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성주간 화요일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7. 4. 15. 08:15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 13,21-38

 
연옥: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런던 미술관에 미완성 조각상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자연 상태의 대리석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면 사람의 형상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조각가는 작품을 완성시키지 않았을까요?

조각상 받침돌에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조각상을 만들던 조각가는 여기까지 파고 죽었노라.”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귀족인 존 코드가 찾아와

“제 아내의 초상화를 그려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1개월이면 그릴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러면 6개월?”


“글쎄요.”
 

“그러면 1년이면 되겠습니까?”

 
다빈치는 잠시 침묵한 후 “그림 완성기간은 제게 맡겨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4년이나 걸려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도 미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4년이나 걸렸어도 완성되지 못한 그림이 ‘모나리자’입니다.


모나리자의 눈썹을 그릴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가 여행 중에 사망하여

더 이상 모델이 되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그림이 미완성이라고 해서 버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완성이라도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완성이어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기 때문입니다.

미완성이나 불완전한 것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해지지 못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을까요?

마치 예술 작품처럼 시간만 조금 더 있으면 완성될 수 있다면

인간도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따라올 수 없고,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란 말씀은,

 ‘지금은’ 베드로가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지만,

 ‘나중에는’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될 것임을 또한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못 박힌 범죄자에게

 “‘오늘’ 정녕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날

‘저승’에 내려가셨지 하늘로 아버지가 계신 천국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천국, 즉 파라다이스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도 하느님나라는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라고 정의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니 그분과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관계가 된다면

그 곳이 어느 곳이든 바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더 이상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이 곧 지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실 수 있으셨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제물을 드리러 올 때 불목한 형제가 생각나거든 먼저 제물을 두고

그 형제와 화해하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형제가 자신을 고발하여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그 곳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 또한 완전히 이웃을 사랑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가 다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이웃과 아무런 불목도 없이 완전하게 살다가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그 날 죽었다면

천국에 다다를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지옥에 가야하는 것일까요?


 밥이 제 시간이 되었는데도 설익었다고 그 밥을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미완성인 예술작품은 버려야 할까요?

하느님은 조금의 시작을 더 주셔서 그 아까운 작품들이 완성되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인간도 완전한 상태로 죽지 못하면 더 완전해지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이 연옥의 시간인 것입니다.

 

  오늘 그분과 함께 낙원에 들어갈 수는 없더라도

조금만 더 성숙하게 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연옥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주어도 도저히 작품이 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낙서가 되어 있는 것이라면 어쩔 수야 없지만

완성되어 가는 중이었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완전한 작품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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