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9월 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6. 9. 28. 09:10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복음9.51-55


<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는가? >
 독서: 욥기 3,1-3.11-17.20-23


아직 바닥을 쳐보지 않았다면


‘밀정’은 독립 운동가들을 참 많이도 잡아들여 지금으로 말하면 5급 공무원까지 올랐던 한 조선인 일본 순사 이정출(송강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실제 독립투쟁단체였던 의열단이 폭탄을 경성으로 들여오는데 도움을 주었던 조선인 일본순사 황옥 종부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을 위해서 자국민들을 잡아들였던 한 사람이 의열단과 술 몇 잔을 나누어 마시고 그들을 돕게 된다는 것이 어쩌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사람은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이 자주 바뀌는 것 같습니다. 

3·1 운동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당시 기미독립선언문을 복사하고 있었던 ‘보성사’라고 하는 곳에 조선인 출신 순사가 들이닥쳤습니다. 모두 사색이 되어 같은 조선인으로서 한 번만 눈감아 달라고 하며 지금의 가치 1억 5천만 원 정도의 돈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사는 그 돈도 받지 않고 뒤돌아 나옵니다. 물론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 자결을 하게 됩니다. 

  

저는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바로 들어주기 싫다고 하는 사람은 더 설득해보지만 미적미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더 빨리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은 잘 바뀌지 않지만 태도가 분명한 사람은 더 쉽게 바뀌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가장 웃기는 사람은 “절대로”라는 말을 쓰며 장담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절대 그러지 않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나약한 존재라 선악과 옆에 있으면 그것을 따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그 옆에서 참아내지 않고 일부러 그를 멀리합니다. 주님의 기도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 기도하지, “저희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자신했습니다. 이 “결코, 절대로”를 예수님은 깨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 번이나 당신을 배신할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아니었으면 우리는 큰일 날 뻔 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당신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욥의 입에서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라는 한탄을 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왜 나를 태어나게 했느냐며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경우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안타까워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주님께 두어야 한다고 일상적인 멘트를 날립니다. 그러나 이는 가진 자의 자만일 수도 있습니다. 욥처럼 지금 가진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잘 태어났다고 말할 자신이 있을까요? 욥은 하느님이 인정한 동방의 최고 의인입니다. 그렇지만 자녀와 재산, 명예와 건강까지 잃게 되자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삶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립니다. 이는 누구도 구원만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며 자만해 할 수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자신의 삶을 저주하였다가 지금은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직도 그런 상태까지 나빠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기 전의 욥처럼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들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방해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욥에게 하신 것처럼 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우리가 세상 것으로부터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가 되어버려 그런 것들을 잃으면 자살을 해버리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삶의 의미라 믿는다고 쉽게 자만하지 맙시다. 우리는 결단코 ‘절대로’라는 말을 쓸 수 있을 만큼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죄에 쉽게 떨어질 수 있는 우리 자신을 인식할 때 더 죄로부터 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