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9월 20일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7. 9. 21. 07:46

9월20일 수요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34)


우리 시대의 모순을 다시 일깨워 주십니다.

모순을 떨쳐내는 길은
먼저 판단에서 벗어나
예수님처럼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변질시키는 것은 언제나 같은 사람들의 지나친 욕망입니다.

우리 마음이 가 있는 곳이
주님마저 앞서가려는 어리석은 욕심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좋은 일을 하는 희망의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으로부터 소외된
가장 아프고
가장 못난 이들과 함께
어울리시며 살가운
사랑을 나누시는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삶이란 수시로
변하는 우리의 마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은
언제나 사람들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거기에 참된 지혜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안에서
새로운 살맛을 배우는
기쁨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마음을 열면 세상은
더욱 밝아집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입으로만 하는 노련되고
숙련된 숭배가 아니라
우리의 심장이 소외된
이웃들을 향하는 것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9월20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루카 7장 31-35절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언젠가 ‘의무적’으로 강의를 들어야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인생강좌’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타의에 의해 거기 앉아있는 분들이다 보니 참으로 느낌이 난감했습니다.

마치 예비군 교육이나 민방위 교육 강사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차라리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었습니다.

아무리 ‘생쑈’를 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심드렁한 표정, 관심 없다는 얼굴, 소 닭 바라보는 것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렇게 앉아들 계셨습니다.

제게 주어진 1시간이 그렇게 길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이제 시간이 다 끝나가겠지’ 하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괜히 왔구나’,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는 모든 것 포기하고 그냥 진도 나가는 것이 최상책이지요.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 중에 하나가 상대방의 냉담함입니다.
무반응입니다.
무관심입니다.
차라리 반대하고,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더 견딜 만합니다.
그냥 무표정한 얼굴, 관심 없다는 얼굴은 참으로 난감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정말 파격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인간을 위한 ‘생쑈’를 하신 것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냥 하느님으로 계셔도 좋을 텐데, 자신을 대폭 바꾸시고 낮추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피리를 부셨습니다.
춤까지 추셨습니다.
곡까지 하셨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시려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손길과 섭리, 은총과 사랑의 표현에 오늘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오늘 나의 행복을 위해 피리를 부시는 하느님, 오늘 나의 기쁨을 위해 춤까지 추시는 하느님, 오늘 나의 회개를 위해 슬피 우시는 하느님...
그분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많은 것을 바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분께 감사하는 일, 그분과 함께 기뻐하는 일, 그분 현존에 푹 잠겨 행복해하는 일이 아닐까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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