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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데레사 사적 계시에 관한 교령(최종)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09. 1. 31. 10:03

 

황 데레사 사적계시에 관한 교령 해설 - 최종
어떻게 ‘사적계시’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수원교구 인터넷신문 2008-11-13]
 
「‘황 데레사의 사적계시’와 관련한 수원교구 교구장의 교령」에 대한 해설 - 최종
 
  사람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으나,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기는(묵상) 가운데 모든 분심을 떨쳐버리고, 오관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적 느낌을 알아채지 못하게 되는 순간(거둠의 기도)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개인적이며 은밀하고 충만한 여러 가지 영적체험들을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사적계시’라고 불러왔다. 하느님의 자기 드러내심을 말하는 ‘계시’라는 말은, 원칙적으로 한 개인에게 체험된 신비스러운 사실에 대하여 쓸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느님의 마지막 계시이자, 동시에 하느님 계시의 핵심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롭고 결정적인 계약인 그리스도의 경륜은 결코 폐기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기 전에는(1티모 6,14; 티토 2,13 참조) 어떠한 새로운 공적계시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계시헌장, 4항).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계시’라는 표현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께서 보내주신 성령께만 해당되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구원 사건들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다가 마침내 당신 아드님을 보내심으로써 당신의 계시를 완성하셨다(히브 1,1-2). 그분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도들의 시대가 끝남으로써, 이제는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인간에게 당신을 직접 드러내신다는 의미에서의 ‘계시’라는 표현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계시’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열어 보이시는 것, 즉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계획을 밝히신 것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완성이신 계시를 벗어나거나 그 계시를 수정하려고 시도하는 다른 ‘계시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7항)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직분과 직무에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필리 3,8-9). 이것을 차지하려고 달음질 칠 때(필리 3,12-16 참조), 즉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서 마음에 속삭이시는 사랑의 부르심을 듣고 따르면서(호세 2,16)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에서 어떤 신비스러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며,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기도생활에서 많은 이들이 이런 신비스러운 변화 때문에 얻어지는 기쁨을 자주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요한 15,11; 16,22-24). 이런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며,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뜨거운 열정을 또 다시 강하게 일으킬 수 있다. 그 변화는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결단(묵상기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령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음을 체험하게 될 때(관상기도)까지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영적체험’이라 불리는 이런 현상들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지만, 열심한 신앙생활에서 이런 체험들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이 독특한 지위를 누려야 한다거나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아무런 원칙도, 이유도 없다. 이런 체험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실 때, 원하시는 방식대로 주시는 것들이며, 열심한 신앙인들이 보다 더 성숙된 신앙생활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일종의 위로와 격려와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런 체험들을 한 사람들은 마치 이제껏 몰랐던 하느님의 거룩한 구원계획의 한 부분이 자기를 통해서 드러난 것처럼 확산시키고 있다.
 
  영적 허영에 빠진 나머지 영적 갈증을 채우려는데 급급한 이들은 약간의 집중된 기도생활과 깊은 묵상에서 얻어진 체험들(환청, 환시, 환각 등), 혹은 극단적인 집착이나 강박관념에서 체험될 수 있는 현상들을 ‘사적계시’라는 말로 유포시키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의 영적체험(사적계시)이 성경과 교도권의 가르침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그들이 이미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생활에서 멀리 벗어나 있으며, 잘못된 종말론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런 체험은 교도권을 통하여 발표되는 신앙교리에 대한 선포가 아니므로 인간 미래에 대한 구원적 청사진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처럼 이해하거나 무조건 믿으려 해도 안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지금도 하느님께 무엇을 여쭙고 싶거나 혹은 어떤 현시나 계시를 원한다면, 그리스도께 눈을 돌리지 않으면서, 그리고 다른 새로운 것을 원하지도 않는 가운데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가르멜의 산길, Ⅱ,22,5)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사적계시’라고 표현되는 영적체험과 그에 동반되는 현상들(환청, 환시 등)을 교회가 가끔 인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공적계시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현상들이 때로는 공적계시의 본질적인 의미를 모호하게 할 수도 있지만, 복음의 가르침과 ‘교회정신’(친교, 일치, 선교, 사도직에 참여)에 잘 부합하는 가운데 시대적 징표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각 영혼의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이러한 영적체험은 한 개인의 지극히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규범들(자기 양심, 내적 느낌들, 생각들, 그리고 충동들)에 의해 이루어진 하느님께 대한 이해 내지는 체험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원인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체험될 수 있는 이러한 신비스러운 영적체험이 단지 공적계시의 내용을 전제하고 신학적으로 입증될 때, 시대의 징표, 혹은 시대적 요청으로 이해될 뿐이다. 그리고 공적계시에 충분한 바탕을 두고, 공적계시를 전제하고 있을 때, 그리고 교도권의 가르침에 순종할 때만 신학적 반성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일 때에 교회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 또한 무조건 유포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교회는 신중을 기해왔다. 인간의 인식 방법은 한계가 있고, 특히 감각에서는 쉽게 착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체험이 부리는 횡포의 가능성도 염두해둬야 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적체험에서 얻어질 수 있는 현상에 치중하는 그릇된 신앙관을 조장하는 여러 사례들이 ‘사적계시’라는 이름으로 전파되고 있다. 건전한 신앙생활로 무장되어 있지 않은 신자들에게는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흐름들은 최근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신심운동’이나 ‘성모신심운동’에 붙어서 조직화하여 가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여기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부분들도 있다. 특히 오늘날 마리아 공경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하다. 가톨릭교회가 장려하는 성모신심이 그리스도의 의미를 흐리게 할 수도 있는 그런 형태라면, 그것은 마리아 공경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마리아 공경은 마리아를 은총의 둘째 원천으로 삼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1티모 2,5)이신 예수님과 나란히 흠숭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마리아와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 무슨 군더더기도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 때문에 마리아를 공경한다. 성모 마리아께는 물론이요, 천사나 어느 특정한 성인과 연관된 영적체험이라 할지라도 ‘계시’라는 말을 쓸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성모신심운동에서는 ‘계시’라고 표현하고 싶은 뜻을 분명히 담고 있으면서, 즉 실질적인 의미는 성부께서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으나 이제는 성모 마리아를 통해, 혹은 자신을 통하여 드러내신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임에도 ‘계시’라는 말을 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내적 담화’, 혹은 ‘메시지’라는 말을 쓰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성모 마리아는 신화(神話)에 나오는 여신(女神) 이거나 상상적 인물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교회 안에서 가장 높으신 그리스도 다음으로 높고,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 분”(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54항)이시지만, 참으로 사람이시다.
 
  수도생활의 신학에서 은사(카리스마)에 대해 말할 때에도 수도회 창설과 연관된 영적체험을 말한다. 창설자의 혹은 수도회 설립의 은사는 수도회의 모든 회원들을 통하여 지켜지고, 발전되고, 풍요로워진다. 비록 시대가 바뀌어도 수도회원들은 그 은사를 따라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목적대로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시대적 징표를 읽어내면서 얻어진 창설자의 은사는 한 수도 공동체가 성령께서 보증해주시는 탁월한 지속성과 더불어 시대를 초월하여 다른 이들도 같은 성소를 살 수 있도록 느끼게 해주고,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창설자의 은사에 따라 역동적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수도회 창설자의 은사의 중요한 영성적 내용은 성령께서 이끄셨던 선물의 형태로 수도회를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문헌(회헌, 혹은 회칙)에 담기게 된다. 또한 창설자의 영감에 의해, 그리고 역사적 상황에 따라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면서 표현되기도 한다. 창설자의 은사는 자기 시대는 물론이요 역사 안에서 수도 공동체가 어떤 역동성을 가지고 발전해야 하는가, 그리고 수도 공동체의 궁극 목적과 정신은 물론이요 그에 따르는 삶의 특별한 형태는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수도회 창설자의 정신이 잘 담겨 있는 수도 회칙의 정신은 수도회의 창설자가 초기에 지녔던 순수한 의도와 정신을 이해하게 해주는 좋은 영적 자산이 될 것이다.

  수도회 창설에 관한 은사에서도 잘못된 견해가 있다. 교회는 수도회의 ‘창설자’에 대한 공식적인 표현을 13세기에 와서 수도회 설립이나 수도회의 훌륭한 창설자들의 시성식에서 쓰기 시작했다. 수도회 창설자가 반드시 수도회원들을 모으거나 수도회를 위한 회칙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도회 창설자는 소속된 지역교회 주교의 지도 아래, 하느님과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결정적인 의미(은사)를 제시할 수 있다. 이 은사 때문에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이게 되며, 모인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령의 열매에 부합되는 은사의 영적인 풍요로움을 제시해주어 수도회가 지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창설자 주변에 모인 이들(수도자들)은 반드시 이 창설자의 은사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창설자의 은사(카리스마)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물론 교회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동체가 결성되면서 모든 수도회들은 창설자의 특별한 은사에 의해 수도회를 창설되었다고 하지, 절대로 “계시를 받아서 수도회가 창설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라면 교회 역사상 나타났다 사라졌거나 남아 있는 모든 수도회들이 ‘계시 수도회’, 혹은 ‘계시를 받아 창설된 수도회’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또 대단히 어려운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자는 특별한 이유로 창설된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18세기에 십자가의 바오로에 의해 창설된 예수 고난회야말로 ‘계시 수도회’, 혹은 ‘계시를 받아 창설된 수도회’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고난회 뿐만 아니라 개신교는 물론이요 이슬람 세계에서도 그 은사가 인정되고 있는 프란치스코회는 수도회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계시 수도회’라고 불린 적이 없다.
 
  한 신앙인의 영적체험이 공적계시인 성경과 성전, 그리고 교도권에 얼마나 일치하느냐, 혹은 체험자에 대한 섬세한 관찰(환경, 시대적 징표, 겸손한 태도, 신학적 의미)과 체험자 자신의 진실한 자아인식이 얼마나 받쳐주느냐에 따라서 영적체험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자기 투사, 즉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모습을 그려낸(조작해낸) 것일 뿐이다. 영적 체험자의 상상이 이성 안에서 은총의 빛으로 제어되지 않을 경우, 그리고 복음과 교도권의 가르침에 위배될 경우, 영적체험은 주변 세계에 관한 여러 가지 왜곡된 생각들에 불과한 환각들을 끊임없이 펼쳐낼 것이다. 이러한 영적체험들이 때로는 과장된 표현들을 통해 불안 심리를 조장하여 불필요한 희생과 헌금을 강요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실천적 가능성도, 신앙적 합리성도 없는 단순하고 천박한 이야깃거리, 즉 파라오의 마술사들이 부렸던 재주(탈출 7,10-13)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신앙인들에게 처음에는 대단한 매력으로 다가가겠지만 성경과 성전의 가르침에 비교해보면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자기 신앙은 물론 다른 이들의 신앙을 철저하게 파괴할 것이라는(1티모 1,6; 2티모 2,16-18 참조) 사실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영적체험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맛보는 하느님 체험, 즉 영적체험이 제아무리 아름답고 감격적이라 할지라도, 공적계시(복음)와 거룩한 전승(사도와 교부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거나 교회의 가르침(교도권)에 위배된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삶 속에서 훌륭한 결실로 정립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이것을 미심쩍게 여기고, 배척해야 한다. 영적 갈증을 채우려는 이들이 무조건 신기한 체험의 내용에 매달리는 나머지 휩쓸리게 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사목자들도 책임이 있음을 다시 한 번 깨우쳐야 할 것이다. 만일 사적계시를 교회가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영적체험이 자기 시대의 신앙인들을 위하여 제시되는 회개의 징표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관심을 기울이게 할 뿐이다. 또한 그들의 체험 내용이 복음정신(사랑)과 교회정신(친교)에 일치할 때, 그리고 충분한 신학적 반성을 통하여 영성적 규범들 가운데 하나로 정립될 수 있을 때 영성생활을 촉구할 수 있는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그들의 영적체험(사적계시)을 통하여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시대와 환경에 맞는 영적 여정을 빨리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긍정적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이제 사적계시라고 불리는 영적체험에 대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두 가지 중요한 권고를 묵상할 필요가 있다. “영혼으로 하여금 이런 현시들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 현시들에 대단한 집착으로 몰두하도록 가치를 부여하고 부추기는 고해사제들은 물론이요 많은 지도자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영혼으로 하여금 그 현시들로부터 더욱 양식을 얻게 하고, 더욱 더 현시들에 기울어지게 하며, 급기야는 현시들의 포로가 되게 만든다. 여기에서 많은 결함들이 생기는데 적어도 영혼이 이제는 더 이상 겸손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좋은 현시들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는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중요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만자족해서 돌아다닌다. 이것은 겸손과는 정 반대의 짓거리이다. 즉시 악마는 영혼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은밀한 방법으로 이런 감정을 부추긴다. 그리고 영혼이 이런 현시들을 보았거나 또는 못 보았다 할지라도, 혹은 그 현시들이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닐지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이 다른 현시들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부추긴다. 이것은 영적인 고독과 거룩한 단순함과는 정 반대의 행동이다.”(가르멜의 산길, Ⅱ,18,3)

  사적계시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대답하실 것이다: “나의 아들인 내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들을 다 말했기 때문에 다른 할 말이 없다. 이보다 더 무엇을 네게 계시할 수 있으며, 응답할 수 있겠느냐? 오직 그리스도께 눈을 돌려라. 그리스도 안에 네게 말한 것과 계시한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네가 청하고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찾을 것이다. 네가 특별히 계시들과 환청들을 청하는데 만일 그리스도께 눈을 돌린다면 모든 것을 찾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환청이며 응답이고, 나의 모든 현시이며 계시이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형제로, 동료로, 스승으로, 대가(보상)로, 그리고 상급으로 주면서 다 말했고, 응답했고, 보여주었고, 드러냈다. 타볼 산에 나의 성령과 함께 내려갔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태 17,5)고 한 그날부터 이미 옛날에 하던 응답이나 가르침의 모든 방식으로부터 손을 뗐으며, 그리스도에게 다 주었다. 너희는 그에게서 들어라. 나는 계시할 신앙밖에 더 이상 아무것도 드러낼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전에 말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약속했던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내게 물었다면 그 질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요청과 기다림이었으며, 이제 복음사가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알게 해주는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선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러나 이제 옛날식으로 내게 질문을 한다면, 그리고 내가 무엇을 말하거나 계시하기를 바란다면 내게 그리스도를 또 다시 청하는 것이며, 신앙을 더 청하는 것이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신앙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아들에 대한 대단한 모욕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인간이 되라는 것이며, 이 세상을 살다가 처음처럼 또 죽으라고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원하거나 청할 현시들이나 계시들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잘 바라보아라. 모든 것을 다 이루었고, 주었으니 네가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것이다”(가르멜의 산길, Ⅱ,22,5).
 
 
 
2008년 11월 16일
천주교 수원교구 사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