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9월 20일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7. 9. 21. 07:44

9월 20일[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엉킨 매듭을 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위로 자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엉킨 매듭을 푸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국제 정세를 잘은 모르지만 엉킨 매듭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난감할 정도입니다. 북한은 연일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남한에 사드를 배치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국제 사회는 북한에 대해서 재재와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이 엉킨 매듭을 잘 풀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혼배 미사 주례를 부탁하는 전화였습니다. 제가 직접 아는 자매님도 아니고, 누군가가 저를 소개 해 주신 것 같습니다. 혼인을 하는 신랑과 신부를 잘 모르지만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른 한통의 전화는 레지오 단원을 위한 피정 부탁 전화였습니다. 이 또한 누군가가 제가 잘 할 것이라고 소개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화를 받고, 부탁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후에 하려고 했던 일은 뒤로 미루고, 혼배 미사 강론 준비를 해야 하고, 강의를 위해서도 며칠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이렇게 바쁜 시간들이지만 나중에 보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매번 지혜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건강을 주셨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는 시간, 누군가를 도와주는 시간은 사실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텔레비전 보느라고, 술 마시고 노느라고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입장을 들어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엉킨 매듭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본인들의 책임은 다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사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해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본당의 일은 신자들이 잘 하지 못해서, 교회의 일은 주교님들께서 잘 하지 못해서 안 된다고 합니다. 나중에 보면 본인들은 별로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과 폭력이라는 가위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편견과 욕심이라는 가위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온 우주를 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미워하면 바늘하나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매듭을 푸셨습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십시오.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어 주십시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십시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도 행복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또한 행복합니다. 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9월20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복음: 루카 7,31-35
 

 
 
제가 신학생 때 로마 유학을 나가서 한 해가 지나고 신학원 규정대로 여름방학 때는 봉사를 두 달 동안 나갔습니다.
제가 간 곳은 꼬똘렝고라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시설이었습니다.
그 분들의 목욕도 시키고 변도 닦아주고 산책도 시키는 등의 결코 쉬운 봉사는 아니었습니다.
 
말도 잘 안 되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들과 힘든 일을 해 가며 지내다보니 제가 병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니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제 몸도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이태리 신학생 두 명도 2주 동안 그 곳에 봉사를 나와서 저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로마에서 공부한다고 하니까 매우 부러워하였고 질투까지 난다고 하였습니다.
 
이태리 신학생들에게도 로마에서 공부하는 것은 부러움의 대상임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봉사를 할 때 그들은 그 곳 수사님들께 꾸중을 많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일이 익숙해지는데 한 달 정도가 걸렸는데 그들은 겨우 2주나 1주 동안만 하고 떠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수사님도 그들이 없을 때 그렇게 짧게 봉사 오는 사람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으셨습니다.
일을 배울 때쯤에 떠나버린다는 것인데, 사실 일을 가르치는 게 더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저와 비교가 됨을 느끼고 저를 경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저와 우리나라를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나라 기차 있어? 너희 나라 차 만들어?”
 
저는 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태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대나 기아, 대우 자동차 등이 한국에서 만들어져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자신들은 그런 차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잡아뗐습니다.
 
실상은 이태리보다도 한국이 차를 더 많이 만드는데도 그들은 그런 식으로 알면서도 모른다고 우겼습니다.
 
사람이 질투나 미움이 쌓이면 뭐라고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라고 하시며 꿈쩍도 하지 않으려는 유다인들의 딱딱해져버린 마음을 비판하십니다.
그들 마음에는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못마땅하게 보입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사실 교회 안에서도 요한처럼 극기의 생활을 하면 혼자서만 거룩한 척하며 친교를 살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혹은 먹고 마시면 또 너무 흥청망청 살아간다고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이런 비판에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요한도 옳고 당신도 옳다는 것이 두 분이 이루신 “일”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저는 어느 순간 나를 미워하는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게 만들고 싶었었습니다.
그러나 99%의 에너지를 그 한 사람에게 쏟아도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런 일은 불가능하고 유익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나를 안 좋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더 잘 보이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건 그 사람이 그렇게 판단하고 싶어서이지 나의 삶과 크게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족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받아도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절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피리를 불거나 춤을 추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나에 대해 판단해 줄 때, 정말 내가 잘못한 것이면 바꾸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판단 때문에 휘청댄다는 것 자체가 더 창피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말로만 하느님이 나의 유일한 심판관이라 말하면서도, 이웃의 평가가 가장 중요한 것인 양 살아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나의 일에만 충실합니다.
내가 한 일을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겨도 올바로 보아주는 사람은 올바로 보아줍니다.
 
제가 처음 보좌로 성당에 갔을 때 청년미사에 율동 등을 넣어서 신자들이 미사 때 율동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미사 참례 수가 반이 줄었습니다.
 
어른들은 미사 때 율동을 하는 것을 참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한 1년이 지날 때쯤엔 그 미사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찼습니다.
 
다른 성당에서까지 모여들었습니다.
춤추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피리를 불어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춤추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피리를 불어주어야 합니다.
 
사람의 판단에 휘청거리지 않고 정의로운 행위를 해 나가는 것, 그것이 참된 지혜인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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