라님 모두에게 감사 드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며 우리의 입이 되어 주신 염 요셉 신부님께 도 감사하고, 특별히 전 기간동안 우리들을 자동차로 여기저기 인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몸이 편치 않으셔서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아침 저녁 안부를 물어 주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로 지원해 주신 김 현욱 돈보스꼬 박사님께도 감사 드리며 빠른 쾌유를 빕니다.

-서 정숙 루치아 -

출처 : 또 하나의 문
글쓴이 : evergree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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