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당일 정오 밀물이 썰물로 바뀌자 일제공격
아침 밀물 땐 접근 막으려 포격, 저녁 밀물 땐 후퇴… 전열 정비
지금부터 413년 전인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명량(울돌목)해전에서 불과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 함대를 격파,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남을 승리를 거두었다. 충무공의 탁월한 지략과 불퇴전(不退轉)의 자세가 기적 같은 승리를 이뤄냈지만, 울돌목의 복잡한 조류를 정확하게 읽어낸 것도 중요한 비결이었다.
국립해양조사원은 명량해전 당일 전남 진도 울돌목의 조류 현상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21일 밝혔다. 울돌목의 경우 유속이 워낙 빨라 장기 관측이 어려워 자료가 부정확했는데, 새로운 방법인 수평 초음파 유속계를 활용해 작년 11월부터 6개월간 장기 관측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를 토대로 400여년 전 조류 흐름을 추정했다는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조류 흐름이나 자세한 전투 시간은 나와 있지 않다.
명량대첩 당일 오전 6시 30분쯤 물길이 북서 방향으로 흐르는 밀물로 변했다. 일본 수군은 어란진을 출발해 이 밀물을 이용해 우수영으로 진격했다. 탐망군(探望軍)을 통해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11시쯤 명량해협에서 일본군을 맞았다. 그러나 물살이 불리한 상황이라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총통과 화살을 발사하면서 일본군이 더이상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고 해군사관학교 임진왜란사 전문가인 이민웅 교수는 말했다.
정오를 전후로 밀물에서 빠르게 썰물로 바뀌면서 조선 수군에 유리해졌다. 그러자 이순신은 오후 1~2시 사이 모든 전선을 일거에 전진시켜 일본 함대를 공격했다. 이 같은 공격으로 일본 군선 30여척을 쳐부수자 일본 함대는 후퇴해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 해전 패배로 일본군은 서해 진출의 꿈을 접었다.
오후 2시 40분쯤 썰물 속도가 초당 2.7m로 최고조에 달했다가 6시 56분쯤 다시 밀물로 바뀌었다. 이순신은 이 밀물을 타고 당사도(전남 신안군 암태면)로 후퇴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당시 울돌목 일대의 조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이를 기민하게 이용해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끈 것이다.
[유용원의 군사세계] 경외의 23전 23승, 軍神 이순신 [InfoGraphics] 대한민국 제1호 사건/사고편
'중국과 북방선교 이야기 > 대한민국 1호 사건,사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 국보 제1호는 일본의 승전 기념물 (0) | 2010.10.29 |
---|---|
[대한민국 제1호] 1961년 16개 대학에 학도군사훈련단 설치 (0) | 2010.10.29 |
[대한민국 제1호] 북한군 대위 안창식 휴전선 처음 넘어와 (0) | 2010.10.29 |
[대한민국 제1호] 남성모델 송혜진 기자 enavel@chosun.com (0) | 2010.10.29 |
[대한민국 제1호] 여성 패션 모델송혜진 기자 enavel@chosun.com (0) | 2010.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