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레네오 주교의 ‘이단자를거슬러’에서
- 교회의 순수한 제물 봉헌
주님이 온 세상을 통하여 바치라고 명하신 교회의 제물 봉헌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순수하고 마음에 드시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제물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제물을 받아들이실 때 그것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영광이 됩니다. 왕에게 무슨 예물을 바치면 그것은 우리가 그에 대해 지니는 공경심과 사랑의 표시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순수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모세가 “아무도 너희 주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아라.”고 말했듯이, 사람은 피조물의 맏배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거저 받은 것을 다시 그분께 되돌려 드릴 때 하느님께 대한 공경심을 표시하여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영예를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부하신 제사는 없습니다. 제사는 항상 있어 왔습니다. 옛적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유다인들 가운데에서도 있었고 교회 안에서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제사를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렇다고 두 가지 제사가 똑같은 제사라는 말은 아닙니다. 옛적의 제사는 죄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바친 제사이고 지금의 제사는 자유인들이 바치는 제사입니다. 두 가지 제사를 받아들이시는 분은 동일한 주님이시지만 종이 바치는 제사와 자유인이 바치는 제사는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유인은 바치는 그 제사의 성격을 통하여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의 표시를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 앞에서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옛 유다인들은 자기 소출의 십분의 일만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한편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바칩니다. 하느님께서 백 갑절로 갚아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쁘고도 자유스런 마음으로 바칩니다. 그들은 마치 복음서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가 자기 생계비 모두를 성전의 헌금 궤에 넣은 것처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쳐야 하고, 만사에서 순수한 말과 위선 없는 신앙과 경건한 희망과 열렬한 사랑으로 그분의 것인 피조물의 맏배들을 바침으로써 창조주께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만이 이런 순결한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며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피조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제사를 바칠 때 그분께 속하는 것을 바치는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 우리 간의 친교와 일치를 전하고 영과 육의 부활을 고백합니다. 물질적인 빵이 하느님의 축성을 받게 될 때 이제 그것은 보통의 빵이 아니고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두 가지 요소를 지닌 성체가 되는 것처럼, 성체를 받은 우리 육신도 이제 부패될 육신이 아니고 부활의 희망을 지닌 육신이 됩니다.
* 어제 보다 더 많이 웃는 하루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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