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태복음1.1-23
<보잘것없는 베들레헴(빵집) >
중세기 이탈리아에 기사도 정신에 충렬한 한 성주가 있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공을 세웠으면 하고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한 가지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만찬을 나눌 때 사용한 성배를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성주는 당장 많은 돈을 준비해서 말을 타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문을 나서려 할 때였습니다. 성문 앞에서 한 문둥병자 거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푼 도와주십시오.”
“무슨 소리냐? 나는 지금 우리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금잔을 찾으러가는 길이다. 냉큼 비키지 못할까!”
“성주님, 저는 며칠을 굶었습니다. 제발 한 푼만!”
성주는 마지못해 금화 한 닢을 꺼내 땅바닥에 내던지며 소리 질렀습니다.
“자, 이걸 가지고 떠나라. 나는 지금 내 인생의 큰일 때문에 너를 돌볼 겨를이 없다.”
이때부터 수 십 년 동안 성주는 예루살렘은 물론 이탈리아 구석구석을, 그리고 멀리 이집트와 사막에까지도 금잔을 찾기 위해 뒤지고 다녔으나 헛수고였습니다. 드디어 돈은 떨어지고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용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 떠나던 때와는 달리 낡은 옷에 지팡이를 짚은 쓸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성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그의 앞에 예전의 문둥병자 거지가 나타났습니다.
“한 푼 도와주십시오.”
그동안 숱하게 겪은 고생으로 이제 그의 거드름은 잦아지고 사랑이 솟아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거지에게 나누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마른 빵 한 조각 밖에는. 그는 빵의 절반을 잘라 거지한테 주었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쪽박을 들고 옹달샘으로 가서 물 한바가지를 길어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돕는 것이 변변치 못해 미안하오. 하지만 이것이 내 전부인 것을 어떡하오.”
그러자 갑자기 문둥병자 거지가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들어라. 금잔을 찾으려고 아무리 헤매어도 소용이 없다. 샘물을 길어온 그 보잘 것 없는 쪽박이 나의 성배이다. 네가 떼어준 빵이 나의 살이며 이 물이 내 피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와 더불어 나누는 식사야말로 진정한 성찬이다.”
[출처: 예화뱅크]
사람이 힘이 있고 가진 것이 많으면 그 나누어주는 것에 사랑이 실리기 어렵습니다. 부자일 때 준 금화 한 닢보다 가난할 때 준 빵 한 조각과 물 한 사발이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자동네에 부유하게 태어나셔서는 우리가 좀처럼 그분의 사랑을 깊이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나셨지만 그 가진 모든 것은 내어주는 십자가의 희생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새로 태어났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먹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애벌레가 나비로 새로 태어나서 계속 애벌레 때 먹던 잎사귀를 찾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의 음식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우리 양식이 되셨습니다. 우리 빵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 태어나셔서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 놓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짐승이고 그분이 우리 양식이 되시어 우리의 수준을 높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이 또한 ‘방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에 태어나셔야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 양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까?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그 동네의 어린 아기들이 헤로데에게 살육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낳는 모든 이들의 상징이 됩니다. 빵집은 빵을 내어주는 집입니다. 빵을 내어준다는 것은 다 내어준다는 것입니다. 태어남에는 항상 피가 함께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구유도 그렇고 베들레헴도 그렇고 성모님을 닮았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아드님을 우리 양식으로 내어주시기 위해 당신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어쩌면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하는 말을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고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라며 예수님께서 나실 곳을 예언합니다. 주님께서 태어나실 곳은 보잘 것 없어야합니다. 성모님은 당신 스스로 비천하다 하시며 주님께서 그 안에 태어나심으로써 비천한 당신의 지위를 높이셨다고 노래합니다. 스스로 높이는 이에게 주님은 태어날 수 없습니다.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처럼, 그 모델을 닮은 새 베들레헴 성모님처럼 우리 모두도 자신의 피를 흘리며 우리 안에 품고 있는 빵인 예수님을 떼어주는 작은 빵집들, 베들레험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좋아하시는 당신 집은 세상에서 힘이 빠지고 비천해져 참 비천한 이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작은 마구간과 같은 집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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