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기의 노래
- 고통으로 읊은 신앙고백 수원교구 인덕원 본당 교육분과장 김종두(스테파노)
“′~때문에 ~때문에′힘들고 어렵다고 얘기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게 다 섭리고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내가 하느님이 원 하시는 천상 낙원에 있을 거라는 생각 한번 해 보세요. 그럼 지금 닥친 일 이 무슨 문제겠어요? 불평불만은 자기 행복에 절대 도움이 안 돼요.” 본당 노인대학 성경 강의 때 김종두 교육분과장이 열을 올리며 하는 말 이다. 3개월 시한부 인생이 20년 가까이“ 괜찮은 척하며 잘 살고” 있을 수 있는 금쪽같은 비결이기도 하다는데. 그와의 만남은, 꽃샘추위를 녹이는 따뜻한 커피와 함께 시작됐다.
홀로 앞에 선, 우리 “솔직히, 전 세상적 성공과 출세에 대한 욕심이 컸어요. 지고는 못 살았죠. 학교에선 1등을 해야 했고 회사에선 우수사원이 돼야
했어요. 검도를 오래 했는데, 나이 들면서 점점 우승에서 멀어지니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지면, 어떻게 해서든 다른 방법으로라도 이겨야 했고요. 따지기도 좋아했어요.”
젊은 시절, 김종두 분과장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늘 최고가 돼야 직성이 풀렸다.
“어릴 땐 워낙 키가 작아서 매번 1번 아니면 2번이었어요. 큰 애들한테 쥐어박히고 애기 취급받고요. 그 트라우마로 키 큰 놈만 보면 싸우고 싶은 욕망이 생겼어요. 저놈을 이겨야 내가 무시당하지 않는다 생각한 거예요. 그래 싸움도 많이 해서 제 치아가 제께 아니에요. 집에서는 제 물건이 정확하게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난리 법석을 폈어요. 책도 다 거꾸로 꽂아 놓았었고요. 책을 꺼내 펼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한 저만의 방법이었죠.”
하지만, 그는 깨달았다.
“소위‘ 잘 나간다’는 소리 들으며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올라가니까 저 자신이 엄청나게 잘난 줄 알았던 거예요. 교만이 덕지덕지 거죠. 그래서 하느님이 저한테 병을 통해 자제를 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주님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로마 8,28 참조)더라고요.”
김종두 분과장이 미래사목연구소 강사로 활동할 때다.
“미국 한 한인 성당에 강의하러 간 날이에요. 사람들이 꽉 차 있고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어요.
속으로‘ 뭐지?’ 싶었는데 저를 이렇게 소개하는 거예요.‘ 우리가 기도했던 그분이 오셨습니다.’”
알고 보니 처형 식구가 다니는 성당이었고,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김종두 분과장을 위한 기도가 그곳에서 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암이라고 판정받은 날, 집사람이 구역장·반장들한테 다 전화를 돌려‘ 우리 남편 암이래, 기도 좀 해줘’라고 했어요. 당시 제가 소공동체 회장이었는데, 본당 식구들이
저녁 8시만 되면 저희 집에 모여 많게는 50~60명 적게는 15~20명이 매일 9일기도를 한 시간씩 했어요.”
기도 모임은 6년간 이어졌고, 그가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동안 본당 공동체도 변화됐다.
“분명 김종두 스테파노 죽는다고 했는데 살아났잖아요? 그럼 기도한 사람들이 뭘 느껴요?‘ 하느님 계시네. 성경 말씀에 둘이나 셋이 마음 모아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지 들어주신다고 했는데, 실현됐네!’ 이 얘기가 우리 본당에 확산되면서 성당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하느님의 은총이 어느 쪽에 내리든 그 한 부분이 공동체를 살려내는 은혜가 되더라고요. 내가 지금 아프고 고통스럽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결과적으로 하느님은 나를 선의 위치, 내가 원하는 가장 좋은 곳에 갖다 놓으세요.”
그러니, 그의 가슴엔 절절한 감사가 새겨질 수밖에.“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인덕원 본당 교우분들과 모든 분들께 진짜 감사드려요.”
마지막 희망, 성경 “시한부 선고를 받은 건, 2001년 5월이에요. 직장암 말기라며 3개월에서 6개월밖에 못 산대요. 날벼락이었죠. 그런데 수술하고 3개월, 6개월이 지나도 생명을 부지하는 거예요. 그제야 눈을 떴어요. 아하, 의사가 내 생명을 쥐고 있는 게 아니라 생사화복이 하느님 손에 있구나.”
그때부터 성경을 붙들고 필사하기 시작했다는 김종두 분과장.“몸에 7~8개의 호수를 끼고, 어쩔 땐 7~8시간씩 성경을 썼어요. 병원에 소문나길, 성경 쓰는 사람이었죠. 하하.”
사실,“ 붙들 수 있는 게 성경 말씀밖에 없어, 끊임없이 성경을 썼다”고 한다.
“수술 후 항문을 밖으로 빼놨는데, 산다고 해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싶었어요. 몸 밖에 연결한 배변 통에선 수시로 푸드득 소리가 나고, 그럴 때마다 몸에 소름이 버쩍버쩍 끼쳤어요. 배변 통을 차서 일반 바지는 입을 수도 없고… 화장실은 하루에 20번 정도 가야 하고… 매월 나가는 병원비도 만만치 않고… 첫째는 고3에….”
그런 정신적 고됨이 그를 짓누르던 어느 날이었다.
“회진 때 의사가‘ 괜찮죠?’ 하곤 그냥 지나갔어요. 좋아졌다느니 뭐 그런 희망적인 얘길 듣고 싶은데….‘ 선생님, 저한테도 한 말씀 해 주셔야죠?’라고 했더니, 의사가 돌아와 제가 펴놓은 성경에 손을 얹더라고요.‘ 당신은 이분이 살려 주실 거’라면서요.”
그 의사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날 성경이 살아 있는 말씀임을 깨달았어요.‘ 내가 의사와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렇게 메시지를 주시는구나. 정말 성경 말씀만이 내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구나.’”
항문은 8개월 만에 다시 제자리로 넣었지만, 2003년과 2012년 암 수술(임파선, 위)을 두 번이나 더 받아야 했다.
“세 번째 수술 땐 정말 독한 마음을 품었어요. 진짜 좋은 표현으로 말하자면, (병을 이겨낸) 저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있었다는 걸 주변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수술 후에 일부러 진통제를 한 대도 안 맞았어요. 성경책 달라고 해 병원에서 계속 썼죠.”
현재까지 10번의 성경 필사를 마친 김종두 분과장은 아직도 하루 3시간 이상 꼭 성경과 함께한단다.
“성경을 한글, 영어, 중국어로 쓰고 있어요.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 주석을 달고요. 성경 말씀을 붙들고 앉아 있으면 너무 평화롭고 맑아져요. 아픈 곳 하나 없고요. 제가 의지할 마지막이에요.”
생명의 보증, 봉사 “세례받은 지 1년도 안 돼 주일학교 교사를 맡았어요. 그걸 시작으로 여태 봉사를 하고 있는데, 오래 하다 보니 적도 꽤 돼요.”
본당에서 선교분과장, 사목회 부회장, 소공동체 회장, 교육분과장 등, 발을 넓혀 중국 선교까지 40년 넘게 봉사한 김종두 분과장. 그 말마따나“ 망설이는 것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질러버렸기” 때문이란다.
“신학원 졸업식 답사 때도 주교님께 대놓고 말했어요.‘ 평신도들을 키워놨으면 쓰셔야지요. 저희가 나가면 할 수 있는 일이 뭡니까? 졸업한 사람들이 선교회를 만들 테니 교구에서 교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 덕에 졸업생들은 실질적인 선교일꾼이 될 수 있었지만, 달갑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성격이 강했어요. 봉사하면서도, 제가 제일 똑똑한 줄 알아서 제안을 하면 그 안이 꼭 관철돼야 했고요. 신부님한테 안 받아들여질 때는 밤 10시가 넘어서도 두
번 세 번 찾아갔어요. 그러니 신부님들도 불편해하셨죠.”
그럼에도 김종두 분과장은 교회 일이라면“ 예”로 응답했다.
“수술하고 몇 달 있다가 제 사정을 모르고 예비신자 교리 해달라는 신설 본당이 있었어요. 그곳 신부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예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답했
죠. 항암치료하면서 토요일 저녁이면 그곳에 가 교리했어요. 4년 정도.”
성당 건축금을 갚기 위해 실시했던 본당 바자회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하루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10시가 넘도록 바자회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주임 신부님이 커피를 들고 들어 오셔선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씀하셨어요.‘ 스테파노, 너무 애쓰지 마. 성령께서 다 해 주실 거야.’‘ 바자회를 우리가 하지, 무슨 성령이 해 줘요?’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아, 맞아. 내가 기도 안 하고 있구나. 하느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내 머리로 세상적으로만 따지면서 이따위 짓을 하고 있구나.’”
이제 김종두 분과장은 어떤 일에도 먼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 섭리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한단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
았던 태도도 달라졌다고 한다.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가 뒤돌아 봐요.”
봉사가 삶의 전부가 된 그는 말한다.
“제가 수술하고, 중국으로 선교 간다고 할 땐 주변에서‘ 죽으려고 환장했다’
고 했어요. 저는 괄약근을 도려내서 변을 참을 수가 없거든요. 중국 음식이 자극적이잖아요. 저도 혹시나 해서 기저귀 차고 갔지만, 거짓말같이 한 번도 탈 난 적이 없어요. 그담부턴 사람들이 걱정하면, ‘나는 살라고 봉사한다’고 말해요. 진짜로 하느님 일 해야 제가 살아요. 또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많은 분들께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어떤 경우가 됐든 계속 봉사하게 만들어요.” 생명줄이 된 하느님을 향한 봉사에 주님은 매번 동행하며 그를 지켜주셨다. 강의만 해도 그렇다. 전국으로 강의를 다니며“ 두어 번 변으로
낭패를 봤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해결할 수 있었고, 큰 문제 생긴 적이” 없었단다. 하늘을 향해 영글어 가는 그가 저 깊은 곳에서부터 쏟아낸 말이다.
“하느님이 돈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저를 필요로 하시겠어요? 절대로 그런 거 아니에요. 단지 저는 협조만 하면 돼요.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 옆에 있었듯이, 있기만 하면 나머지는 주님이 하세요. 그게 저를 기쁘게 해요. 어제그저께까지 죽는다는 소리 들었던 놈이 봉사한다고 그분 옆에 있으니까, 다 돌봐주시고 살려주시잖아요.‘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와요. 하하.”
“아픔 자체가 축복이었다”는 김종두 분과장이 자주 바친다는 기도다. “주님, 제 눈 열어 주세요. 제 귀 열어 주세요. 제 마음 열어 주세요.” 그 는 이어 말한다.“ 아무리 하느님이 무상 은총, 공짜 축복 주셔도 내가 발 견하지 못하고 감지하지 못하면 다 헛거잖아요. 성경에 좋은 말씀 있더라 도 내 눈과 귀가 열리지 않으면 못 알아보는 거예요.” 그가 뒤집어 만난 인생의 축복 자락들은 우리를 위한 열렬한 희망의 응원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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