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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 흥정하는 기도 : 딱 한 번만
2. 질문하는 기도 : 왜 나에게....
3. 정의를 구하는 기도 : 왜 저런 사람을 내버려두십니까?
4.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기도 : 제발, 이루어주십시오.
5. 뻔뻔한 기도 : 복권당첨, 아파트갑 인상되게....
6. 아름다움과 행복을 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한다 :늙지 않게 해 주십시오. 백년해로.
우리가 하나님과 흥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도 들어주신다. 사실 흥정이라는 것은 동등할 때 흥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흥정할 만한 자격이 없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맞바꿀 때 비로소 우리는 구하고 받을 수 있다.
질문은 우리의 영적 음파 탐지기이다. 하나님께 무슨 질문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다. 우리가 물으면 하나님은 답하신다. 다름 아님 임재를 통해서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재하심으로 우리의 어떤 질문에도 답해 주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의 응답하시지 않는 기도와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시지 않는 기도가 있다. 첫 번째로 그것은 바로 ‘왜’라고 묻는 기도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식이다. 왜를 묻는 기도는 사후 부검과 같다. 왜는 과거를 바꾸지 못하며 현재에도 큰 의미가 없다. 응급 상황에 따르는 첫 번째 질문은 ‘왜’가 아닌 ‘무엇’과 ‘어떻게’ 이다. “왜 환자가 피를 흘리나?”라는 질문조차도 “어떻게 해야 환자의 피가 멈출까?”보다 부차적이다.
‘왜’는 미래 행동으로 우리를 안내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왜’에서 ‘어떻게’로 관심을 돌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고 또 기꺼이 그렇게 해 주신다.
두 번째로 “모든 금이 번쩍이는 것은 아니라네”(반지의 제왕에서 마법사 간달프가 한 말)라는 말처럼 ‘하는 척’ 가장하는 기도를 듣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옳은 동기를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나 또한 동기에 그치지 말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진짜 기도에는 증거가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기도와 일치된 삶이다. 진실한 기도는 뻔뻔하리만큼 자기 중심적일지라도 하나님은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정의를 구하는 기도도 들어주신다. 이 세상은 정의롭지 못한 일들로 가득넘친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박국처럼 따지고 싶어하고 아모스처럼 따지고 싶어한다. 공의를 지각하는 능력, 정의를 구하는 욕구는 태어날 때부터 받은 묶음 세트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공평하고 그른지 인식하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 정의는 실재하며 또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간청에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신다. “진실로 정의를 원하느냐? 자비의 균형없이 이 잣대가 네 삶에 적용되길 원하느냐?” 우리가 널리 자비를 베풀고 정의의 집행 자격을 하나님께 넘겨 드리면 하나님은 정의의 가혹한 요구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하나님은 필사적인 기도에도 응답하신다. 기도는 희망의 죽어가는 마지막 불씨다. 수치를 잊고 도와달라 부르짖는 우리의 울음소리다. 하나님은 필사적인 기도에 늘 응답하신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저 응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늘 응답하셨음을 믿기 위함이다. 지금 당장 여기서 응답받지 않더라도, 멀지 않는 내일의 나라에서 응답을 찾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경이로운 순간, 황홀한 순간, 감동의 순간에 오 하나님!을 외친다(사실 이것은 한국 정서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 또 한번 그러한 경험을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러한 경험을 다시 얻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평범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보고자 우리의 마음을 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은 기쁨의 순간을 좀처럼 반복해 주시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은 “한번 더”라는 우리의 기도에 새로운 놀라움으로 답하신다. 하나님은 똑같은 손가락 그림, 눈송이, 일몰을 반복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당신 곧 창조자에게 시선을 돌리게 하시고자 창조 행위를 반복하신다. ‘더욱’ 달라고 청하는 기도는 게릴라식 경험으로 응답을 받는다. 이 응답은 우리의 굶주림을 더욱 자극하고, 기도하게 하고, 냄새는 맡았지만 아직 맛보지 못한 감질나는 선의 근원지를 찾게 한다.
응답하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응답하시는 기도도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고파 하는 그분의 아이들을 천국의 지하실에 가두어 버리시는 것을 가장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서 사랑받고자 하심이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짖으면 그분은 오실 것이다. 그러나 단호한 결심으로 독립을 요구하면 그분은 우리를 놓아주신다. 절대로 강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독립을 요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싫어하신다. 그러나 그 기도도 들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결국 기도자체가 일하는 것은 아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이 일을 행하시는 순간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알기를 원하시고 또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게 해야 한다. 우리를 ‘야다’하시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알고 ‘야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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