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샘물

[스크랩] 어느 95세 노인의 수기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2. 10. 23. 10:55

어느 95세 노인의 수기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실력 

을 인정받았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65세 때 당당한 

은퇴를 할 수 있었죠. 그런 내가 30년 후인 95살 생일 때 얼마 

나 후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다."라는 생각으로

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덧없고 희망이 없는 삶......

그런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습니다. 30년의 시간은 지금내 

나이 95세로 보면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나긴 시간입니다. 

만일 내가 퇴직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 

다면 난 정말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나 스스로가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생 

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95살이지만 정신이 또렷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지 모릅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날! 

'95살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위해서 입니다.'

 

 

어느 노인의 유언

 

80세를 넘겨 산 한 부자 노인이 죽었다.
그는 재산도 많아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다.
건강도 죽기 전까지 좋았고, 봉사활동도 많이 해서
사회적으로 명망도 어느 정도 받으며 살았다.
자녀도 서넛이나 두었는데,
모두들 여유 있게 살고 사회적 신분도 좋았다.


그런데, 그는 대부분의 유산을 자신의 후처에게 주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도 상당한 액수의 재산을 남겼다.
자녀들에게는 별로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녀들이 이에 반발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그렇게 유언한 노인을 비난하였다.


"늙은이가 망령이 들었지."
"후처한테 쏙 빠졌던 거야."
"젊은 마누라 마술에 걸려든 거지."
"후처로 들어갈 때부터 꾸민 계략에 걸렸어."


특히, 기르던 개한테도 막대한 돈을 준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였다.
자식들이 개만도 못하게 되었다'고
비아냥 거리기까지 하기도 하였다.


그 노인이 70세가 넘어서 아내가 죽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30대의 젊은 여자를
후처로 맞아들일 때에도 사람들은 말이 많았었다.
그때 그는 몸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옆에서 간호해 줄 만큼 병고로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었다.


"늙은이가 주책이지, 그 나이에 무슨 재취야.."
"아마 기운이 넘쳐나는가 보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젊은 여자를 맞아들여."
"막내딸보다도 더 젊어요, 글쎄."
"재취를 하더라도 분수가 있어야지.
"

그러면서, 모두들 젊은 여자가 틀림없이
재산을 노리고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부녀처럼 서로 재미있게 살았다.
그렇게 그들은 10년을 넘게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80세가 넘어 죽은 그의 유서에는
자식들에게 주는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희들은 나와 가장 가까운 나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지금까지 오래 동안
내게서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았고,
현재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물론, 가장 많은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나의 혈육들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라.
내가 괴로울 때 누가 진실로 위로해 주고,
내가 아플 때 누가 지켜보며 함께 아파했었는가?
울적할 때 마음을 풀어주고, 심심할 때면 함께
놀아준 게 누구였더냐? 너희들은 아느냐?
예쁜 꽃 한 송이가 얼마나 즐겁게 하는가를.
정겨운 노래 한 가락이 어떻게 가슴을 뛰게 하는지를.


정(情)은 외로울 때 그립고, 고마움은 어려울 때 느껴진다.
그러므로, 행복할 때의 친구보다
불행할 때의 이웃이 더욱 감사한 것이다.
병석의 노인에게는 가끔 찾는 친구보다
늘상 함께 지내는 이웃이 훨씬 더 고마운 것이다.


한창일 때의 친구들이 재롱을 피우는 귀여운 자식들이라면,
늙어서의 이웃은 내 어린 시절의 부모와 같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너희들은 친구라 할 수 있고,
너희들의 젊은 계모와 검둥이는
내게는 부모와 같은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왜 친자식인 너희들에게 보다 나의 젊은 아내와
우리 개에게 대부분의 유산을 물려주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노인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젊은 아내가 못된 계모로 살아도
내게는 가장 소중하고 고마운 분이다.
설령 유산을 노리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가 내게 잘 하는 이상
내게는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내 인생의 가장 괴롭고 힘없고
외로운 마지막 시기를 그래도 살맛이 나게 하고
위안을 받으며 살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어느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   

 

 

(지난 여름, 와이오밍 주를 횡단하는 관광버스 안에서

 여행가이드 정 선생이 들려준 어느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이다.)

 

***

 

그 부부는 어디가든 손을 붙잡고 다녔습니다.

보기만 해도 참 좋았죠.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시건만 서로 지긋지긋하게 여기지 않고

진정으로 다정다감하시니 놀라울 뿐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런 모습을 계속 접하면서

좀 지나치신 게 아닐까, 라는 느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물어봤습니다.

 

"서로 참 사랑하시나 봐요.

 두 분이 손을 항상 꼭 쥐고 다니시네요."

 

노부부가 똑 같이 "아, 예" 하시며 "허허" 웃으셨습니다.

그러시다가 남편이 입을 여셨고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손만 붙잡고 다니는 것이 아닌데요."

 

"그럼, 뭘 더 하시죠?"

 

"우리는 서로 '꼭꼭꼭', '꼭꼭'을 한답니다.”

 

"네에?"

 

"하하하, 사랑을 표시하는 거랍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자 말씀을 계속 하셨습니다.

 

"서로 손을 잡고 다니다가

 제가 엄지손가락을 이용하여

 아내의 손에다 '꼭 꼭 꼭' 하고 세 번 누르곤 합니다.

 그러면 아내도 엄지손가락을 이용하여

'꼭 꼭' 하고 제 손에다 두 번 눌러주곤 한답니다.

 아내가 먼저 제게 '꼭꼭꼭' 할 때도 있어요.

 저도 즉시 '꼭꼭' 하고 반응하죠.

 우리 둘 사이에서 '꼭꼭꼭'은 '사랑해'라는 표시이고

'꼭꼭'은 '나두'라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서로 손만 잡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주 '꼭꼭꼭', '꼭꼭'을 한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남편은 이와 같이 또 부언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부부가 '꼭꼭꼭', '꼭꼭'을 시작한 게 아니예요.

 따라 하는 거랍니다.

 이웃에 우리보다 더 나이 많으신 노부부가 살고 계셨습니다.

 마치 젊은 연인처럼 손을 꼭 붙잡고 다니셨답니다.

 한데 부인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더니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아연실색했습니다.

 이제 부인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산송장일 뿐이었습니다.

 호흡만 붙어 있을 뿐이지 말을 하나 움직이기를 하나

 죽을 날만 손꼽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그 동안 아내에게 하지 못한 일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시 아내 손을 붙잡아 주었습니다.

 또한 전에 하던 대로 엄지손가락을 펴서

'꼭 꼭 꼭' - '사 랑 해' 하고 따박따박 세 번 눌러주었습니다.

 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아내의 엄지손가락이 서서히 움직거렸습니다.

 그리고 힘겹게나마 '꼭 꼭' - '나 두' 하고 내 손등을 누르며 반응했습니다.

 아, 아내가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아내 곁에서 손을 붙잡고 계속해서 '꼭꼭꼭' 했고

 아내 역시 '꼭꼭' 하고 화답했습니다.

 게다가 아내의 손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참 기뻤습니다.

 얼마 후에는 놀랍게 아내의 의식도 돌아왔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꼭꼭꼭', '꼭꼭'이 아내를 살려낸 것이었습니다.

 다 죽어가던, 다 꺼져가던 아내의 생명의 심지에

'꼭꼭꼭', '꼭꼭' - '사랑해', '나두'가

 스파크를 계속 일으켜서 생명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게 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죽어가던 생명을 구해낸 것이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사실을 알고 나서

 우리 부부도 작정을 하고 손을 서로 붙잡고 다니면서

'꼭꼭꼭', '꼭꼭' - '사랑해','나두'를 실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말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그 남편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며 다음과 같이 권유했습니다.

 

 

"당신도 아내와 함께 해 보시겠습니까?"

 

"'꼭 꼭 꼭', '꼭 꼭'"  


 

 

 시아버지의 名 判決 

 

시골에 아들 한명을 둔 부부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 농부는 열심히 살면서 자식을 대학을 졸업시켜

대학생 며느리를 보았으며 누구 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런 행복해 보이는 이 집에 고부간 갈등이 있을 줄이야.

시어머니가 보기에 현대식 교육을 받은 며느리 하는 일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잔 소리를 자주 한다.

 

 현대 교육을 받은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처음에는

으레히 통과의례니 하고 생각했으나  점점 자주한다.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 보니 이제 만성이 되어

잔소리에 그냥 있어서는 안된다 싶어 반격의 기회를

엿보다가 어느 날 되 받아 치기를 하게 되었다.

 

 어느날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하자

"어머님, 대학도 안 나온 주제에

말도 되지 않은 잔소리는 그만 하세요"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그 말에 주눅이 들어 그 날은 그것으로

일전을 치르고 끝났으나, 그 뒤로는 시어머니 잔소리가

있는 날에는 며느리는

"대학도 안 나온 주제에 그만하세요."

라는 말로 서어미를 압박하니, 이제 시어머니 잔 소리는 커녕 

며느리에게 구박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시어머니는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혀 남편에게

하소연을 한다.

"여보, 영감! 내 말좀 들어보소! 저 며느리가

나를 대학을 안 나왔다고 너무 타박을 하니 이거 어디

억울해서 살겠어요" 하며 하소연 한다. 

 시아버지가 들으니 며느리가 대학나왔다고 시어머니를 구박을 하다니

너무나 괘심하여 며칠뒤 며느리르 조용히 불러 점잖게 한마디 한다.

"아가야, 그 동안 시집살이에 고생이 많지, 내 휴가를 줄터이니

친정에 가서 내기 오라고 할 때까지 쉬어라."

시아버지의 휴가 명에 며느리는 얼시구 하며 친정으로 갔다. 

 그런데 며느리가 친정에서 쉬는데 열흘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도 시아버지의 오라는 전화가 없어 안달이 난다.

조급증을 느낀 며느리가 시댁에 전화를 한다.

"아버님, 저를 불러 주세요." 

 
 시아버지 하는 말

"너의 시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할 때 오도록 하여라"

시아버지의 이 한다디에 며느리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며

통곡을 하며 땅을 쳤다는 이야기이다. 

 

 

 

      아버지 장례식에 오지 않은 자식들
 

 

 <금산에서 만난 어떤 할머니>

 


아는 분의 부음을 듣고 장례식에 다녀왔다.

분명 5남매라고 했었는데 두 명만 보이고 나머지 셋은 보이지 않았다.

 큰아들과 셋째, 넷째 아들은 어디를 간 것일까.

 유족이 많지 않아 장례식장은 마치 썰물 때의 바다처럼 썰렁했다.

 그분은 5남매를 두셨다.

아들 넷에 딸 하나. 그런데 두 자녀만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니

 반도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집안은 분명 남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다.

 

가까운 곳에 살면서 그분들을 살뜰하게 챙기던 이웃에게 살그머니 물었다.

"재산 때문이지."

고인은 올해 아흔이셨는데 한 때는 큰 회사를 운영하던 사장님이셨다.

그런데 은퇴를 하신 다음 당신 앞으로 된 재산의 반을 떼어 큰아들에게 주었다.

 고지식하고 봉건적인 그분의 사고방식은 큰 아들이 아닌 나머지 자식들은

상속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재산을 나눠받지 못한 자녀들은 아버지를 원망했고 큰아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셋째 아들이 창업을 한다며 손을 벌렸다.

 큰아들에게 몰아주기식으로 재산을 떼어 준 것에 앙심을 품은 셋째 아들은

날마다 아버지를  찾아다니며 괴롭혔다.

아들을 견뎌낼 수 없었던 아버지는 살고 있던 집을 판 다음, 전세집으로 옮기고

머지를 그에게 주었다.

 

그때부터였다.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받은 자녀들과 한 푼도 받지 못한 자녀들과의 반목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갈등과 반목은 살아가면서 있을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왕래를 끊었고 아예 원수가 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재산분배 2년 만에 그렇게 큰 돈을 가져간 첫째 아들이 모든 재산을

없애고 잠적해 버렸다.

 

아흔, 여든 여섯이 되신 이들 노부부는 얼마 전까지 폐지를 줍고 성당에서 지원하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생활하셨다.

이제 어머니에게 남은 돈은 18평짜리 빌라 전세금 3천만원 뿐이고 자식들은 어머니를

꽃동네나 요양시설로 옮기고 싶어한다. 그동안 가끔 집에 들러 부모를 굽어다 보던 딸도

 어머니를 모실 생각은 없다.

그날 장례식에 찾아온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남은 돈을 본인이 챙겨가겠다고

언했다.

본인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버지 장례를 치루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부조금을 챙겨가기 위해 왔던 게 아닌가 싶다.

치매기까지 있는 어머니는 남편의 장례식장에 빨간 정장 마이를 입고 나타나서 영감님이

 왜 안보이냐고 물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다.

 

'재산을 미리 주고 나면 부모에게 소홀하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꼭 틀어쥐고 있어야 한다.'

'부모 모시는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 주어야 한다'며 재산 상속에 대한 말들이 분분하다.

그런데 부모가 꼭 쥐고 있다가 세상을 떠나도 유산 때문에 다툼이 생기는 경우들이 많다.

 재산 때문에 분란이 나고 다섯 형제가 뿔뿔이 흩어진 그 가정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손녀가 나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거야
She could see me that I am the Almighty

일주일에 3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두 살 반 손녀의 Babysitter 를 합니다
집 지키며 집에서 아이 보는 사람을 Babysitter 라고 합니다 

눈에 넣어도 조금도 아프지 않는 손주들 보는 낙(joy) 
일생을 통하여 가장 귀하고 좋은
일(job)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동양의 화폭 위에  
서양의 파랑 노랑으로 살짝 비치는 색채(color)  
손주들의 그려진 얼굴 모습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다운타운에서 Seatac 공항으로 달리는 전철을 사달라고 합니다  
Boeing Field 수없이 많은 비행기를 보고 저 거 사달라고 합니다
하늘 위로 날으는 핼리콥터를 보고는 또 저 거 사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할배는 손녀가 원하는 것(toys) 무엇이든 다 사 주었습니다

요즈음 나야라가 할아버지를 무척 따른다고
어찌된 일이냐고 딸이 나에게 물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하기를


 
손주 사랑은 할아버지라고 하지만
It's the grandparent who loves the grandchildren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The only an undoubted fact that.....
"손녀가 날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거야"
"She could see me that I am the Almighty",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에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 형이다.
      새벽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 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내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 다 날아가고.뭐 땜에 비싼 돈 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확 부어 버려. 맹물 부어 줄까 그래.”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세마 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 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 되니까 붙여 놓은 것 아니냐.” 너무 큰 충격이었다.

      생각의 전환, 그렇게 나 자신을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게 있다.
      나의 은사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gift)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이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 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 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 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느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 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 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그 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 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 달라고 한다.

      아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
      그렇게 철들어진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나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나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것

      어느 날,
      고흐가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하는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사람의 가슴에는
      포장용 천으로 사용했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는데
      바로 천에 새겨진 글자 때문이었습니다.
      ‘Breakable'(잘 깨짐)
      그 문구를 보며 고흐는 자신의 무릎을 쳤습니다.
      “아하! 사람은 깨지기 쉬운 존재로구나!”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앞을 지나쳐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다시 보았는데,
      그의 등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Be Careful'(취급 주의)
      고흐는 등에 새겨진 글을 보고
      다시 한 번 무릎을 두드렸습니다.
      “맞아, 사람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거야!”
      우리 주변에서 가장 잘 깨지는 것은 유리병입니다.
      유리병은 쉽게 깨지고 한 번 깨지면 못 쓰게 됩니다.
      그리고 깨진 조각은 사람을 다치게도 합니다.
      그러나 이 유리병보다도 더 약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온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깨지고
      서운한 말 한마디에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 입은 마음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관계는 사람들의 마음이 연결될 때 형성되는 것입니다.
      관계도 마음처럼 약하기 때문에
      유리병처럼 쉽게 깨지고 상처를 입습니다.
      특별히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립니다.
      절대 깨지지 않는 관계란 없습니다.
      모든 관계는 특별한 보호를 통해 관리될 때만
      지속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는 관심과 배려에 의해 만들어지고,
      부드러운 관계는 부드러운 미소를 통해 만들어지며,
      좋은 관계는 좋은 것들이 투자되어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문제는 
      대부분 깨진 관계로 인해 생기는 것들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도, 사회적인 문제도
      관계 형성의 실패로 인해 생겨납니다.
      관계는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적당한 온도와 관심,각자의 개성에 
      어울리는 대접을 통해 성숙하게 됩니다.
      한 번 놓치면 떨어져서 깨지는 유리병처럼
      조심하지 않으면 쉬이 깨지는 것이 우리들의 관계입니다.
      ‘Breakable', 'Be Careful'
      잊지 마세요.
      마음도 관계도 잘 깨집니다!
      조심하세요!
      
      찰리 페독의 꿈의 사다리 

      찰리 패독이라는 유명한 육상 선수가

      제시 오웬즈의 어린 시절에 제시의 학교에 찾아와

      어린이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니?
      목표를 정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실 거라고 믿어 봐라." 

       

      연설이 끝나자,

      제시는 그의  영웅 찰리 패독에게 감동된 채로

       그의 스포츠 코치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코치님, 나는 꿈을 가졌어요!"
      스포츠 코치는 바짝 여윈 어린 흑인 소년 제시를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너의 꿈이 뭐니?"  

       "나는 살아 있는 가장 빠른 사람인 찰리 패독처럼 되고 싶어요."
      "제시야, 꿈을 가지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너는 꿈에다 사다리를  놓아야 해.

       

      사다리의

      첫 번째 단은 인내이며,
      두 번째 단은 헌신이고,

       세 번째 단은 훈련이며, 
       네 번째 단은 태도란다."

       

      그 후 자신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고
      꿈의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은 제시는 
      마침내 100미터와 200미터 경주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되었으며

      올림픽 경기에서 네 개의 금메달을 땄고,

       

      그의 이름은 '미국 체육의 명예의 전당'에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제시가 꿈을 가지고 있었고 성공으로 가는 사다리에

      기꺼이 올라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故 박 정희 대통령의 뇌물

      (맥도널드 더글라스社 중역의 증언)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 되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 자동소총" 이었다.

      한국이 사용하는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 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수 있었던 M-16의 제조 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社 였다.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 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社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는(맥도날드 더글라스社의 중역) 대통령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 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 진 서류 더미 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책상 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 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더운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 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이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러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 사에서 온 데이빗 심슨 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 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 것은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 하나면 바랄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 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 동안 에어컨을 트는 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 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 .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 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방문 목적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 ."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 정희 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 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 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거요?" "각하, 맞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 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 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 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 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 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 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데 사용할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 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 나는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 . 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 번 둘러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보였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 당시 더글라스 맥도날드사의 중역 / 데이빗 심슨 올림 =

       

      50년전, 朴正熙 - 李秉喆의 위대한 만남

       
      작년은 삼성(三星)그룹 창립자
      이병철(李秉喆)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삼성전자는 작년 매출액이 1300억 달러를 넘어
      세계 22위의 회사가 되었다.
       이런 거대한 발전의 배경에는
      이병철(李秉喆)과 박정희(朴正熙)의 역사적 만남이 있었다.
       이는 한국의 진로(進路)를 바꾼 역사적 만남이었다.
       
        삼성물산 사장 이병철(李秉喆)은 회고록에
      1961년 6월27일 군사정부의 실력자
      박정희(朴正熙) 부의장과 나눈 대화를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는 부정 축재자 11명의 처벌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부정 축재 제1호로 지목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 것인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박(朴) 부의장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 주십시오”라고 재촉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소신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朴 부의장은 뜻밖인 듯 일순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세를 했다고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러나 현행 세법은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戰時(전시) 비상사태하의 稅制(세제) 그대로입니다.
      이런 세법하에서 세율 그대로 세금을 납부한 기업은
      아마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만일 도산을 모면한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朴 부의장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액수로 보아 1위에서 11위 안에 드는 사람만이
      지금 부정 축재자로 구속되어 있지만
       12위 이하의 기업인도 수천, 수만 명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도 똑같은 조건하에서 기업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들도 모두 11위 이내로 들려고 했으나 역량이나 노력이 부족했거나
      혹은 기회가 없어서 11위 이내로 들지 못했을 뿐이고
      결코 사양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선을 그어서 죄(罪)의 유무를 가려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사업가라면
      누구나 이윤을 올려 기업을 확장해 나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업을 잘 운영하여 그것을 키워 온 사람은
      부정 축재자로 처벌 대상이 되고
       원조금이나 은행 융자를 배정받아서
      그것을 낭비한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한다면
       기업의 자유경쟁이라는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부정 축재자 처벌에 어떠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朴 부의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 생계(生計)를 보장해 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 운용, 국민 교육, 도로 항만 시설 등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부정 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 위축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장 稅收(세수)가 줄어 국가 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 건설의 일익(一翼)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압니다.”
       
        朴 부의장은 한동안 내 말을 감동 깊게 듣는 것 같았으나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국가의 大本(대본)에 필요하다면
      국민(國民)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동안 실내는 침묵에 빠졌다.
      잠시 후 미소를 띤 朴 부의장은
      다시 한 번 만날 기회를 줄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거처를 물었다.
      메트로 호텔에서 연금 상태에 있다고 했더니 자못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튿날 아침 이병희 서울분실장이 찾아오더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다른 경제인들도 전원 석방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부정 축재자 1호인 나만 호텔에 있다가 먼저 나가면
      후일에 그 동지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나도 그들과 함께 나가겠다”고 거절했다>(《호암자전》)
       
        박정희(朴正熙)는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李錫濟)를 불렀다.
        “경제인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정신 차렸을 텐데 풀어주지.”
        “안 됩니다. 아직 정신 못 차렸습니다.”
       
        “이 사람아, 이제부터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면
       국민을 배불리 먹여 살려야 될 것 아닌가.
      우리가 以北만도 못한 경제력을 가지고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래도 드럼통 두드려서 다른 거라도 만들어 본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아닌가.
      그만치 정신 차리게 했으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국가의 경제 부흥에 그 사람들이 일 좀 하도록 써먹자.”
       
        이석제는 朴 부의장의 이 말에 반론을 펼 수 없었다.
       다음날 이석제는 최고회의 회의실에 석방된 기업인들을 모아 놓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차고 있던 큼지막한 리볼버 권총을 뽑아들더니
       책상 위에 꽝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고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여러분들을 석방시키는 일에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朴 부의장께서 내놓으라고 하니 내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원조 물자, 국가 예산으로 또 다시 장난치면
       내 다음 세대, 내 후배 군인들 중에서
      나 같은 놈들이 나와서 다 쏴죽일 겁니다.”
       
        6월 29일 아침 이병철(李秉喆) 사장이 묵고 있던 메트로호텔을 찾아온
      이병희 정보부 분실장은 기업인들이 전원 석방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병철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박정희의 유연한 정신세계와 겸손한 자세,
       그리고 사심(私心)이 적은 태도가
      그로 하여금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우게 했다.
       실천력을 중시하는 박정희는
      이론에 치우치는 학자나 신중한 관료들보다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기업인들과 더 잘 호흡이 맞게 된다.
       
       전경련 상근부회장을 지낸 적이 있는 김입삼(金立三)은
      1961년 6월 하순에 있었던 박 의장과 기업인들의 만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한국경제신문 연재 《김입삼 회고록》).
       
        <박정희 부의장은 유원식 최고위원을 통해서
      金容完(김용완) 경성방직 사장(뒤에 전경련 회장),
       全澤珤(전택보) 천우사 사장, 鄭寅旭(정인욱) 강원산업 사장을
      최고회의로 불렀다.
       
        “경제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견(高見)을 듣기 위해서 뵙자고 한 것입니다.
      순서 없이 평소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씀 해주시지요.”
       
        정중하고 공손한 말투였다.
      전택보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1947년에 홍콩에 갔을 때 목격한 일입니다.
      모택동 군에 쫓겨 홍수처럼 밀려온 피란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물까지 수입해서 마시는 홍콩에서 수백 만의 피란민들이
      직장을 갖고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그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바로 ‘保稅(보세)가공’을 해서 먹고살고 있더군요.
      홍콩에 비교해서 우리 여건은 유리하다고 봅니다.” >
       
        전택보가 실감 있게 설명해가도
      박정희는 확실한 감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보세(保稅)가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박정희는 “미안하지만 내일 또 시간을 낼 테니
      다시 오셔서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에도 경제 강의 같은 기업인들의 설명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김용완 사장은 “대학이 너무 많다. 4년제 대학의 반은
      기술 전문대학으로 개편하여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김 사장은 또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된 기업인들을 풀어주십시오.
       기업인이란 개미처럼 죽을 때까지 일할 운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일할 수 있는 기업인을 양성하는 데는 20~30년이 걸립니다”라고 했다.
       
        정인욱 사장은 “우리나라에선 지하 30m 이하의 심층에는
      어떤 광물이 있는지 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를 탐사하여 실업자에게 일터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경제정책에 목말라하고 있던 박정희는
      이런 충고를 너무나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여
      기업인들은 오히려 긴장감을 느낄 정도였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이병철 등 기업인의 만남은
      조국 근대화를 꿈꾸던 한 혁명가가
      기업인들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가난한 농민 출신이고 질박(質朴)한 생활이 몸에 밴 박정희는
       부자(富者)들에 대해서는 생래적인 거부감을 가졌으나
      그의 실용적이고 유연한 사고는 그런 기업인들을 부려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그러나 대기업이 대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권력에 도전한다든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드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의 정경유착은 국가가 철저히 대기업을 통제하여
       국가의 방향대로 몰고 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후대의 정경유착과 성격이 다르다. 

       

      인요한의 북한 방문기

       

      개성에서 평양으로 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

      안내원이 “남조선이 우리보다 좀 앞선 것을 얘기해보라우!”
      그러더라고요, .
      ‘좋다. 무엇이든 물어봐라, 다 이야기해주마.’
      이런 심정을 가지고 이 사람한테 40분을 강의를 했어요.

      “첫째, 우리가 잘사는 까닭은 박정희 때문이다.
      박정희 다음은 당신 정주영 알지 않느냐?
      정주영만 있는 게 아니었고 거기 이병철도 있었다.
      박태준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박정희로부터 특명을 받고 특혜를 받고 엄청난 공장들을 세우고 국가를 발전시켰다.

      나는 전라도에서 컸기 때문에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너무 너무 너무 잘 몰랐다.
      박정희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중국이 오늘날 잘살게 된 것도 박정희를 공부했기 때문에 저렇게 잘산다.
      중국도, 싱가포르 이광요도 박정희사상을 배운 사람들이다.
      박정희는 위대한 사람이다.

      “뭐 인권문제 가지고 따지는 사람이 있는데 기본 생계가 보장되어야 인권도 논할 수 있는 거다.
      남조선에서 보릿고개를 없애 준 사람, 그게 박정희다.”

      “두 번째, 잘살게 된 까닭은 남쪽에 있는 근로자들 때문이다.
      구로공단에서 16시간씩 일했다..잘 살려면 돈을 모아야 된다. ..
      그래서 돈을 모으기 위해서 16시간씩 공장을 돌리고 심지어 여자들이 머리카락까지 팔았다.
      뼈를 깎는 아픔을 겪었다.”

      “세 번째, 남조선이 잘사는 이유는 한국의 여성들 때문이다.
      근면·절약정신.
      당신 한국여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아냐?”
      그건 공감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여자들이 근면·절약 정신교육.
      이런 걸 우선시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

      “세 번째 여자들!
      우리 어머님들 때문에 잘산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이 양반이 뭐 좀 시큰둥해요.
      “줄 잘 섰디 뭐?”
      갑자기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거 무슨 얘기요?”했더니 “남조선 아이들은 미국 뒤에 줄섰고,
      우리는 소비에트 러시아 뒤에 줄 서가지고 이렇게 돼버렸다. ”
      중국 얘기는 하지도 안합디다. 그래서 내가 그 보고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 필리핀은 미국 뒤에 백 년 전에 줄을 섰는데 왜 이렇게 못살죠?” (웃음)

      한국 사람들에게 아부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말합니다.
      미국에 이민가면 한국 사람들이 1년이면 80% 이상이 새 차를 사요.
      5년이면 80% 이상이 새 집을 마련해요.
      미국 사람들은 30년이 돼도 그걸 못해요.
      대단한 일입니다.

      "제가.. 좋은 얘기 많이 했죠? 나쁜 얘기 좀 해도 되겠죠?"
      지금 한국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 좌와 우, 모든 사람들이 소모를 하고 있어요.
      성숙하면 타협을 해야 돼요...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돼요.

      "링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보다 백 배 더 독재했습니다.
      신문사 300개 문 닫았어요.
      주의회를 재판도 안하고 연금을 시켰어요.
      대법원장 불러 가지고 “당신 까불면 감옥에 넣어 버리겠다!” 했어요.
      남북이 나눠지고 전쟁이 날 것 같으니까 링컨조차도 그런 극단의 처방을 냈어요.
      미국 사람들은 사람의 업적을 평가할 때 '시대성'을 감안한 평가를 하는데,
       대한민국은 당시의 '시대성'은 배제하고서 오늘의 잣대로 옛날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박정희 대통령은 기념관이 없어요.
      이거 바뀌어야 됩니다.
      미국사람들은 링컨이 잘못한 부분은 땅속에 묻어버렸어요.
      미국 방문해 보셨죠?
      워싱턴 링컨기념관에 가보면 링컨이 예수님 다음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되어 있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 업적을 냈을 때, 이순신장군 어떻게 했어요? 
      왕이 감옥에 넣어 버렸어요.
      그렇죠? 사촌이 땅을 사면 유태인들은 잔치를 벌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세력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에 배 아프기는 커녕 잔치를 벌여야 될 일이에요.
      남 잘 된 것을 축복해 주고 축하해 주고 그런 문화로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세브란스에서 공부 잘 못하고 해서 꼴등하다시피 했는데
      미국에 가서는 세브란스에서 교육받은 덕분에 제가 중간이 아니라 우수한 쪽에 들어갔어요.
      그게 세브란스 교육이에요.
      나가서 힘을 겨뤄보니 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

      박정희 어른이 기초를 닦은 대한민국의 희망을 얘기하겠습니다..

      첫째 희망은 조선사업 입니다.
      LNG선을 영하70도,
      그 액체 LNG를 보관할 수 있는 조선소 기술이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최고입니다.
      1 위예요.
      특허가 있어서 흉내도 못 내요.
      극비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포항제철에서 박태준의 후배들이 지금 철을 만들어내는데
      전 세계적으로 거치는 코크스(Cokes)라는 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철을 만듭니다.
      아무리 철 값이 떨어져도 생산능력 있고 수익이 남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IT산업. 전 세계에서 고속인터넷이 제일 완벽하게 깔린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게 제 마지막 비판이자 칭찬입니다.
      삼성전자가 지난 5년 동안에 소니(Sony)를 앞섰는데 최대 10년을 앞섰답니다.
      삼성, 대단한 기업입니다. 누가 만들었죠?
      기아자동차가 미국의 최악 불황일 때 최악의 지난 1년 동안 미국자동차 시장점유율을 6% 올렸습니다.
      어마어마한 일입니다.얘기가 너무 길어지면 재미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여러분한테 이북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전쟁 전에는 평양이 서울보다 더 잘 살았다고 그래요.전기도 남아돌아가고….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는지….
      김일성이 이렇게 나왔어요. “머슴과 지주를 없애겠다.” 
      그 사회는 머슴과 지주가 당원하고 인민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97%가 소위 인민입니다.
      3%가 소위 그 사람들이 없애겠다는 지주 쪽에 들어갑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통일이 아쉬운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산가족! 지금 나이들이 많아요. 이산가족들이 그 유일한 인맥이에요....

      여러분 우리 집사람이 중국으로 북한의사들을 데리고 나와서 교육을 시켰어요.
      최고 3일 정도 교육받다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이런 것 가르치지 마세요.
      우리는 마취할 시약도 없는데 이런 것 배워 봐야 머리만 아픕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28개의 뇌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깜짝 놀랐답니다.

      무슨 뇌물이 필요하냐?고...

      뭘 요구했을 것 같아요?
      돈? 선물? 유에스비(USB:컴퓨터 이동식 저장장치)입니다.
      남조선 사극을 좀 담아 달라.
      최대한 가능하다면 지난 것까지도 담아 달라.
      최신 것. ,
      “이거 가지고 가다가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총살 아니냐?” 그랬더니 “아~ 일 없습니다.
      이거 가지고 가서 지우고 들어가서 파일을 복구시키면 돼요.”..!

      그러니까 세관 통과할 때 누가 보면 없는 걸로 되어 있고….
      그래가지고 거기에 있는 고관들한테 최고 인기선물입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 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2003년도 쯤 되는데…무쏘車를 사서 1년 반 만에 폐차를 시켰어요. ..
      비포장도로 마천령 고개를 넘고… 함경남도, 북도 사이에 일제시대 때 길이 그대로예요.
      변한 것 하나도 없어요.
      이북호텔은 평양을 떠나면 정말 지내기가 힘듭니다. ., ‘청진 관광 려관’에 도착을 했어요. .
      “우리는 남의 돈을 모금해 가지고 오니까 제일 싼 방 주세요.”
      그러면 그 쪽 얘기는 항상 똑같아요.
       “3등실 돈 가지고 일등실에서 주무세요.”
      호텔 선임이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위대한 장군님이 주무셨던 방에 가서 자라.”
      그래서 . 호기심에 갔더니 몇월 며칠 위대한 장군님이 거기서 주무셨답니다.

      다음 목욕을 하고 싶어요.
      비포장도로로만 열 몇 시간을 달렸으니 머리에다가 흙을 한 삽 올려놓은 것 같아요.
      그래서 프런트에 가서 “나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더운 물…” 말하니까 “우리 십 분씩 쏴주겠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래서 호텔방에 올라와서 7시5분 전부터 옷 다 벗고 목욕탕 앞에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세 가지 장비가 필요해요. 바케쓰가 하나 있어야 돼요.
      그걸 목욕탕 속에 잘 빠트려야 돼요.
      사회주의 국가는요, 목욕통 청소를 안 해요.
      밑에 진흙이 좀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찬물을 받아놓고, 그거는 화장실용 물이거든요.
      그 다음에 세숫대야 하나 놓고 바가지 갖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영락없이 딱 정각이 되면 물이 나와요.
      ‘퀄퀄퀄퀄’하고 물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걸 또 빨리 받아내야 합니다.

      왜? 녹물이에요. 관이 오래됐거든요.
      그 다음에 더운물 갖고 목욕을 시작했을때 여러분은 거짓말 같으실 텐데요.
      거짓말 아닙니다.
      갑자기 세상이 새까만 거예요. 정전이 된 겁니다.
      온 호텔방을 기어 다니며 배낭 속에 플래시를 찾는데 한 3분 걸렸어요.
      찾아가지고 왔는데 처음에 3분 보냈죠,
      찾는데 3분 보냈죠, 그
      래서 한 3분밖에 안 남았어요.
      소중한 이 국가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귀국해서 나중에 연희동 공중목욕탕에 갔는데 아주 불이 훤하더라고요.
      갑자기 청진 생각이 나는 거예요.
      찬물도 퀄퀄 나오고 더운물도 퀄퀄 나오고….
      제가 벽을 보고 혼자서 울기 시작했어요.
      너무 너무 고마워서, .. 마음껏 목욕하는 거 한 번도 고맙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냥 눈물이 나는 거예요.
      아버지 장례식 때도 안 울었어요.…. .
      그런데 그것보다 더 소중한 메시지는 박정희 대통령이 깔아놓은 바탕에 대단한 국가를 세우고,
       우리가 가진 것이 엄청 많아요.우리는 다 재벌 같이 삽니다.
        자기차 운전 할 수 있는 것, 여행갈 수 있는 것,여름에는 다 에어컨 켜고 지내는 것...

      여러분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이 국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 나라를 우리가 잘 지켜나가야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 
       

      一.말 ()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나온다
      양 귀로 많이 들으며 입은 세 번 생각하고 열라.


      二.책 (讀書)
      수입의 1%를 책을 사는데 투자하라
      옷이 헤어지면 입을 수 없어 버리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위대한 진가를 품고 있다.


      三.노점상 (露店商)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말라
      그냥 돈을 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

      부르는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이다.


      四.웃음 (笑)
      웃는 연습을 생활화 하라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며.치료약이며,노인을 젊게하고,
      젊은이를 동자(童子)로 만든다.


      五.TV (바보상자)
      텔레비전과 많은 시간 동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지만 텔레비전에
      취하면 모든게 마비 된 바보가 된다.


      六.성냄 (禍)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다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


      七.기도 (祈禱)
      기도는 녹슨 쇳덩이도 녹이며
      천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줄기 빛이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기도는 자성을 찾게하며
      만생을 요익하게 하는 묘약이다.


      八.이웃 (隣)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거울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할 때,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 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히 되돌아 봐야 한다.


      九.사랑 (慈愛)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칠십년 걸렸다".

      '짝퉁 명장'을 위한 변명

       

       

      "내 것도 명품인데, 22년 가죽만 만진 놈의 땀이 스민 명품인데···. 상표가 없다고 홀대받는 게 너무 억울했어요."

      루이비통 등 명품 가방의 '특A급' 짝퉁을 만들다 지난 19일 경찰에 입건돼 조사를 받은 박모(46)씨는 "피의자가 아닌 가죽 기술자로 불러달라"고 요구할 만큼 자존심이 강했다. 그러나 조사를 받으면서 여러 차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 김성민 사회부 기자


      박씨는 24살 때부터 공장 종업원으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가죽 만지는 법을 익혔다. 10년쯤 열 손가락에 모두 굳은살이 박힌 뒤 조그만 공장을 차렸다. 국내 유명 가죽 가방 브랜드의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방식)을 했다. 그러나 마진이 얼마 되지 않았고, 결국 2008년 공장 문을 닫았다. 다시 종업원으로 일을 시작한 박씨는 2009년 짝퉁 명품가방 판매총책 정모(43)씨를 만나면서 기술자의 자존심을 버리게 됐다. 그는 "내 신세가 서글프다"면서 펑펑 울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박씨가 만든 짝퉁은 실제와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 '특A급'이다. 그만큼 기술이 좋다. 영국 버버리가 지난 2009년 국내에서 짝퉁을 단속하다가 진품과 구분을 못해 영국 본사로 보내 확인했을 정도로 한국 기술자들의 기술만큼은 뛰어나다.

      입장 통제… 줄 세우는 명품 매장 - 21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의 한 명품 매장에 고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최근 대부분 명품 매장들은 내부가 붐비지 않도록 출입자 수를 통제하기 때문에 고객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그러나 한국에선 기술과 품질만으론 승부할 수 없다. '명품의 상표'를 숭배하는 소비자들이 외면하는 탓이다. 게다가 값싼 중국산에 밀려 사면초가에 처한 제조업자들이 부지기수다. 이들이 짝퉁 장인으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짝퉁은 엄연한 불법이다. 판로가 없다는 핑계로 해외 명품의 상표권을 침해하면 장기적으로 국가 이미지에도 손해를 끼친다. 이들의 뛰어난 기술력을 살리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 브랜드로 만들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을 위한 정부 지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프랑스의 '가죽 장인·바느질 전문학교'나 스위스의 '시계 전문학교'처럼 국가 지원으로 기술자들이 안정적인 기반을 찾도록 하고, 브랜드를 육성하는 정책 도입이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박씨처럼 뛰어난 장인들이 계속 짝퉁을 만드는 범죄자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미 한참 늦었는지도 모른다.

       

      날아다니는 갈매기와 죽은 갈매기

       

      미국 남서부의 해안가에 위치한 항구 도시에서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다.

       

      갑자기 그 항구의 갈매기들이

      떼지어 죽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다의 물고기를 이용, 통조림 가공 사업에 종사하던

       시민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청정지역임을 내세워 광고를 해왔는데

      만약 그 갈매기들이 오염된 물고기를 먹고 죽었다면

      통조림의 판로는 막히기 때문이다.  

       

      통조림 사업의 파산을 막기 위해 시에서는 학자들로 이루어진

      조사단을 구성하여 원인 파악에 나섰다.

       

      조사단은 갈매기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다양한 조사를 벌였지만

       근본원인을 밝혀내는데 실패했다.

      다만 죽음의 원인이

      굶주림 때문이라는 사실만을 밝혀냈다.  

       

      바다의 오염과는 무관하고

      생태계의 알 수 없는 영향으로

      갈매기가 죽었다는 추측만을 남기고 조사는 끝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떼죽음을 당하는 갈매기들이 늘어나자

      한 동물학자가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갈매기들의 죽은 이유가 굶주림이었다는 점을

      중시하고 주변 환경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물고기를 가공할 때 머리,

      꼬리 등 부산물을 바다에 버렸지만

      소득 증대를 위해 머리와 꼬리를

      가축용 사료로 가공하기 시작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임을 밝혀냈다.  

       

      그 항구 도시의 갈매기들은

      그 동안 바다에 버려지는 물고기 부산물이

      풍부하였기에 스스로 먹이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부산물이 더 이상 바다에 버려지지 않게 되자

       갈매기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한 부류는 예전의 야성을 회복하여 물고기 잡이에 나섰고,

      다른 한 부류는 굶어 죽을 때까지 버려지는

      물고기의 부산물을 기다렸던 것이다. 

       

      같은 조건에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한 갈매기들은

       생존하였지만

      공짜만 기다리던 갈매기는

      굶어죽고 말았던 것이다.

       

      무상복지로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이나 국민들이

      알아두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값진 아내

       

      어느 날,

      IMF 때 실직해 매사에 자신감을 잃은 한 남편이 산에 갈 때

      출근하는 아내가 봉투를 손에 쥐어줬습니다.

      산에서 봉투를 펴자 돈 3만원과 편지가 있었습니다.


      “여보! 직장을 잃고 돈이 없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당신 있는곳에 나도 있고, 당신 가는 곳에 나도 갈 테니까 실망 마세요.
      당신은 잘 몰라도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것만도 나는 행복해요.

      진작 말을 못해 미안하지만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당신의 아내.” 

      아내의 인정과 격려는

      남편이 이루려는 꿈 성취의 촉매제입니다.

      아브라함의 성공에는 아내 사라의 역할이 컸습니다.
      사라는 국경을 넘나드는 이사를 수없이 했지만 불평 없이

      ‘내일’을 향해 과감히 떠나는 남편의 꿈과 비전을 이해해주고 따랐습니다.

      만약 이사 때마다 사라가 투덜댔다면

      아브라함은 큰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 곁에는 대개 묵묵히 따라주고 격려해주는 아내가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존재입니다.

      아내의 최대 일은 남편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입니다.
      타인의 무시는 무시할 수 있지만 아내의 무시는 무시무시합니다.

      아내의 진짜 가치는 남편의 격려자가 되는 것에 있습니다.

       

      얼마 전 유행한 ‘간 큰 남자 시리즈’입니다.

      20.대에는 아내에게 “밥 줘!”하면 간 큰 남자이고

      30.대에는 아내가 외출할 때 “어디 가?”하면 간 큰 남자입니다.
      40.대에는 외출하는 아내를 쳐다만 봐도 간 큰 남자이고,

       50.대에는 “몇 시에 와?”하고 오는 시간만 물어도 간 큰 남자이고,

      60.대 이상은 “여보! 따라가도 돼?”하면 간 큰 남자입니다.

       

      남자의 힘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

      남편은 아내의 인정에 굶주려 있습니다.
      ‘고개 숙인 남편’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고개 숙인 남편’은 ‘실종된 아버지’로 발전합니다.

      아버지가 실종되면 자녀도 실종되고 아버지를 찾으면 자녀도 찾습니다
      탕자 어거스틴이 성자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주님 모시듯 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잊지 못합니다.

      ”남편을 의식적으로 격려하고 존중하고 인정해주십시오.

      남편은 아내가 인정만 해주면 만사가 좋습니다.

      온 세상이 인정해도 아내의 인정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영적 굶주림을 아내가 채워주면

      남편들은 대개 최선을 다합니다.
      조금만 받아도 누구보다 더 감동하고 감사하며 남편을 후원하십시오.

       바보 온달도 그를 격려했던 평강공주로 인해 위대한 장군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바보처럼 느껴질 때는 남편도 스스로 그렇게 느낄 때입니다.

       

       

      그때 남편에 대한 책임을 새롭게 느끼고

      “잘했어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나도 함께 할게요!
      사랑해요!”라고 남편을 힘써 격려하고, 은밀한 곳에서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는 누구보다 값진 아내입니다

       

      친구란......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남자에게 꼭 필요한
      다섯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마누라요, 

      둘째는 아내이며, 

          셋째는 애들 엄마이고 
       넷째는 집사람이며,

                         다섯째는 와이프라는 얘기가있다.

      이는 배우자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 이겠지만 나이가 들면 필요한 것으로
       건강, 친구, 돈, 일, 배우자를 꼽는데 이의가 없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나는 흉금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와,  
       적당한 일거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와 건강이 허용되어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와 소일거리가 없다면 사는게 무미해진다.


      친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친구들은
      학창시절에 이루어지는데, 학창시절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많아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하나 둘 멀어져
      중년이되면 얼마 남지 않는다.


      사회 생활을하며 이루어진 친구들은 그 때 뿐으로
      이직을 하고 나면, 평생 친구로 남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다.

      특정한 목적으로 많은 인맥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순수성이 결여되어, 이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어린시절의 친구들이야 말로,

      가장 늦게까지 소중하게 남는 것이다.



      계속해서 친구와 친구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떤 인연으로 이루어졌던, 우선 자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날 가까운 친구였다 하여도, 이민을 갔다든가 하는등의
      이유로, 오랜 기간 만나지 못하면, 자연히 멀어지게 마련이며
      그런 친구는 아무리 많아도 나의 노년에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사람은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어야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공감할 수 있어 자연히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주고 받을 줄 알아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 하여도, 물질적이던 정신적이던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때, 원활한 관계가 지속된다고 본다.



      한 사람의 삶이 성공적 이었는지를 알려면, 그의 진정한
      친구가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를 보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나의 친구들은, 나를 어떤 유형의 친구로 분류할까
      생각하니 그저 부끄럽다는 생각만 든다.  

      아무래도 내가 지난 삶을 잘 살았다고
       
      자신있게 말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내가 친구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변함없는 노력을 지금 보다 더 많이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젊었을 때도 그렇지만 특히 노년에는, 내가 어떤 사람과
      어울리느냐에 따라, 내 나머지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노년을 함께 보내려면 과연 어떤 친구가 좋을까 생각해 보자.

      첫째,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성격이 낙천적인 친구면 좋겠다.
      노년이 되면 고독이나 우울증에 빠지기 쉬우니, 긍정적인
      친구와 어울려야, 밝고 명랑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취미가 같거나 취미가 다양한 친구다.
      노년에는 취미활동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서로의 취미가 같아야 자주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주 어울리게되면 그만큼 공유하는 것도 많아질것이다.

      셋째, 언제든지 전화하거나 만날 수 있는 친구이다.
      고민이 생겼을때 전화하여 마음을 털어 놓거나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정신적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마음이 편안해 지기 때문이다.

      넷째, 정이 많고 잔잔한 재주가 있는 친구이다.
      우리 나이가 칠십이되고 팔십이 되었을때 자녀나
      손주에게서 최신 유행하는 핸드폰을 선물 받았는데,
      새로생긴 이성 친구에게 쪽지나 사진, 문자를 보낼수있는
      잔 재주가 있는 친구가 있으면 창피 당하지 않고 쉽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어쩌다 나를 모질게 떠나 간다 해도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된다.

      그 친구가 내 곁에 머무는 동안 내게 주었던 우정과
      기쁨으로 내게 준 즐거움과 든든한 마음으로 그냥 좋은
      기억을 갖기만 하면 된다.

      진정한 우정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워지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가깝다고 느껴져야 한다.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되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서로 마음을 맡기며
      서로에게 마음의 의지가 되는 참 좋은 친구
      내가 아플때나 외로울때, 내가 힘들거나 어려울때
      정말 좋지 않은 일들이 있고, 견디기 힘든 환경에 처할수록
      우정이 더 돈독해지는 친구, 그런 친구가 있다면 참 좋겠다.

      나 또한 나의 친구들에게 그런 친구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면 많은 노력을 기우려야될 것 같다...

        비단 방석과 부들 방석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난 사건을 우리는 '인조반정'이라고 부릅니다.

      이시백(李時白)은 인목 대비를 도와 인조반정의 주역을 맡았던,

      이귀(李貴)의 아들입니다.

       

      인조 반정 당시 그는 아직 젊은 청년이었으나, 아버지를 도와 반정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니, 효종 때에는 벼슬이 영의정 까지 올라갔습니다.

       

       

      그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집에는 아주 진귀한 화초가 한 그루 있었는데,그 소문이 궁궐 안에까지 퍼졌습니다.

      하루는 소문을 들은 효종 임금이 그 화초를 보기 위해 이시백의 집을 방문하고 싶어했습니다.

       

      "대감, 상감마마께서 대감의 정원에 있는 진귀한 화초를 보시려고 여기에 납신다고 합니다."

       

       

      집에서 그 소식을 들은 이시백은 순식간에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그리고는,곧바로 정원으로 달려가서 그 꽃 나무를 뿌리 째 뽑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한시 바삐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이때에,

      상감께서는 어찌 한가롭게 한갓 화초 따위에 마음을 두신단 말인가?"

       

      이시백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로 탄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라의 앞일만을 걱정하던 이시백

      누구보다도 검소한 생활을 하여,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일반 백성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시백은 높은 자리에 있을 때일수록 자기 본분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고,

      부귀 영화에 눈이 어두어짐을 경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활은 영의정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검소 하였습니다.

       

       

      먹는 것은 물론, 집안에서 사용하는 침구며 가구들도 일반 백성들이 쓰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흔한 비단 방석 하나 없이 늘 부들 방석을 깔았습니다. [부들=수초의 일종]

       

                                     

       

      이런 생활을 딱하게 여겨 오던 그의 부인이, 하루는 비단 방석을 만들어 내놓았습니다.

       

       

      "오늘부터 대감께서도 그 부들 방석 대신 이것을 깔도록 하세요.

      지체 있으신 분께서 늘 부들 방석에 앉으신 것을 뵈니, 민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이시백은 부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전에 깔던 부들 방석을 자기가 깔고, 부인을 비단 방석에 앉혔습니다.

       

      "부인 나에겐 이 부들 방석이 더 편하다오.

      보잘 것 없는 내가 귀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도 늘 두렵게 생각하여

       허물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 쓰거늘 사치까지 해서야 되겠소?"

       

       

      이 말 한 마디는 그가 얼마나 청렴 결백한 사람 이었는 지를 짐작 하게 해줍니다.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일수록 사사로운 욕심을 갖지 않도록 할 것이며,

      집안에 있을 때도 늘 검소하고 부지런한 생활을 해야 함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이시백처럼 몸소 행한 사람은 우리 역사에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爲政之要 는 曰公與淸 이요,

      成家之道 는 曰儉與勤 이니라.

       

       

      나라를 다스리는데 중요한 점은 공정하고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것이요,

      집안을 일으키는 길은 검소함과 부지런함이다.


       

       

       戰爭과 사람


      종종 11월이면 평안남도 양덕군에 있는 중공군 묘지를

      백발의 중국여인이 찾아오고는 하는데,

      이 여인이 북한을 방문하면 북한정권에서 직접 안내하며 예를 갖추기 바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유송림(劉松林) 또는 유사제(劉思齊)라고도 불리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첫째 며느리입니다.

      비록 현재 중국정부의 요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북한에서 이 여인에 대해 신경을 써야할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남편의 묘소를 참배하는 유송림]


      왜냐하면 유송림의 남편인 마오안닝(毛岸榮)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여 그곳에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정권을 획득하고 죽을 때까지 철권 통치자로 중국을 지배하였던 마오쩌둥의 첫째 아들은

       사실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일부자료에는 자원해서 참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의 지시로 그는 전쟁터로 나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마오안닝의 묘]


      우리입장에서야 10월 25일 등장한 중공군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중공군의 참전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만약을 대비하여

       18개 사단으로 구성된 25만의 동북 변방군을 만주일대에 배치해 두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중순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여러 외교 채널을 통해 6·25전쟁에 개입할 것을 공공연히 천명하고는 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참전 이면에는 커다란 갈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태도를 평가절하 하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대일본 전쟁 및 국공내전을 간신히 끝내고

       국가를 건국한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신생국이었으며

      오히려 대만문제, 만주문제, 티베트문제 등 산적한 문제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중국이 6·25전쟁보다 더욱 심각하게 느끼고 있던 난제들이었습니다.


      [중국은 신생국이어서 국내에 산적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때 스탈린이 참전을 권유하는 전문을 보내왔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소련의 적극 개입으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마오는 중국이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면

      스탈린이 적어도 공군을 참전하여 줄 것으로 예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0월 12일, 소련의 지원이 불가함을 통보 받은 마오는

      만주에서 출병 준비를 하고 있던 펑떠화이(彭德懷)를 소환해 참전 여부를 재검토하였습니다.


      [결국 마오쩌둥의 결단으로 참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린바오(林彪)나 까오강(高岡) 등 권력 실세 대부분이 파병유보를 주장했을 정도였고

      상황도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오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적대국과 국경을 마주할 수 없다는 고래의 원칙에 따라

      파병을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은 마오의 전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오쩌둥은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지고자

       그의 장남을 참전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마오쩌둥과 마오안잉]


      마오안잉은 그의 어머니인 양카이훼이(楊開慧)가

      국공내전 동안 국민당군에게 피살당한 후 겨우 목숨을 건져 세상을 전전하다가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유송림과 결혼하였는데,

      불과 1년도 못되어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오안잉은 펑더화이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참전하여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들어갔습니다.


      [마오안잉과 유송림]


      하지만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상당히 껄끄러웠던지

       펑떠화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그의 참전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전선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하였던 마오안잉의 요구와 달리

      후방의 사령부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사령부가 미 공군의 맹폭을 받아

      11월 25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마오쩌둥은 대의를 위해 유송림의 소원을 거절하였습니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마오쩌둥은 잠시 눈시울을 붉혔지만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고 간단히 말을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유송림은 눈물로 남편의 시신만이라도 중국으로 가져 올 것을 마오쩌둥에게 부탁하였지만

       해외 파병 중 전사한 중국군은 현지에 묻힌다는 전통을 깰 수 없고

       수많은 중공군 전사자들과 형평이 맞지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유송림이 북한에 있는 마오안잉의 묘소를 찾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많지만 아쉽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찾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몇 회에 걸쳐 유엔군 최고지휘부와 중국 공산당의 최고 권력자의 아들들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그 역할을 다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피아를 떠나 자국의 국민들에게 지도층으로 모범이 되어줄 만한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6·25전쟁사에는 이러한 그들의 이야기는 있는데,

      막상 이와 관련한 우리의 이야기는 찾기가 몹시 힘듭니다.


      물론 당시 국군 최고지도부의 대부분이 불과 30대에 불과할 정도여서

      이런 경우는 구조적으로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군을 포함한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빛을 발한 예보다

      국민방위군 사건처럼 경악할 만한 권력층 비리를 찾기 쉽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6·25전쟁에 참전한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공보다 중요한 것이 행복입니다

       

      미국 인디애나의 한 초등학교에 뇌종양에 걸린 짐(Jim)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짐은 방사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머리가 다 빠졌습니다.
      다행히 치료 경과가 좋아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말했습니다.
      “얘들아! 내일 짐이 우리 곁으로 돌아온단다. 많이 위로해줘라.”
      수업이 끝났지만 그날만은 우르르 몰려나가지 않고 조용했습니다.
      곧 학생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짐을 위로할까?”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짐이 머리가 다 빠졌다고 하는데 우리도 짐처럼 머리를 깎고 오자!”
      다음날 아침, 짐이 등교해보니 모든 남자애들이 빡빡머리였습니다.
      다 서로를 보고 웃었습니다.
      곧 이어 교실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짐도 울었고 선생님도 울었고 반의 모든 아이들이 서로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나눔입니다.
      마음을 나누지 않으면 마음에 공허함이 차오르고

      마음을 나누면 마음에 풍성함이 차오릅니다.
      사람들이 성공 후에 고독과 허무를 느끼는 이유는
      부와 명성을 얻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나누는 일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헤밍웨이는 부와 명성을 가졌고 4번 결혼했지만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61살에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하면서 마지막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긴 텅 빈 전구처럼 공허하다.”


      인생에서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입니다.
      나눔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 인생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고독을 느끼는 이유는 나눔의 대상이 없고 나눔의 실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不孤必有隣 ( 덕불고필유인 )

      덕이 있는자 외롭지 않고 따르는 이웃이 있다. 
       
      가장 훌륭한 어머니는
      자식 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은 어머니,
      가장 훌륭한 아버지는
      남 몰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아버지,
      가장 훌륭한 부인은
      시부모님께 까닭없이 혼이나도 남편 앞에 미소짖는 부인,
      가장 훌륭한 남편은
      부인의 눈물을 닦아 주는 남편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늘 배우려고 노력하며 놀 때는 세상 모든 것을 잊고 놀며
      일할 때는 오로지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이며,
      가장 훌륭한 정치가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이 되면 하던 일 후배에게
      맡기고 미련없이 떠나는 사람이며,
      가장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이다.
      가장 넉넉한 사람은
      자기한테 주어진 몫에 대하여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이고
      가장 강한 사람은
      타오르는 욕망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칭찬받는 사람은
      침묵과 대범함을 적시에 잘 활용 할 줄 알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가장 존경 받는 부자는
      적시적소에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고, 
      가장 건강한 사람은
      늘 웃는 사람이며
      가장 인간성이 좋은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가장 좋은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이 가진 지식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고, 
      가장 훌륭한 자식은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하는 사람이며, 
      가장 피폐한 사람은
      자랑만을 일삼고 자신을 내세우려고만 하는 사람이다.
      가장 좋은 인격은
      자기 자신을 알고 겸손하게 처신하는 사람이고
      가장 부지런한 사람은
      늘 땀을 흘리는 사람이며
      가장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은
      살아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이름이 빛나는 사람이다.
      

       

      생명(生命)보다 진한 형제애

       

       

      초등학교 3학년과 6학년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

      큰 아들이 교통사고(交通事故)로 병원에 입원하여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에

      살기가 어렵다는 의사(醫師)의 말에 자신의 피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죽어가는 아들의 피가 RH-라는 흔하지 않은 피여서

      아버지나 어머니와는 맞지 않았는데 병원에서도 피를 구할 방도가 없었다.

      마침 동생의 피가 형과 맞아서 어린 동생의 피를 뽑아야 할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준식아, 네 형(兄)이 죽어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단다.

       내피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어 안타깝구나.    

       네가 형에게 피를 줄 수 있겠니?

       그러면 형이 살아날 수 있단다.”

       

      한참을 생각하고

      아버지와 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동생 준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침대에 누워 있는 준식의 피를 뽑았다.

      “이제 됐다. 일어나거라!”  

      안쓰럽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말에도 동생, 준식은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일어나라니까!”

      “아빠, 나 언제 죽어?”

      “뭐야 네가 형에게 네 피를 주면 너는 죽고 형은 살아나는 줄 알았어?”

      “응.”

      그 대답에 기가 막힌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울었다.

       

      <가톨릭 서울주보에서  <박문식 베네딕토 신부>

       

      한 탈북여성의 감동 정착기



      지금까지 올렸던 글을 더듬어 보느라니 모두 북한에서 있었던 일들만 적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국에서의 생활도 요약해서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처음 한국 땅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로 생각했다.




      매일 웃고 떠들고 행복과 기쁨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냉혹했다.

      정착금 300만원이 통장에 들어왔다고 하긴 하는데 돈을 찾을 수가 없다.

       

      어디서 어떻게 찾지??…..

      백화점이 서민이 가는데가 아니라는데 그것도 모르고 구경을 갔다….

      가는 길도 다시 찾아오지 못할까 보아 모든 간판을 다 외워두며

       

      한발자국 두발자국 옮겨서 찾아갔다….

      허나 어이하랴……백화점에 들어가긴 들어갔지만 이분이 저 문 같고

       

      저 문이 이 문 같고…모든 것이 번쩍 번쩍 나오는 문을 찾지를 못해

       

      한 시간이나 헤메다가 겨우 나왔다.

      쪽팔리는걸 겨우 참으면서 돈을 어떻게 찾는지 지나가는 사람한데 물어봤다.

       

      은행에 가서 찾으란다….무작정 은행에 들어갔다….

      “고객님…여긴 국민은행입니다….이 통장은 농협통장이니 농협은행에 가보세요…

       

      ”한다. 하~~그런가? 은행도 다 다른가보네…..쩝….허겁지겁 ㅉㅗㅈ기듯이 나온다.

      그속에서도 생각은 있었는가보다. 제일 먼저 돈을 찾아서 한다는 노릇이

       

      운전학원에 갔다.

      85만원을 내란다….“엉? 뭐가 그리 비싸….나 이 돈으로 쪼개가면서

       

      살아야 하는데…..”할수없다…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냈다.

      필기시험은 하나원 교육기관에서 합격하고 나왔으니 실기만 합격하면 된다.

       

      소경 문고리잡 듯 보름 만에 합격했다…..

       

      필기는 그래도 98점이었는데 실기는 겨우 턱걸이로 85점이다……

       

      안도의 숨이 나온다…

       

      불합격이 됐으면 돈을 또 내야 된다던데……살았다…..

      기분 좋다…대한민국 사회에 나오자마자 보름 만에 딴 첫 자격증이다…..

       

      자신감이 생긴다.

      “어?….나도 할 수 있네….앞으로 더 노력하면 되겠다…”하는 자신감…….

      그런데 일이 났다…북에 있는 언니한데서 전화가 왔다…..

       

      이미 하나원에서부터 통화는 자주 했었는데 오늘 전화는 돈을 좀 보내란다…..

       

      먹을 게 없어서 굶어죽을 형편이라고….

      더 두말할것도 없다…돈 벌때까지 쓸돈 조금만 남겨놓고 몽땅 송금했다.

      내 가족이 굶어죽는다는데 뭐가 아까우랴….마음이 개운하다…

       

      우리 가족이 옥수수밥이나마 배불리 먹을 수가 있다는 생각에……

      다음은 뭘 또 배워야 하는데 뭐 배울까? 컴학원에 등록했다.


      하루에 한시간씩 배우러 오란다.

      이것만 가지고 안되겠는데……처음부터 세무가 배우고싶었다…..


      그런데 모집하는 기간이 지났단다……할수없지….


      다른데 알아보니 요리학원에서 사람을 모집한단다.

      무작정 가서 등록했다. 실업자훈련이라 돈이 안든단다.


      얼씨구 좋아라…돈이 안 든다니 좋다……


      몇일 안있어 요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복잡하노……간장 1T, 기름 2T, 깨소금 1T….하면서


      배우기 싫다…..하지만 할 수가 없다…시작했으니 끝장을 볼수밖에….

       

      필기시험날…..산업인력공단에 가서 치렀다…..

      어?……거의 100점수준으로 합격했단다…..

       

      우리 처녀선생님 내가 그렇게 잘했는데 좀 칭찬해주시지

       

      그냥 70점만 넘으면 되는것이지 아무 필요도 없단다….치……

      돈이 없다….북에 다 보내고 나니 차비도 없다…..일을 해야 한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중국 집 문앞에 알바 구함, 이라고 써붙혀 있는

       

      문구를 보고는 무작정 들어가서 일하겠다고 했다.

      말투가 좀 이상하단다….“네….

       

      강원도에서 왔어요. 산골에서 여기에 왔는데 알바해서 돈좀 벌려구요….

       

      ”승낙했다…..

      저녁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일하란다….그렇게 하면 한달에 60만원 준단다….

       

      .좋다….한달에 60만원씩이나 준다니…………열심히 해보자…..

      힘들다. 새벽1시까지 일하고 들어와서 2시까지 요리실기 시험준비도 해야지….

       

      .4시간정도 자고 6시에는 기상해서 학원갈 준비를 해야 한다.

      오후 3시까지 요리학원 수업마치고 와서는 컴 학원에 가서 한 시간 배우고

       

      집에 와서 잠시 앉아있다가 다시 일 나가야 한다.

      육체적으로 힘든거 보다 왜 그렇게 정신적으로 더 힘이 든지…..

       

      이유없이 매일 머리가 윙윙대면서 아프고 무겁고….

       

      가슴에는 커다란 돌맹이를 얹어놓은것처럼 답답하고 안타깝고,

       

      어깨는 쑤시는것처럼 아프고…..

      그때는 왜 그렇게 아픈지 몰랐다…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외상후

       

      스트레스라는 병이라는것이다….

       

      정말 아팠다. 이유없이 몸무게가 12키로나 줄었다.

      바싹 말랐다….국정원에서 사주었던 옷들이 모두 커서 입을 수가 없고

       

      금방이라도 바람이 불면 날아갈 거 같았다.

      그 속에서도 살겠다고 몹시도 발버둥을 쳐댔다….오직 한 가지….

       

      빨리 배우고 빨리 돈벌어서 가족들을 데려와야 한다…..이 생각에 ……..

      성과적으로 실기시험도 합격이다….두번 째 자격증이다.


      또 한번 자신심이 생긴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다른 아줌마들 떨어진

       

      사람들이 많았다….그 속에서 난 붙었다.

      이렇게 5개월을 마치고 다시 등록한게 세무학원이다..

       

      선생님이 도리머리를 지으신다…


      “세무 힘듭니다…. 북에서 해봤나요?”


      “아니요…전혀 못해봤습니다…. 할수 있습니다….

       

      남들이 한시간할 때 두시간, 세시간 더하면 되겠지요.”


      승인받았다. 몇일후부터 다니란다.

      열심히 했다. 대차대조표가 뭔지 . 손익 분기가 뭔지

       

      분개가 뭔지 모든게 생소하다. 한참을 음미해도

       

      이해가 안가는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

      선생님은 계속 진도를 나가신다. 뭔 소린지 도통 알아들어야 말이지…

       

      ..재미없어질려고 한다…..

      수업이 끝난후에 선생님이 남으시란다…

       

      .할수있겠느냐고 물으신다.


       

      “할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고 집에 와서는 그거만 혼자 들여다 보면서

       

       다시 한번 되뇌인다.

      이렇게 한달이 지나 회계 2급시험이 있는 날이다…

       

      ..떨리는 맘으로 어느 대학청사에서 시험을 치렀다.
      합격일까? 불합격일까?…….

       

      가슴을 옥죄이며 보름간을 기다려 시험발표날이 다가왔다.

       

      시험발표날 정각 밤 12시까지 안자고 있다가 ARS로 전화해본다.

       

      가슴이 두근 두근……

      “합격입니다…축하합니다…”하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
      와………………….


      나혼자 집안을 쿵당쿵당 뛰면서 좋아서 어쩔줄 모른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세 번째 자격증이다 .


      점더 노력하자….하고 굳은 결심을 다져본다.

      그로부터 한달후 다시 회계 1급시험이다. 역시 통과다.

       

      같은 학원에 아줌마들 더러 불합격인데 난 그래도 합격이란다…

       

      . 선생님,,, 칭찬하신다…잘 했다고 ….

       

      .합격하리라고 생각못했었는데 해냈다고…..

      대학나온 사람들은 뭐 그런거 가지고 저리도 자랑하고 기뻐할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나같은 초등생한데는

       

       정말 큰 일을 해치운거처럼 생각된다.

      그 이후로 파워포인트에서도 합격했고 세무 1급시험에 도전해서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4번을 떨어졌다…..

       

      하지만 주저앉지 않으련다…..

      합격할때까지 해보련다….누가 이기나 두고보자…마음다지며…

      방송통신대학에도 등록했다…

       

      ..좋은 사람들이 많다. 하루는 출석수업을 마치고 회식자리로 갔었다…

       

      회식이 끝나고 2차로 노래방에 간단다….

      노래방이라는데 처음 가본다…불빛이 어룽대는 그곳에 들어가서

       

      신나게 놀아봤다….

       

      “우연이”라는 노래를 춤을 춰가며 한곡 뽑았다…멋지게…..

      난 뭐 춤을 추라면 못추는줄 아느냐….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

       

       어떻게 그렇게 잘하냐고 한다,,,어깨가 으쓱해진다…ㅎㅎㅎ

      지금은 월급도 작게 받고 일하지만 너무나 행복하다.

       

      나도 일할수 있다는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간다.


      지금 생활은 무척 힘들다. 내 자신이 통제하며 살아간다.

      옷….안사입는다. 옷 한 벌 사는 돈이면 우리 북한에서 2달은

       

      넉근히 살아갈수 있는돈인데…

       

      신발….2년전에 산 신발 깨끗이 손질해서 신는다….

       

       아직 신을만한데 뭐….

      화장….안한다. 쌩얼로 다닌다. 쌩얼이 추세라는데 뭐…

       

      ..화장품이 엄청 비싸다. 내 수준에는 살 엄두를 못내겠다…..

      머리….그냥 기른다…. 북에서 생머리를 하고싶었었는데

       

      머리를 조금만 기르면 수정주의 랄라리 풍에 젖었다고 자르라고

       

      회의 때마다 지적하곤 해서 못길렀었다.

      그냥 돈도 아낄 겸 그냥 기른다. 앞머리 내가 두 달에 한번씩 가위로

       

      거울보고 자르면 된다. 머리 한번 할려면 5만원, 6만원이라는데?…

       

      어우…비싸…..

      궁상스럽다고 하겠지 다들……

       

      .하지만 지금이시각도 헐벗고 굶주리는 내 가족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최대한 아끼고 최대한 절약해서 형제들을 만나야 한다.

      나는 행복하다. 너무나 행복하다.


      비록 12평집이지만 내 집이 있고 밝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아늑한 내 집….

       

      .수도물이 콸콸 나오고 땔감 걱정 없이 살아가는 이 행복을 만끽한다.

      1년에 300일은 전기도 못보고 살아가던 그시절…..물지게로 물을 긷던 그 세상….

       

       땔감이 없어서 4시간을 산을 오르내리던 그 시절을 영원이 잊을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된다.

      필자 봉선화

       

      by 주성하기자 2011/09/10 1:03 am

       

      어머니 마음 

       

      슬슬슬 비린 내음과 함께

      커져 오는 어머니의 얼굴

      한입 두입 국물을 떠 먹다 말고

      아들의 두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명태머리와 꼬리만 드시던 어머니 생각에

      어려웠던 시절

       

      오랜만에 장에 가신 어머니는 큰맘 먹고

      명태 한마리를 사들고 오셨다.

      그날 저녁 맛있게 명태국을 끓인 어머니

      아마도 어머니는 생선을 여덞등분 했나 보다

      국자를 이용해 가장 가운데 큰토막은

      할아버지 국그릇에

      다음으로 살이 많은것은 할머니 국그릇에

      다음 큰것은 아버지 그릇에.....

       

      그렇게 차레대로 형,나, 막내그릇에

      생선 한토막씩 넣어 주셨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머리와 꼬리는 어머니 차지였다.

       

      한번은 어린막내가

      "엄마는 왜 항상 머리와 꼬리만 먹어?"

      하고 묻자 어머니는 잠시 머뭇 거리다가

      "응 어두육미라고 머리와 꼬리가 맜있거든."하셨다.

       

      "그럼 나도 좀줘."

      어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머리와 꼬리부분을

      막내 국그릇에 넣어 주셨다.

      "에게 게 살이 하나도 없잖아 나 안먹을래 엄마 먹어."

      막내에게서 도로 받은 생선의 머리와 꼬리부분을

      어머니는 정말 맛있게 잡수셨다.

       

      어린 우리는 그때 어머니 말씀이 참인줄 알았다.

      그뒤로도 오랫동안 그말을 참이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어두육미(漁頭肉尾)라는 한자 성어까지

      생겨 났겟지 그렇게 여겼다.

       

      네번째 알찬부분을 먹던 큰아들은 어른이 된다음에야

      어머니의 그말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결혼뒤 아내와 모처럼 시장에 가 생선을 샀다.

       

      "머리와 꼬리부분을 잘라 드릴까요." "예"

      "어니 그맛있는데를  버리세요."

      "네?  요즘 이걸 먹는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저씨는 어두육미라는 말도 모르세요?"

       

      "어두육미요

      소꼬리는 맛있는지 생선 대가리를 무슨맛으로 먹어요

      옛날에야 먹을게 워낙 없으니까

      그거라도 끓여먹었는지 모르지만..."

       

      순간 어머니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는

      그뒤로도 아들은 어버이날이 돌아 오면 명태국을 끓인다.

      맛없는 물고기의 머리와 꼬리부분을 그렇게도

      맛있게 드시던 어머니의그 큰사랑을 가슴에 새기기 위해....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상이용사인 아들의 친구는..

       

      미국 샌디에이고 교외의 큰 저택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 엄마, 저에요, 저 전쟁터에서 지금 돌아왔어요." 

           전화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전쟁에 참여했던 아들의 목소리였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들이 제발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빌어온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그런데 엄마, 친구 하나를 데리고 왔어요.

      그 친구는 몹시 다쳤어요.

      하지만 딱하게도 갈 집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소식이 없던 아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습니다.

      " 오냐, 그래라. 우리와 당분간 같이 살자꾸나.
         지금 어디 있니?.

         빨리 오거라"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당분간이란 말을 듣고

      "그 친구와 떨어질 수 없다"며 "늘 함께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의 억지에 못 이긴 어머니는 할 수 없이

        한 1년쯤 함께 살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엄마, 나는 그 친구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어요.

        그 친구는 몹시 불쌍한 친구에요.

        외눈에, 외팔에, 다리도 하나밖에 없다구요."

        몇 년만의 통화였지만 성급한 어머니는 그 말을 듣자

        아들이 빨리 보고싶은 나머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벌컥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너무 감상적이구나.

        넌 지금 전쟁터에서 돌아왔어.
        그 친구는 결국 너의 짐이 되고 말 게다."

        " 짐이 된다구요? "

        아들은 어머니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애타는 마음으로 아들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돌아온다던 아들도 오지 않고

        전화연락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군본부에서 전보 한 장이 날아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샌디에이고 호텔 1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집으로 아들의 시체가 운구되어 오던 날,

        어머니는 그만 깜짝 놀라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시신은 바로 외눈에, 외팔에, 외다리인 아들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

      " 아니오 " 라고 말 할 수 없을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

       

       

      오늘의 상식 :

       오른손잡이는 왼손가락이 길고  

       왼손잡이는 오른손가락이 길다.


      출처 : 돌아보면 멀지도 않은데...
      글쓴이 : 밀레니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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