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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몸의 신학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1. 1. 22. 13:05

몸의 신학

(THEOLOGY OF THE BODY)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회칙 <인간생명>

(POPE JOHN PAUL Ⅱ AND HUMANAE VITAE)

 

자넷 스미츠 박사

   

 

소   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회칙 <인간생명> (Humanae Vitae) 의 가르침을 강화하기 위해 충만한 "몸의 신학" (theology of the body) 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견해가 회칙 <인간생명>의 내용에 유의한 영향을 미쳤었겠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이러한 신학이 회칙 <인간생명>에 그렇게도 잘 부합하고 있다는 사실은 덜 놀라운 사실이 될 것입니다.  성하는 출산 조절에 관하여 교황 바오로 6세를 자문하는 특별 위원회의 일원이셨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모임에도 출석하지는 않으셨으나 주요 보고서에 대한 답변을 작성하는데 공헌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현대 세계 안에서의 교회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Gaudium et Spes) 의 작성에도 역시 영향을 주셨습니다.  그 안에 조성한 결혼에 관한 견해들은 회칙 <인간생명>에서 반향 되었습니다.  끝으로 교황 바오로 6세께서 회칙 <인간생명>을 쓰고 계셨을 당시 <사랑과 책임> (Love and Responsibility) 을 읽고 계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결혼의 선(善)을 범하는 것으로서의 피임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본 논문은 <자연가족계획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 of Natural Family Planning) 10, no. 2(1986년 여름호) ; 95-112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인간의 성(性)에 대한 가르침을 당신의 교황 재위의 주요한 부분으로 삼아 오셨습니다.  전세계 각국 순방마다 거의 매번 성하께서는 주의를 기울이셔서 인공적 출산조절 수단에 대한 교회의 반대를 재천명해 오셨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저작들을 읽어보신 많은 분들은 성하의 글들이 읽기 어려우며 오히려 불명료한 스타일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언급은 성하의 몇몇 저작들에 해당할 수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하의 글들이 도전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명료하며 [상황을] 밝히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는 사람들 축에 듭니다.  성하의 저작 특별히 가정 생명과 성에 관한 성하의 글들에 친숙해져 있는 제가 아는 사람들도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한 견해들은 흥분케 합니다.

 

  어떤 이들은 교황 성하의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흥분된다" (excited) 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자, 저는 노트르 담 대학 출신이니까 제가 그러한 저의 논점을 밝히는데 풋볼을 예로써 사용하는데 놀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노트르 담에서의 흥분을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노트르 담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몇 분 남기고 있는 승리 필드 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의미하고 있는 방향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성(聖) 토마스의 저작(著作)들에서 발견하는 흥분에 더욱 유사한 것입니다.  더욱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풋볼보다도 그곳에서 흥분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제가 의미하고 있는 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성 토마스와 교황은 모두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와 그 인간의 본질에 대해 심원하게 통찰하고 계셨습니다.  그분들께서 포착하고 계셨던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입니다.  토마스의 방법은 성인께서 사셨던 시대에 적절했고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당신께서 보고 계신 진리를 우리 시대에 전달하는데 있어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방식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황 성하의 견해가 흥분케 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는 사람들은, 노트르 담 축구 경기 시즌 티켓보다도 교황 성하의 회칙을 갖는 것이 더 흥미진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저와 같은 비밀스럽고도 비일상적인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젊은이들, 심지어 노트르 담 학생들조차도 진정으로 교황의 견해와 논의를 소개받고는 그것이 극도로 자극적이며 명징스러움을 발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흐뭇해 하실 것입니다.  성하는 당신의 저작들이 현대 세대에 제시하고 있는 도전과 철학적 강직함만으로도 그 견해를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사상가이십니다.

 

  실제로 저는 말하기 주저되는 이야기를 언급하려 합니다.  그 이야기는 의심의 여지 없이 제가 바티칸에 있는 쿼터백을 응원하는 들뜬 치어리더처럼 들리도록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황의 책 사랑과 책임이 서구 세계의 명작의 어떠한 목록에도 자리매김되어 마땅하다고 믿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제가 노트르 담 대학에서 명작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있음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조건이 명작을 자격짓는가를 결정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들였습니다.  호머의 오딧세이와 일리아드, 아우구스띠누스의 고백록과 단테의 신곡과 같은 저작들을 그러한 목록에 포함시키는 데에는 아무런 이견도 없을 것입니다.  그 도서들은 저술된 이래로 모든 세대의 관심을 견지해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 저작들이 모든 인간을 고뇌케 하는 중대한 의문들, 즉 우리 주위의 세계와 그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질문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지속적인 호소력을 갖고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황 성하의 저작이 그러한 그룹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앞으로 올 세대들은 분명히 성하의 책을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세대들은 분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성하의 저작이 우리 모두가 삶에 대하여 갖고 있는 의문들을 담대하게 대면하면서 인간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 ― 만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가 살아나가고 있는 삶의 길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을 ― 을 제시해주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랑과 책임은 인간의 성(性)에 관한 교황 성하의 주요 저작들 중 첫 번째 작품입니다.  폴 존손(Paul Johnson)은 교황 바오로 6세께서 회칙 <인간생명>을 쓰시면서 현 교황의 저작을 읽고 계셨고 그에 대단히 영향을 받았다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세련된 전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황에 취임한 이후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정력적으로 대중 앞에 인간의 성에 관한 진실을 제시하려 노력해 오셨습니다.  성하께서는 인간의 성에 관해서 세 가지 시리즈의 글을 쓰셨습니다.  첫 번째 시리즈는 창세기에서 열쇠가 되는 몇 가지 문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성 바오로 딸에서 <남성과 여성의 근원적 일치성> (Original Unity of Man and Woman) 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리즈는 마태오 복음에서 열쇠가 되는 문장들에 관한 묵상이었으며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복되다> (Blessed Are the Pure of Heart) 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성하께서는 최근에 세 번째 시리즈를 내셨는데 <회칙 <인간생명>에 대한 묵상> (Reflection on Humanae Vitae) 이라는 제하에 출판되었습니다.  본 에세이는 세 항목의 구성으로써 성하의 그 모든 저작들에 접근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황 성하의 방법이 생소한 것임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 저는 교황 성하의 말씀 중에 혁신적인 방식을 설명함으로써 성하의 접근법을 더욱 근접하기 쉽도록 조성하려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현상학적" (phenomenological) 이라든지 "인격주의적" (personalistic) 과 같은 단어들 ― 교황 성하의 철학을 기술하는데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 ― 의 거리감을 감소시키려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이러한 방법과 접근법이 우리 시대에 매우 적절한지를 제시하려 노력할 것입니다.

 

  본 논고의 두 번째 부분에서 저는 성에 관한 교황 성하의 가르침의 주요 문장들을 조명할 것입니다.  성하의 용어들 중 일부는 비일상적이며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사용하고 계신 가장 흥미있는 어구는 바로 "몸의 언어" (language of body) 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몸을 "인격의 표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하께서는 "몸의 언어"는 성의 진실한 의미를 표현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몸과 성에 관한 그러한 방식의 언급은 성의 목적을 밝혀주는 견해를 제시해 주며 삶에서 성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의 소중한 지침을 우리에게 제공하십니다.

 

  본 논고의 세 번째 부분은 가족계획의 자연적인 수단이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으나 인공적 피임방법은 그렇지 못한지 그 이유를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어떻게 설명하고 계신지를 지적할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한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자기 지배" (self mastery) 라는 성하의 주장입니다.

 

교황 성하의 접근법

 

  요한 바오로 2세는 매우 현대적인 분이셔서 가톨릭 교의에 대한 성하의 빈틈없는 수호를 잘 이해하고 있는 충실한 많은 가톨릭 신자들조차도 성하께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는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정규적으로는 성하를 "현상학자"라고 기술합니다.  그러나 "현상학"이라는 단어보다 더 생소한 용어가 있을까요?  그리고 "인격주의"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진리의 수호자들 모두가 "스콜라 철학자" (scholastics) 나 "네오-토미스트" 아닐까요?  신뢰할 만한 도덕 철학자들은 모두 자연법 윤리학자 아닐까요?

 

  이제, 어떠한 영역 ― 그리고 그러한 영역이란 제가 종종 짜 만드는 것입니다 ― 에서 본다면 이단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스콜라 철학" (scholastic) 은 모든 진정한 철학에 대한 엄격한 의미에서 동의어는 아닙니다.  스콜라 철학이라는 단어는 물론 성 토마스 철학의 영향 하에 씌여진 저작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저작들은 인식될 수 있습니다.  특정한 방법을 따르고 특정한 단어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물론 그 저작들이 특정한 형이상학과 특정한 세계관에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교황 성하의 저작들을 읽는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은 종종 성 토마스의 학생들입니다.  성하께서는 성 토마스의 방법이나 단어들을 명백하게 사용하고 계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현상학이란 현대적인 철학들 중의 하나로서 그 방법에 있어 [다른 철학들과] 두드러지게 구분됩니다.  현상학은 토미즘이나 여타의 전통의 엄격한 정의들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경험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며 이러한 분석으로써 존재의 기본적 진실들을 밝혀냅니다.

 

  저는 토미즘에도 현상학에도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그 두 학문의 접근법에 대한 지식에서 적어도 교황 성하께서 그 둘을 복합하심으로써 토마스적이고도 가톨릭적이지만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경험으로부터도 발전해 나온 세계관에 완전하게 공명(共鳴)하고 있는 실제에 대한 통찰에 도달할 수 있으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믿습니다.  토미스트와는 달리 교황 성하는 곧 글의 후미에 따라오고 있기는 합니다만 구별과 정의로 시작하시지 않습니다.  성하께서는 우리 모두가 가졌던 인간의 경험들로써 그리고 우리가 즉각적으로 매력적임을 발견하는 가치들에 대한 역설(力說)로써 시작하십니다.  성하의 현상학적 방법의 사용이란 토미즘에 대한 기각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토마스의 철학은 가톨릭에서 수위 자리를 차지한다는 레오 13세의 가르침을 재천명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교황 성하 당신 자신께서도 성 토마스의 글에 전적으로 친숙하십니다.  하지만 성하의 진행 방식에는 토미스트들에게는 다소 낯선 무엇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논점을 명확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법에 대한 토마스의 토론은 그의 도덕 철학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영원한 법, 신법, 자연법, 그리고 인간의 법을 연결시킵니다.  교회의 저작들은 자주 그러한 유형을 따라갑니다.  예를 들어, 회칙 <인간생명>은 하느님에 대하여 창조자로, 그리고 사람의 역할을 하느님에 대한 공동창조자(Co-creator) 로 이야기하고 있는 몇 가지 언급들로 시작합니다.  그 문헌은 인간의 행위가 자연의 법 ― 그리고 그러한 자연법은 하느님의 법입니다 ― 에 어떻게 부합해 나아가야 하는가를 설명해 나갑니다.  성급한 감은 있겠지만 저는 그러한 절차 방법에서는 아무것도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없음 ―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옳음 ― 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도착하는 방법에는 한 가지 이상의 길이 있으며 진리를 발견하고 가르치는 방법에도 한가지 이상의 길이 있습니다. 

 

  현상학자들은 대상과 현실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묘사 ― 미리 정의로써 단정해 버리지 않으며 공통적인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묘사 ― 를 제공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당신의 모든 저작들에서 당신 스스로 인간의 인격(human person) 에 대한 명철한 학생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인간의 성(性)에 대한 성하의 저작들을 흥미진진하고 호소력 있도록 만드는 것은 성하께서 우리 모두가 이미 거쳐왔고 이해할 수 있는 경험들을 이끌어 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하께서는 그러한 경험들을 잘 묘사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설명하시면서 그러한 경험들을 기초로 하여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반추(反推)하도록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성(性)에 관한 당신의 저작들에서 몇 가지 근원적인 인간 경험들에 집중하십니다.  성하께서는 고독(solitude)을 "근원적인"(original) 인간 경험이라고 역설(力說)하십니다.  성하께서는 우리 모두는 자신을 완성시켜 줄 또다른 누구를 동경하고 있음을 관찰해 내십니다.  성하께서는 이성간의 이끌림(attraction between the sexes) 의 강렬함과 반가워함을 매우 잘 기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하께서는 우리가 이성간의 사랑을 선물(gift) 로서 경험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자신이라는 선물을 타인에게 주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은 "우리 몸의 언어"를 통해서 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그러한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들로부터 인간의 성(性)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을 구성해 내십니다.  본 에세이의 두 번째 부분은 그러한 경험들에 관한 성하의 묘사에 대하여 몇 가지로 해설해 드리겠습니다.

 

  교황 성하의 "인격주의"란 인간의 인격을 당신의 윤리 분석의 중심에 자리매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인간의 경험에 대한 묘사를 뛰어 넘어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인간 행위라고 요건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쪽으로 옮겨가실 때는, 자연법의 원칙들을 명시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시작하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교황 성하의 시작점은 이색적입니다.  성하께서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원칙, 즉 한 인간을 어떠한 목적의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는 원칙으로써 시작하십니다.  성하의 궁극적인 관심이란 각각의 행위가 인간의 존엄성이 요구하는 무엇에 조화하는 무엇에 어떻게 부합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성하의 철학은 인격주의적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성하의 철학은 인간의 인격을 주요 논점의 시작과 주요 관심사로써 다루고 계십니다.

 

  우리의 세기는 휘청거릴 정도로 인간 인격의 가치를 무시하여 왔습니다.  나찌와 공산주의의 잔학행위와 낙태라는 대량학살은 우리 시대의 많은 이들이 그러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지는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사고(思考)하는 인간이라면 인간 인격의 본질적인 권리를 결코 대체해서는 안됨을 깨닫기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는 인간의 본질적인 권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가치를 범함으로써 야기되는 결과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교황 성하께서 당신의 시작점으로 사용하고 계시는 가치란 금세기의 경험이 우리에게 매우 소중하게 견지하라고 가르쳐 왔던 가치입니다.  교황성하의 가르침은 공통적인 경험, 특별히 20세기의 경험에 뿌리를 둠으로써 시작하고 있으며 성하의 저작 전체에 파급되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의 인격주의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성은 어떠한 종류의 처우를 부여해야 하며 어떠한 종류의 행위를 의무짓는다는 주장입니다.  즉, 교황 성하께서는 인간은 결코 수단으로 사용당하여서는 안되며 또한 타인을 수단으로 처리해서도 안되며 이는 다른 어떠한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性)의 영역에서도 진실성을 잃지 않음을 가르치십니다.  더 나아가 성하께서는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인격뿐만 아니라 실제의 본질(nature) 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성하께서는 성은 존중받아야 할 의미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곧 우리는 "몸의 언어"라는 성하의 어구가 성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존중과 인간의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의 필요성을 어떻게 엮어내어 반추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몸의 언어

 

  회칙 <인간생명>에 대한 성하의 묵상이 성에 관한 당신의 예전의 가르침들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러한 가르침들을 간략하게나마 스케치해 볼까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스케치일 뿐입니다.  저는 성하의 주장의 깊이와 복잡성에 맞갖게 그려낼 수는 없습니다.  진정으로 저는 작은 논점들 뿐만 아니라 주요한 논점들도 빠뜨릴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몇 가지 근본적인 개념들을 여러분 앞에 내놓고자 합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더 교황 성하께서 인간의 근본적인 존엄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계심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단순히 우리는 결코 소모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성이 항상 존중되도록 요구되는 본질적인 존엄성을 지닌 인간들입니다.  궁극적으로 타인을 충만하게 존중하는 유일한 길은 그 또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의 최선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결코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들을 위해서 소모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교황 성하께서 당신의 모든 가르침들에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공박 논지들의 기반입니다.

 

  또다른 근본적인 관찰은 우리 모두는 자신이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며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타인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한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를 통렬한 인간의 요구를 포착하고 있는 이야기로 읽고 있는 교황 성하의 능숙하면서도 민감한 독서는 그 자체만으로서도 괄목할만한 성취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그의 뼈에서 나온 뼈요 그의 살에서 나온 살"인 상대를 보고 나서의 아담의 환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하께서는 상대 성(性)에 대한 이끌림, 특별히 선물 ― 우리가 자신의 인격성을 완성하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선물 ― 로서 공유하는 이끌림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매우 잘 기술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타인과의 완전하고 충만한 일치를 향한 우리의 열망은 극도로 강력합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원죄 이전의 인간에 기초한 열망과 원죄 이후의 열망 사이의 차이점에 대하여 우리를 밝히 가르치십니다.  성하께서는 타락이전에 이러한 열망은 완전히 우리 원조(元祖)들의 조절안에 있었음을 간파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신의 열망들이 왜곡되어 있고 자신의 성(性)을 타 인격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자주 이러한 열망은 타 인격의 몸에 대한 단순한 색욕(lust)임을 쉽게 인식합니다.  이러한 색욕은 타 인격을 결코 도구로써 소모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 그리고 사랑받아 마땅한 한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도구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마음에 간직하여야 할 적어도 네 가지 개념들을 갖습니다.  (1) 인간의 인격 안에 내재되어 있는 존엄성이란 그 또는 그녀를 결코 도구로 다루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일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그 또는 그녀를 사랑할 것이며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2) 타인과 일치하려는 근본적인 인간적 요구가 있다.  (3) 이러한 일치는 자아를 선물로서 상호 교환함으로써 체험된다.  (4) 우리를 이러한 일치로 이끌어 오는 열망은 원죄의 결과로 인하여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중요한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로써 통용할 수 있게 된 은총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열망들에 대한 제어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칙 <인간생명>에 대한 묵상"(Reflection on Humanae Vitae) 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그 문서[회칙 인간 생명]가 정당한 것임을 입증하려는 시도에서 위와 같은 개념과 몇 가지 다른 기본적인 개념들에 접근하십니다.  성하께서는 문서[회칙 인간 생명] 전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시지를 않고 피임 사용이 어떻게 인간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당신의 관심을 지속시키십니다.  다시 한 번 더 성하께서는 자연법으로부터의 논고를 기각한다거나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연법의 전망을 인간 인격의 요구들에 대한 당신의 관심 안으로 포용하십니다.

 

  사랑과 성에 관한 당신의 저작(著作)을 통하여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사랑과 욕구와 관련된 주관적인 감정들을 구분함으로써, 그러한 감정들을 연인의 객관적 평가, 그리고 보편적인 가치들의 객관적인 인식 안에 기초를 두려 하십니다.  즉, 성하께서는 우리는 그렇게도 많이 사랑 안에 있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연인의 진정한 본질에 대하여 자주 우리 자신을 속인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가르치십니다.  성하께서는 연인들은 상대 연인의 외적인 매력만을 사랑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하며 상대 연인의 내적인 본질도 역시 사랑해야 한다고 상담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연인이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알 때 뿐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증여하기를 갈망합니다.  이것이 회칙 인간 생명에 대한 교황 성하의 수호로써의 중심이 되는 주장들 중의 하나입니다.  성하께서는 피임의 사용은 실상 우리가 우리의 연인과 함께 나누고자 모색하고 있는 충만하고도 완전한 일치를 상당히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다소 놀랄만한 주장을 하십니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 부분이 성하께서 재천명하고 계시는 중심적인 가톨릭 교의로부터 유래합니다.  즉, 남성과 여성은 단순히 몸 안에 들어 있는 영혼들이 아니며 인간 인격은 영혼과 몸의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비일상적인 어구를 사용하여 몸과 영혼간의 관계를 기술하십니다.  성하께서는 몸은 "인간 인격의 표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 몸을 통해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저작 회칙 인간 생명에 대한 묵상에서 성하는 우리는 몸의 표현을 정직하게 사용해야 하며 우리의 몸이 행하고 있는 것과 진실한 연인으로서의 우리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서로 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몸의 언어"라는 어구를 사용하고 계심은 그러한 맥락에서입니다.  성하께서는 우리가 성적인 관계에서 몸으로써 표현해야 할 것은 진 실한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하십니다.

 

  다음 문장은 이러한 사안에 대한 교황 성하의 접근법을 어느 정도 "맛뵈기" 해줄 것입니다.

 

  동의로써 요건지어지며 결혼적 일치로써 완전하게 되는 성사의 주례자들(ministers)로서 남성과 여성은 자신들의 신비스러운 몸의 "언어"를 그에 온당한 온전한 진리 안에서 표현하도록 부르심 받는다.  제스처와 반응들로써 상호적으로 조성된 긴장과 즐거움 ― 그 직접적인 근원은 남성성(masculinity) 과 여성성(femininity) 안에서의 몸, 행동과 상호작용 안에서의 몸이다 ― 의 전체적인 역동성으로써, 이러한 모든 인간(man) 으로써, 인격은 "말을 한다."[저의 강조 표시]

 

  교황 성하께서는 우리의 신체적 행동들에는 존중해야할 내재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자면, 성의 의미에 대한 객관적 진리가 있으며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그에 부합시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교황 성하께서 자연법에 호소하시는 부분입니다.  성하께서는 "결혼 행위에 내재되어 있는 일치적인 의미와 출산적인 의미 사이에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불가분의 연관이 있다는 회칙 인간 생명의 주장을 재천명하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결혼의 이러한 두 가지 의미들이 진실로 불가분적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러한 의미들이 성에 대한 진리인 것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몸의 "언어"란 결혼 행위의 진리를 표현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자연법에 대한 이러한 존경이 율법주의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더 성하께서는 인간(human person) 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논의에서 당신의 모든 설명을 뿌리 내리십니다.  따라서 성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열망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며 타인과의 완전한 일치를 열망하는 사랑의 역동학에 역행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하시며, 성이 갖는 출산과 일치의 의미에 부합하려 하십니다.  우리의 출산적인 힘들을 부정하는 것, 그리고 고의적으로 이러한 힘을 성적인 일치로부터 제거해버리는 것은 일치를 그것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 이하로 격하시켜 버립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 전체를 연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부분만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격감된 증여는 그것이 성행위를 궁극적으로 가장 일치적으로 만드는 무엇을 성 행위로부터 빼앗아 감으로써 특별히 심각해집니다.  그것[격감된 증여]은 두 사람이 창조해낼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통하여 하나의 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성행위로부터 빼앗아 버립니다.  즉, 성하께서는 출산에 개방하고 있지 않는 성행위는 진실로 일치적이지 아니며, 일치란 성행위를 통하여 우리가 모색하고 있는 바이기 때문에 우리는 피임을 사용할 때 우리 자신의 열망들을 거슬러 움직이고 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피임의 악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설명하십니다.

 

  이러한 두 가지 국면들에 대한 인공적인 분리의 경우에는, 수행된 결혼 행위 안에 실제로 신체적 일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적인 진리와 개인적인 친교의 존엄성 ― 인격의 친교(communion of person) ― 에 상응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친교는 "몸의 언어"가 그 의미의 내재적 진리 안에서 상호적으로 표현되도록 요구한다.  만일 이러한 진리가 결여되어 있다면, 자기통어(self-mastery) 의 진리나 상호 증여와 인격 부분에서 서로 자아를 받아들임의 진리 그 어느 것도 말할 수 없다.  결혼적 일치의 내적인 질서 ― 그러한 질서란 인격의 질서 안에 뿌리 내리고 있다 ― 를 범함은 피임 행위의 악함의 본질을 구성한다.[저의 강조 표시]

 

  그렇다면 피임의 악함이란 피임이 "우리 몸의 언어"가 마땅히 표현해야 할 진리 ― 우리가 연인과의 완전한 일치를 모색하고 있다는 진리 ― 를 속인다는 것입니다.

 

"몸의 언어"(language of the body) 라는 어구의 풍부함을 조금 더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 라는 어구를 들어 보았습니다.  저는 그 어구와 교황 성하께서 의미하시는 "몸의 언어"는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몸은 실제로 자신의 몸을 가누고 움직임으로써 매우 명료한 메시지를 실어 나릅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몸의 어떠한 행동들은 범해서는 안될 내재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몸의 어떠한 행동들이 내재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음성 언어로부터의 예는 이러한 주장을 명료화시키는 데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어떠한 말들은 상당히 비모호(非模糊)한[즉, 명료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떠한 의무를 동반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했던 사람에게 배반당했다고 느낀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러한 고백을 "나는 당신을 돌보아 줄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줄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상처 입히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많은 이들은 어떤 이들이 이러한 말을 우리를 다른 방법으로 ― 아마도 그들에게 선물을 주도록 한다거나 심지어 그들과 성관계를 갖게 하는 식으로 ― 자신들에게 봉사시키려는 의도로써 유혹하는데 사용한다는 사실을 배워 왔습니다.  이러한 말들이 우리가 처음에 그것이 뜻했었다고 믿었던 의미를 동반한 것이 아니었음을 후에 알게 될 때에 우리는 배반당했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이용당했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거짓말당했다고 느낍니다.

 

  어떠한 말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행동들은 내재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까?  그것의 가장 좋은 예란 제 생각으로는 성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유다스가 그리스도께 키스할 때입니다.  그것은 애정과 친근한 감정의 증표로서의 키스가 아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유다스는 키스를 친근하지 않은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키스로써 유다스는 그리스도께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키스로써 애정을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행위란 그 자체에 일종의 내재적인 의미를 동반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행위란 다른 것들 가운데서도 "나는 당신이 매력적임을 발견합니다.", "나는 당신의 존재에 놀랍고도 기뻐합니다.", "나는 당신이라는 선물에 감사하며 나는 당신께 나 자신이라는 선물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하께서는 성행위란 "나는 전적으로 당신과 하나가 되고 당신과 출산의 선을 즐거워할 가능성을 받아들이기를 소망합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성행위 자체가 의미하는 바를 받아들이고 의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성의 일치적인 국면과 출산적인 국면 모두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바로 이것이 성행위에 참여하고 있을 때 우리 몸이 표현하는 바이어야 하며 만일 성행위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러한 의미를 의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몸으로써 [물론 말로써도 그렇겠지만]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피임적 성은 우리 몸을 거짓말에 연루시킵니다.  그러한 유형의 성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몸으로써 개방적이고도 정직하게 대화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性)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들 중 하나를 부정하기를 소망합니다.  바로 출산의 가능성입니다.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과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출산의 힘에 대한 부정이란 그가 완전한 일치를 소망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러한 가르침을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성관계 갖기를 욕망할는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단순한] 색욕이 아니라 사랑의 영역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은 그 사람과 기꺼이 아기 갖기를 열망할 때입니다.  배우자와 더불어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혈연으로써 이미 연결되어 있지 않은) 타인과 가질 수 있는 가장 심원한 종류의 결합입니다.  자신의 유전적 구조가 바로 타인의 유전적 구조와 섞이게 되어 새로운 인간 존재를 창조해 내며 그러한 새 생명에 대해 부모는 평생동안의 의무를 함께 나눕니다.  아기를 함께 양육한다는 것은 두 사람 간에 더욱 더 많은 연관들을 창조해 냅니다.  따라서 더욱 심원한 일치란 오직 자녀들을 갖음으로써 일치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물론, 만일 부부가 어떠한 생리학적 이유가 있어서 자녀를 가질 수 없다해도 그들의 사랑이 여전히 그러한 일치의 깊이에 달성하기를 모색하는 그러한 종류의 [진실한] 사랑이라는 사실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을 타인과의 전체적인 일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단지 신체적 욕망만을 표현하는데 사용함은 성의 본질(nature) 을 속이는 것입니다.  출산에 개방되어 있지 않고서 성관계를 갖는 것은 연인과 나누는 일치를 격감시킵니다.  그러한 [피임적] 관계를 갖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일치하기를 소망하지 않는 사람 ― 더불어 자녀 갖기를 소망하지 않는 사람 ― 처럼 자신의 파트너를 대우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러한 깊이있는 일치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사랑을 천하게 만들고 연인의 품위를 떨어뜨립니다.

 

  간략하게, 교황 성하께서는 성행위 자체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과의 궁극적 일치 ― 아기를 가질 가능성 ― 를 체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성하께서는 만일 그가 성관계를 갖으면서도 그러한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몸으로써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성(性)의 소리없는 파트너라는 회칙 인간 생명의 가르침을 언급하심으로써 교황 성하께서는 피임적 성행위가 말하고 있는 거짓됨의 심각성을 더 넓은 전망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성(性)을 남녀의 몸이 의사소통하는 가장 심원한 방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성하께서는 성행위 안에 일치와 출산의 의미를 새겨 놓으십니다.  그렇다면 피임적 성행위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몸으로써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을 배반하고 오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다시 피임적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부모됨이라는 선(善)과 그러한 부모됨을 통해서 오는 일치의 선입니다.  자녀들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선물이며, 오늘날 세계가 그렇게도 자주 여기고 있듯이, 징벌이 아닙니다.  자녀들은 부부간의 사랑의 일치와 진실한 열매 맺음을 가져다 주는 일종의 선물입니다.  진정으로, 자녀란 하느님과 연인들의 공동 창조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연인들간의 일치를 통해서 이 세상에 새 생명을 들여 오기로 선택하셨으며, 하느님에 대하여 그러한 방식으로 일하실 기회를 부정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성(性)안에 새겨 넣으신 의미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임이 없는 성이란 자신이라는 선물을 타인에게 주는 가장 심원한 표현의 기회를 동반합니다.  그러한 성은 자신의 내재적인 한 부분인 생식력을 뒤에 감추어 두지 않으며 파트너의 생식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부부는 하느님께 자신들이 하느님께서 일을 마련하시는 방식에 불만족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바와 협력하여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그러한 교의가 "건전하게 들린다"하여도 그대로 살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결혼한 부부들은 자주 가족의 크기를 제한함이 책임성 있고 사랑어린 결정임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의 언어가 거짓을 말하기를 소망하고 있지 않으나 아마도 건강이나 재정의 이유로 어떠한 시간에는 자녀를 더 갖는 것이 좋지 않다고 결정 내릴 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부부들이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자녀들을 갖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는 자녀를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양성시킴을 결혼의 주요한 목적들 중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어떠한 부모도 그러한 양성을 보조하는 것은 엄청난 양의 학습과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삶에서 갖는 다른 의무들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러한 것을 보조해 줄 수 있는 자녀의 수에는 제한이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러한 책임성 있는 부모들이 가정의 크기를 제한하기를 소망할 것임을 인식합니다.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성의 본질에 대한 존중을 견지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자연적인 가족 계획과 자기통어(自己統御)

 

  최근 저는, 만일 인공 피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너무도 많은 자녀들로 짐지워질 수 있는 여성들에 대한 교황 성하의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인쇄물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저작들을 통하여 교황 성하께서는 성적인 영역에서의 무질서함의 엄청난 희생자가 되는 사람은 여성 쪽이 되기가 훨씬 쉽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당신의 저작 몇 군데에서 성하께서는 피임은 여성해방이 아니라 여성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훨씬 쉽다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예언을 재확인하십니다.  많은 여성들과의 대화는 교황 성하의 가르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많은 여성들은 피임으로써 착취당하여 왔거나 착취당하도록 허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많은 여성들은 피임법의 사용으로써 자신이 격하되었다고 느낍니다.  여성들은 생식력을 거슬러 작용하는 화학 약품[피임약, 살정제 등]을 사용하고 인공적 기구들을 쓰는 것이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본질에 대한 구타라는 것을 실제로 감지합니다.  자연적인 가족계획법(NFP)을 사용하고 있는 여성들은 거의 항상 남편에게 존중받고 소중히 대우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남편은 자신을 인격체로서 존중할 것임을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자연가족계획과 피임 간의 차이점에 대한 분석은 어째서 많은 여성들이 그러한 두 방법 간의 차이점을 감지[식별]하고 있는지 설명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피임법과 자연가족계획법 간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데에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단도직입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 선한 이유들에서 가족의 크기를 제한하고자 원함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나) 결혼한 부부들이 성관계를 갖든 갖지 않든 아무런 잘못이 없다.  따라서 가족의 크기를 제한하기 원함에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성관계를 갖지 않는 데에도 아무런 잘못이 없으므로, 가족의 크기를 제한하기 원하기 때문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이야기가 매우 부드럽게 따라옵니다.

 

  저는 그러한 사유의 연결이 공박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일상적으로 모든 반대 ― 적어도 처음에 자연가족계획과 피임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반대 ― 에 대한 대답으로서 봉사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피임과 자연가족계획을 사용하고 있는 부부들 모두가 자녀를 원치 않고 있다면 그러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대한 큰 차이점이 무엇이 있겠는가를 의문합니다.  그들은 자연가족계획법을 사용하고 있는 부부가 진실로 자녀를 갖는 출산에 어떻게 개방되어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여기에서 "개방"
(open) 이라는 단어에 대한 너무 얕은 이해로써 어려움이 야기됩니다.  "개방"이란 지금 당장 자녀를 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녀를 가질 가능성을 폐쇄시킬 수 있는(close out)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피임 없는 성을 기술하기 위해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기묘한 어구가 있는데 바로 소위 "방호하지 않은" (unprotected) 성입니다.  부부가 자신들이 지금 시점에서 임신할 수 없다고 매우 분명히 확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녀에 대한 가능성을 폐쇄시켜 버리려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성은 자기 스스로 주기적인 비가임 상태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자연이 그렇게 합니다.  따라서 불임기동안 갖는 성관계에서 여성은 자녀를 가질 가능성을 폐쇄시켜버리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이 그러한 가능성을 폐쇄시킵니다.  그리고 성관계를 가질 아무런 의무도 없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의 가임기 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는데 ― 자제함에 ― 있어 역시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교황 성하의 어구를 사용한다면, 자연가족계획을 사용하는 부부는 자신의 몸으로써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성이 그 충만하고 자연적인 의미를 갖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간략한다면 자연가족계획법의 자연스러움은 명백합니다.  자연가족계획법은 생식력을 선으로 간주하며 이러한 선을 부정하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습니다.  자연가족계획법은 하느님의 법이기도 한 자연의 법과 충만하게 조화를 이루어 작용합니다.

 

  하지만 이는 완벽하게 교황 성하의 사유(思惟) 노선은 아닙니다.  당신의 인격주의 철학 노선에서 성하께서는 인간의 인격에 대한 자연가족계획법의 긍정적인 효과를 강조하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원죄 짓기 전의 자신의 모습이었던 자기통어를 되찾도록 인간을 돕는 주기적인 자제법의 책임성 있는 사용의 저력에 상당한 역점을 주십니다.  성하께서는 인공적이거나 테크놀로지적인 수단은 인간이 그러한 통어(mastery) 를 피하도록 허용하며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을 격감시킨다고 주장하십니다.  인간은 테크놀로지에 의존하여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없는 또는 스스로 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기통어를 대신하여 줄 것을 기대합니다.  자기절제나 제어는 인공적인 방법과 같은 식의 출산 조절 수단이 아닙니다.  자기절제란 인간 인격의 저력과 덕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우리에게 "자기통어"(mastery of self) 란 인간 인격과 불가분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하께서는 자연가족계획법이 우리가 자신의 욕구들에 대한 조절을 배울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씀드린다면, 인공적인 출산 조절 수단은 우리의 내적인 힘을 개발시키도록 도와주지 않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자기통어"라는 주제와 더불어 계속해서 "몸의 언어"라는 주제를 발달시키십니다.  자기통어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자신이 표현하기를 소망하는 바대로 정확히 표현하도록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더욱 심원한 가치들에 감응하거나 표현할 수 없게 됩니다.  다음은 교황 성하의 말씀입니다.

 

  육체 자체로서의 색욕이란, 무엇보다도 육체적인 육감적인 만족을 찾고 있는 한, 어떠한 의미에서, 사랑으로부터 샘솟아 나오고 동시에 그에 온당한 내면의 진리 안에 사랑을 구성하는 가장 심원한 가치들에 대하여 인간을 눈멀고 무감하게 만들어 버린다.

 

  교황성하께서는 성적인 일치란 상호간의 사랑을 표현하려는 열망의 소산이어야 하며 통어할 수 없는 격정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십니다.  만일 어느 사람이 사랑으로써보다도 성관계를 갖겠다는 욕망으로부터 추구한다면 그는 연인을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하나의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욕망들을 만족시키는 대상물로서 대우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기적인 자제를 통하여 얻어진 격정 제어는 격정에 대한 부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파트너에 대한 존중을 확실히 하는 수단입니다.  그러한 조절력은 인간을 서로 존중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자기 제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연인을 오직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성적 결합을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도록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자신의 연인을 충만하도록 존경하고 자기통어를 획득하도록 배우는 데 드는 노력을 결코 평가절하 하시지 않으십니다.  성하께서는 기도와 특별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은총에 정기적으로 의탁할 것을 우리에게 조언하며 상담하십니다.  그러한 기도와 성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약함을 치유하시고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시도록 세우신 수단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노력의 소산의 가치란 역시 평가절하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통어란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 대한 유익을 동반"합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자기제어의 선익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회칙 인간 생명으로부터의 구절을 언급하십니다.

 

  이러한 자기제어는 … 가정 생명에 평정함과 평화의 풍부한 열매들을 가져온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어려움들을 풀어 나가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 안에 상호간의 사려깊음과 사랑어린 배려를 강화시킨다.  그것은 사랑과 자선과 정반대인 과도한 자기애를 몰아내도록 그들을 돕는다.  그것은 그들 안에 자신의 책임들에의 양심어린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끝으로 그것은 부모에게 자녀 교육에 더욱 깊고 더욱 효과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은 유년시절과 청년 시기의 여러 해가 지나감에 따라 생명이라는 진실한 축복의 가치들에 대한 올바른 감각을 발전시켜 나가고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인 힘의 평정하고도 조화로운 사용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교황 성하께서는 우리에게 자연가족 계획법의 사용은 우리가 더욱 훌륭한 배우자와 부모가 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적인 사안에 있어서 우리의 자기제어는 결혼과 자녀를 잘 다루어 나가기 위해 그러한 자기제어를 필요로 하는 우리 삶의 다른 분야들에까지 스며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자녀들의 삶에서 성의 온당한 위치를 납득시켜려 시도할 때에도 자녀들에 대한 훌륭한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엄청난 중요성을 갖습니다.

  성의 온당한 사용이나 결혼의 힘, 그리고 자녀들의 건강함 따라서 사회의 건강함과의 이러한 연관성이란 제 생각으로는 교황 성하께서 인간의 성을 당신의 교황재위의 지속적인 주제로 삼아 오셨던 이유입니다.  마더 데레사께서는 사랑과 평화는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만일 우리가 사랑어리고 평화로운 관계를 가정 안에 세운다면 그것은 나머지 세계에까지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십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당신께서 성적인 사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진실해 줄 것을 탄원할 때면 비슷한 메시지를 전파하십니다.  성하께서는 성적인 사안에서의 성실성은 우리의 삶의 나머지 부분에까지 스며들 것이라는 주장을 견지하십니다.

 

결   론

 

  이러한 논의의 처음에서 저는 교황 성하의 저서 사랑과 책임을 명작으로 언급하였습니다.  성하의 저작은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의문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며 제가 생각하기에는 만일 우리가 그 메시지를 따라 살아 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성적인 방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줄 약속을 하고 있는 성하의 메시지는 진정으로 우리를 흥분케 합니다.  만일 성적인 방종으로부터의 감정적 손상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욱 행복해 할까를 숙고해 보십시오.  "원치않는" 임신이 더 적어질 전망과 그에 수반하여 가난과 탈선한 생활의 격감을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결과될 행복을 떠올려 보십시오.  파괴된 가정이 적어지는 즐거운 결과를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는 성과 성적인 죄들에 집착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성과 사랑과 가정과 인간 행복이라는 연결망이 서로 얼마나 가까운 것들인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교황 성하의 메시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본 에세이로써 저는 교황 성하의 인상적일 정도로 완벽한 성(性)에 대한 가르침을 다소 더욱 명료하게 하려 했습니다.  제가 교황 성하의 현상학적 방법과 인격주의적 접근법에 대하여 강연할 것이라고 친구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는 그 용어들을 매우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교황 성하는 비상한 사람(phenomenal person) 이라는 것입니다.  글쎄요, 저도 동의합니다.  성하의 호소는 우리 시대가 필사적으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음성입니다.  우리의 귀를 열고 행복해 집시다.

 

읽을거리들

 

  저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견해를 저의 책 "회칙 인간 생명 : 한 세기가 지난 후" (Humanae Vitae : A Generation Later) 에서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 회칙 <인간생명>은 옳았던가? : 독본" (Why Humanae Vitae was Right : A Reader) 제 4장 107-18쪽과 제 8장을 보십시오.  다음 참고 문헌적인 정보는 그 저서에서 따온 것입니다.

 

  결혼과 피임에 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은 성 바오로 딸에서 4권이 출판되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근원적 일치 : 창세기에 대한 교리" (The Original Unity of Man and Woman : Catechesis on the Book of Genesis) (보스톤 : 성 바오로 판, 1981),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되다"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보스톤 : 성 바오로 판, 1983), "결혼과 독신의 신학" (The Theology of Marriage and Celibacy) (보스톤 : 성 바오로 판, 1986), "회칙 인간 생명에 대한 묵상" (Reflection on Humanae Vitae) (보스톤 : 성 바오로 판, 1984).

 

  또한 윌렛츠(H.T.Willetts)가 번역한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의 "사랑과 책임" (Love and Responsibility) (뉴욕 : Farrar, Straus, Giroux, 1981), 안드레이 포토키(Andrzej Potocki)가 번역한 "행동하는 인격" (Acting Person) (Analecta Husseliana v. 10; 보스톤 : D. Reidel Publishing Company, 1979), 그리고 "가정 공동체 : 현대 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인 가정의 역할" (Familiaris Consortio : The Role of the Christian Family in the Modern World) (보스톤 : 성 바오로 판, 1981).  회칙 인간 생명의 제 10주기 기념으로써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회칙 "인간 생명" (Humanae Vitae) 과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사이의 어떠한 연관성들을 조명하셨습니다.  그 연설은 "열매 풍성하고 책임성 있는 사랑" (Fruitful and Responsible Love) 이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책으로 발행되었습니다.(뉴욕 : Seabury Press : 1979)

 

  교황 성하의 성에 대한 가르침들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행한 학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성하의 가르침들에 대한 아마도 가장 유용한 간단한 요약은 리차드 호간(Richard Hogan)의 "몸의 신학" (A Theology of the Body) (The International Review of Natural Family Planning 6, no.3 (1982년 가을호) : 227-312 (rpt. from Fidelity, December 1981)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역시 유용한 책은 다릴 글릭(Daryl J. Glick)의 "도덕성의 회복 :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격주의와 몸의 신학" (Recovering Morality : Personalism and Theology of the Body of John Paul Ⅱ), Faith and Reason 12, no.1 (1986) : 7-25입니다.  "성과 결혼과 정결" (Sex, Marriage, and Chastity) 은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들을 명시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암 메이(William May)는 교황 성하의 가르침을 자신의 책에 도입시키는 작업을 했습니다.  또한 예수회 마태우스(A. Mattheeuws, S.J.)의 "회칙 <인간생명>에 관하여. 요한 바오로 2세의 교리" (De la Bible   "Humanae vitae". Les cat ch ses de Jean-Paul Ⅱ), Nouvelle revue th ologique Ⅲ, no. 2 (March-April 1989) : 228-48.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누룽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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