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당과 함께 하는 북유럽 여행
- 2017년 6월 그 어느 날에 -
금당 이 현 오 / 수필가
【순 서】
■ 머리말에
■ 여행이란?
■ 초보여행자가 외지에서 보는 감회
■ 이 나라 저 나라, 삶과 풍광이 있는 그 곳에서
■ 살뜰한 애국자, 대한민국 전초인들
■ 웃음으로 그 날, 그 때 추억으로 되살리며
■ 다시 또 여행 가방을 든다면?
■ 여행기를 마치면서
■ 에필로그
■ 머리말에
오늘이 며칠 째 일까?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쳤다. 2017년 6월10일 서울 인천공항을 출발해 6월21일 다시 그 위치로 돌아올 때까지 나의 시간의 한 편린들은 어쩌면 일생에서 다시 돌아보기 어려운 극치의 순간일 수도 있었다.
여행의 흥분지수도, 흔히들 얘기하는 여행 후 오는 피로감, 시차적응, 무의식성 무감각적 행동들도 이젠 언제적 얘기인가 할 정도로 일상생활에 젖어 그 때 그 순간의 영감도 기억도 퇴색해 질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때 그 순간 그 추억의 시간으로 돌아가 나(우리)만의 나래를 펴려고 한다. 그렇지 않은가?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떠난다. 오늘도 공항은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들의 길목이 돼 숱한 추억의 그림자, 향수를 뿌려놓기 마련이다. 때로 그 길이 아름다운 추억을 심고 희망을 쌓는 길이 될 수도 있고 아쉬움과 또 다른 길을 재촉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그런 아쉬움을 이 지면 속에 그 때의 느낌 그대로를 담아 보고자 한다. 기억이 나면 나는 대로 나지 않으면 나지 않는 대로 순간들을 되짚으며 소중한 기억 속 한 장으로 삼아 돌이켜보려고 한다.
함께 했던 소중하신 분들, 아침이면 반갑게 만나 목례를 주고받고, 함께 밥을 먹고 사진을 촬영하고 그러면서도 비록 많은 얘기는 나누지 못했어도 눈으로 인사하고 대화하며 옷깃을 스쳤던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내 인생의 멋진 동반자들이 되리라 믿어 마지않는다.
그럼 지금부터 북유럽 그 영원의 순간으로 다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서울과 인천, 수원에서, 멀리 광주와 목포에서, 그리고 대구 등 여러 지역에서 오신 자매님, 누이, 어르신님 평안하시고 안녕하시죠. 내내 건강하시고 안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2017. 7. 24
대한민국 서울 뚝섬에서
금당 이 현 오 드림
■ 여행이란?
한 사람이 길을 걷고 있었다. 곁에는 그 외에도 가는 방향이 동일한 목적지의 인물 여러 명이 동행하며 걸음을 함께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마치 돌부처 마냥 듣기 좋은 얘기도, 웃기는 얘기도 이런 저런 얘기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하게 걷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듯 그렇게 걷고만 있었다. 한 시간, 두 시간, 몇 시간이 지나도록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해서 사람들은 혹시 저 사람은 말을 할 줄 모를까?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의아하게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말을 못해서도, 말에 자신감이 없어서도, 발음이 어눌해서도 아니었다고 한다. 제법 말도 잘하고, 발음도 정확하며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나.
그런데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유머는 고사하고 한마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열어 놓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한데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흔히 여행지에서는 누구나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나이든 사람은 자신의 나이를 잊고 젊은이들 누구에게도 스스로를 낮춰 분위기에 참여하고, 어린 사람은 보다 공경의 자세로 상대방을 대하게 돼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더 부드럽고 친절하게 되기에 성별을 초월하고 시대를 초월해 쉽게 얘기 속에 빠져들어 동화(同化)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가 됐건 국외가 됐든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이라면 공통의 심리라고 이구동성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이 또한 여행만이 주는 묘미이고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필자 또한 그런 생각이 들지만 안타깝게도 가깝든 멀든 그렇게 여행을 자주 해보지는 못해 아쉬움은 늘 있어왔다.
그러다 드디어 여행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것도 먼 동화 속 얘기로만 치부해왔던 북유럽 여행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후회하고 있다. 왜냐? 진한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우고 왔다.
그래서 배도 부르다.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도 일깨웠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그렇지 않는가도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유로움도 간직하게 됐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하고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함께 했던 이들과의 더 진솔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쉽고 어딘가 한 곳이 휑하게 비워진 감도 없지 않다. 그래서 만에 하나 다시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못다 했던 그 때의 아쉬움을 더는 토로하지 않고 싶다.
더한 후회로 장식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더 큰 나름의 준비를 갖추고 싶다. 또 그렇게 권면하고 싶다.
언제까지라도 남을 그런 만남으로 승화되기 위해.....
■ 초보여행자가 외지에서 보는 감회
벌써 한참 전이다. 한여름 뙤약볕이 후두둑 떨어지는 땀방울로 연결되는 2014년 8월, 지인 분들과 더불어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가고 싶어 한다는 천안문(天安門)이나 자금성(紫禁城), 안휘성의 황산(黃山)도, 휴양지 해남도(海南島)가 아니었다. 지난날 우리 선열들이 말발굽으로 호령하며 수를 놓던 동북3성의 한 곳 길림성 지역 광활한 만주 벌판이었다.
장춘 소팔가자를 시작으로 민족의 성산 백두(白頭)의 묏뿌리까지 1주일여 달리고 찾아가는 여행을 통해 책속에서 느낄 수 없는 많은 것을 체득하고 가슴으로 터득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김대건 신부가 수학했던 그곳(소팔가자)에서부터 조선족들의 열악한 삶 속에서도 신앙심으로 돈독한 끈으로 이어짐도, 두만강 바로 건너 햇빛마저 비켜가는 듯 헐벗은 땅 북녘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런 한편으로 그 옛날 선인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광야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 ‧ 바람 속에서 식사를 하고 이슬을 맞으며 잠을 이룸)하며 독립운동 하던 연길이며 용정, 개산툰 지역을 순행하며 오늘의 나를 되새겨보는 기회도 가졌다.
그것은 새로운 눈뜸이고 ‘나’의 발견이었고, 내일에의 다짐의 자리이기도 했다. 그렇게 여행은 새로운 의식과 면모를 일신케 하는 마력을 지니게 했다. 그리고 이번 우연한 기회로 북유럽을 돌아보게 됐다.
어찌보면 이번 북유럽 여행은 중국행을 했던 그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길이었다. 3년 전 그 때가 나라에 대한 의식, 민족정신과 한민족의 기개를 새로 깨닫게 하는 애국심의 여행이었다면 2017년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서의 여행은 ‘나’를 매개로 대한민국과 세계를 접목케 하는 방향이라고 할까.
그래서 이번 여행은 마음 졸이는 현상보다는 눈으로 즐기고 가슴 트이는 문화의 향연으로 표하면 너무 거(巨)한 표현일지. 그럼에도 국내외 막론 여행 초보자인 필자에게 이국의 풍광이며, 문물, 중세시대의 옛 보고(寶庫)들은 나를 뜨게 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울렁이면서도 또 편안했는지도 모른다. 여행은 초보자에게 이렇게 와 닿는가 보다. 그 날의 감회가 역시 새롭다.
■ 이 나라 저 나라, 삶과 풍광이 있는 그 곳에서
러시아, 유라시아 대륙 그 드넓은 대륙에서
모스크바, 정리된 도시
‘크레믈린’! 우리는 흔히 깊이를 알 수 없는,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것 같은 사람을 가리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던 독일 나치 정권하의 비밀정치경찰 게슈타포(Gestapo)가 연상된다거나 舊소련 케이지비(KGB)가 바로 연상한다면 나만의 비약일까?
그 크레믈린(Kremlin)의 고장 러시아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한 건 서울(인천공항)을 떠난 지 정확히 9시간 만이다. 우리들 일행을 태운 KAL 000기가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게 정확히 6월10일 오후 2시10분 이었는데 모스크바 현지시각은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선 시각이다. 6시간의 시차. 서울은 지금 밤 11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일 것이다.
여기는 모스크바
6월11일, 여행의 첫 날 첫 일정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아니 눈이 감기긴 감겼었나 할 정도로 비몽사몽(非夢似夢) 오락가락이었다. 밤새 눈을 감았다 떴다 하기를 얼마. 서울발 기내 좌석이 운 좋게 창가에 자리한 탓으로 고개는 자동적으로 ‘우향우’. 몇 년 만의 비행기 탑승이다. 구름 위를 두둥실 나는 듯한 황홀감 때문에 눈 감기를 포기한 채 혹여 옆 의 아리따운 여승객이 ‘이 사람 시골스러운 사람’(?)할까봐 아니 보는 척 하면서도 눈은 그대로 발아래 시시각각 펼쳐진 운무(雲霧)의 대향연에 취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대해(大海)에 파묻힌 관계로 피곤도 하련만 눈은 감겨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떤 피곤함도 나와는 별개였다.
그저 언제 시간돼 밖으로 나가지 하는 마음이 앞설 뿐이다. 아마 촌스런 여행 초보자, 그것도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지 못한 촌티가 그대로 묻어난 시골스런 사내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터다. 그렇게 나는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커텐 너머 창밖으로 아침이 밝음을 확인하고 베란다로 나가자 아직 인적이 보이지 않는 모스크바의 날이 밝고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은 아파트 군들이 여기가 바로 그 옛날 마르크스-레닌과 스탈린 등으로 이어지는 세계 공산주의 중심이자 냉전시대 주요 한 축을 형성하며 두려움의 대상이자 공산화 종주국 위력을 전 세계에 과시한 모스크바의 아침임을 실감나게 한다.
어제 모스크바 공항에서 호텔(홀리데이인 호텔)로 오는 버스 안에서도 본 느낌 그대로 시내의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아파트들도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반 듯 반 듯 질서정연, 마치 붉은 광장에 선 병사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와 열’ ‘종과 횡’을 빈틈없이 맞춰 열병과 분열 사열에 나서는 모습과도 똑같다.
그 옛날 러시아, 아니 소련은 대부분의 우리 세대에게는 말 그대로 크레믈린이었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드라마에서 소련군으로 분한 군복차림의 배우들만 봐도 가슴이 철렁해지는 그런 때가 있었다. 이유는 한 가지, 오늘의 한반도 분단과 밀접하고 북한 김일성이 6․25한국전쟁을 일으킬 수 있도록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나라였으니 냉전시대 고교 대학(군사)교육을 받은 필자의 입장에선 당연한 귀결 아니겠는가. 그 시절 미국과 소련은 핵과 중무장한 무기체계로 대결을 벌이며 냉전시대 민주-공산 양 진영을 가르는 꽉 막힌 양대 산맥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을 지내고, 또 수상을 역임하고 다시 현 러시아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차기 3선까지 무려 종신 대통령을 노리고 있다는 TV 화면 속 푸틴 대통령의 모습을 보노라면 소련 비밀경찰을 지낸 그답게 전혀 그 감정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레믈린의 크렘린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 가 싶어진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일 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관광에 나서보기로 한다.
어제 우리 일행은 공항에서 도착해 곧장 저녁식사를 위해 한국식당으로 차를 달렸다. 모스크바는 참 특이한 도시로 보인다. 산이 보이지 않는다. 온통 평평한 땅이다. 평지에 세운 도시국가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몰랐던 사실인데 모스크바에서 대학생활을 하며 우리들을 안내하는 교민 가이드인 박준형 군 설명에서 알게 되었다. 그는 세계적 명문대학 모스크바 재학생이다.
가는 길에 소련을 세계 최초로 유인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로 가게 한 우주인 유리 가가린(동상)을 만났다. 비록 차창을 통해 본 그의 동상이지만 이 나라의 위상을 조금은 알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와 우주센터도 러시아의 기술협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나라의 우주에 대한 무한한 공간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모스크바 국립대도 가까운 인근에 있었는데, 보다 놀라운 사실은 이 지역이 모스크바에서도 제일 높은 해발 고도 지점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 놀랐다. 무려 해발고도 148미터.
이 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로비로 나온 일행들은 아침부터 다소 맥이 빠졌다. 오늘 우리를 태우고 모스크바 시내 투어에 나설 예정 버스가 고장이 난 것이다. 도중에 차량을 교체하느라 지체될 밖에. 예정된 시간보다 48분여 늦게 출발이다. 모스크바의 심장격인 붉은광장 크렘린으로 향했다.
광장으로 가는 중간에는 말로만 듣던 ‘볼쇼이 극장’이 우선 시선을 끈다. 예술과는 거리가 먼 필자지만 러시아를 대표하는, 러시아 예술을 대변하는 발레로 유명한 볼쇼이 극장은 비록 겉만 보기에도, 보는 그 자체만으로 기쁨이기도 했다. 하지만 칼-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년 ~ 1883) 동상을 보는 소감은 조금은 이상하고 조금은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볼쇼이’와 더불어 칼-마르크스 이름이 언제 머릿속에 절대적으로 박혔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중-고교 윤리도덕 과목이었을 것이고, 그 때 당연히 익혔을 이름이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낯설고 불편하게 나를 사로잡게 되는 이유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 저이만 없었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나 자본론 등이 공산주의 방향으로 이입되지만 않았다면 인류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뱅뱅 돌게 됨을 어쩔 수 없었다.
크레믈린에서 바실 성당을 보다
크렘린 광장 앞에 수문장(?)격으로 버티고 있는 동상. 그는 스탈린의 오른팔 격으로 6․25한국전쟁과 무관하지 않는 게오르기 주코프 사령관이다. 나는 그가 지켜보는 광장이 붉은 광장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마굿간 광장’이란다. 마굿간 광장이라니 이름하곤 좀 모스크바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유래가 다 있음이니 시비를 걸 생각은 애초부터 없다. 서둘러 성문처럼 생긴 대문을 지나자 저 멀리 동화책에서 본 그대로 마법의 성이 나를 반긴다. 숱한 빛으로 채색된 성채가 눈부시게 다가온다. “와, 저게 바로 크레믈린(크렘린)이구나!” 감탄에 젖는데, 무슨 당치도 않는 어림없는 소리, ‘무식’의 소치로고. 러시아 정교회 바실 성당이다.
어릴 적 난 동화책을 참 좋아했다. 섬마을 작은 학교였지만 그때만 해도 3개학급에 콩나물시루일 정도로 학생 수도 많던 시절, 초등(국민)학교 6학년 땐 학교 도서위원장 직함을 갖기도 했다. 모든 책을 내 책임아래 대출해주고 도서관에 비치된 책은 거의 섭렵할 정도였다면 지나친 자랑(?). 위인전에 동화책, 삼삼한 연애소설(?)까지도 줄줄이 꿰찰 정도 였나. 그래서 한겨울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난 인기 짱이었다. 읽은 책 내용이 머릿속에 담겨 있으니 그 시기 나는 동네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아랍과 관련된 동화는 언제나 꿈의 궁전과 함께 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동화의 나라, 그래서 비슷한 동화책 속 궁전(?)을 볼 때마다 일곱 난장이와 요술공주, 하늘을 나는 양탄자 등 상상의 나래는 어린 학생에게 두둥실 떠오르는 한없는 무지개이기도 했다. 스스로가 동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그 동화의 나라가 수십년 세월이 지나 실제로 펼쳐졌으니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아뿔싸, 성(城)이, 궁궐이 아니란다. 성당이란다. ‘바실 성당’이라 소개받기 전까지도 난 그곳이 크레믈린 성이요, 러시아 대통령 - 푸틴 -이 살고 있는 우리의 청와대, 대통령 집무공간으로만 착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창피함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크레믈린 궁전은 바로 그 옆에서 붉은색 커다란 성벽의 띠를 이루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홀리데이인 호텔에서 붉은 광장까지는 15분 거리. 아침 기온은 12도, 모스크바 시내 건물은 참 단정하다는 느낌이다. 대체적으로 붉은 색과 회색으로 구분되는데 붉은 색은 스탈린시대요, 회색 건물은 후르시쵸프 시대를 표방한다고 한다. 광장 중앙에서는 무대를 준비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6월12일, 바로 내일이 러시아 날이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일이 바로 이곳 광장에서 이뤄지고, 승전기념 행사 때는 붉은 깃발을 들고 퍼레이드를 벌인다고 한다. 그래서 곧 붉은 광장이란다. 안내하는 가이드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바실 성당을 뒤로 하고 우리는 크레믈린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아차차, 아니다. 화장실부터 들러야 한다. 여기로부터 시작이지만 어디를 가면 거의 의무적일 정도로 화장실부터 가는 게 제1의 원칙의 적용이다. ‘전원 화장실 앞으로 갓!’ 화장실 순시에 나선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모스크바 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을 나설 때까지 우리를 묶었던 가이드의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주문한 따가운 잔소리(?)는 여권과 가방(지갑) 간수였다. 더불어 당연한 얘기지만 화장실 문제였다. 기회만 되면 가장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가장 긴요하고도 시급하게 다가온 게 바로 화장실이었다.
1991년 12월 공산주의 소련체제 붕괴 후 관광명소로 개방되고 있다는 크레믈린 궁. 15세기 건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곳을 우리는 11시40분 드디어 입성했다. 많은 관광객들. 러시아 자국 국민 보다는 외국인들이 훨씬 더 많이 방문한 듯 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휴일인 관계로 대통령은 집무는 없었다. 대통령이 집무실에 위치하지 않는 관계로 대통령 표시 문양 기도 내걸리지 않았다. 소비에트공화국이 무너지고 30년에 미치지 못함에도 국가최고수반의 집무공간을 대중에게 개방한다는 그 자체에서 또 다른 느낌이 와 닿는다.
크레믈린 궁 안에는 과거 러시아 왕들의 사후안식처로 그들이 모셔진 정교회 대천사 성당을 비롯해 수태고지 성당, 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성모 승천성당 등이 그 옛날 그대로의 채색이 고풍스럽게 내방객을 맞고 있어 내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이 성당에서 숱한 역사가 이뤄졌음을 생각할 때 많은 느낌이 스치기도 했다. 성당에서 나오는 길 황제의 종탑 옆에 탐스럽게 피어난 라일락 향기가 푸른 하늘 높이 솟구친 뭉게구름과 파란 잔디와 어울려 코 끝을 스며들고 있었다.
젊음의 거리 ‘아르바트’에서 푸시킨을 보다
크레믈린 궁을 뒤로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출발했다. 젊음의 거리 ‘아르바트’ 다. 허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았나. 모스크바 강(江)을 건너 식당으로 가는데, ‘뭐라, 강이라고?’ 너무 오래 한강을 가까이 해서 그런가? ‘강’이라 일컫는 그 자체가 묘한 뉘랑스로 다가옴은 나만의 떠올림은 아닐 것 같다.
모스크바 강은 그야말로 냇가에 불과한 느낌. 그러나 그 강을 따라 오른쪽으로 는 아름다운 건물들이 즐비하게 펼쳐지는데 그 중 한 성당, 구세주 성당은 스탈린 - 브레즈네프 시대 공중목욕탕으로 전락되기도 했다하니 어찌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하지 않겠는가. 이 날이 휴일이고, 내일이 러시아 날로 연휴인데다 날씨도 쾌청하니 강변 정류장과 유람선 예매소 앞은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서있다. 연인끼리 데이트 족에서 아이와 함께 한 젊은 부부, 연세 지긋한 노부부에 이르기까지 계층도 다양하다.
그런데 눈에 확 띄는 저 동상은 뭐지?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동상이 유람선이 이동하는 강 한 곳에 대단한 위용으로 서있다. 해적선 선장도 같고 한데, 모스크방 강 유명한 표토르 대제 동상이라고 한다.
오늘 점심은 닭고기를 감자에 갈아서 만든 요리다. 조금은 짠듯한 수프지만 맛이 괜찮았다. 빵도 담백하게 구워서 입맛에 맞다. 하지만 난 닭고기는 생략했다. 어제부터 소화가 잘 되지 않는지 배가 더부룩한 게 조금은 부담스러워서다.
여기는 ‘아르바트’ 거리
젊음의 거리, 예술의 거리다. 여기에 러시아를 대표하는 국민시인이자 문학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푸시킨(알렉산드르 세르계예비치 푸시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6.6~1837.2.10)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래서 이 거리가 더 생동하고 젊음의 거리로 꿈틀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푸시킨과 그 아내 나탈리아와의 가슴 아픈 슬픈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행복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이야기가 가슴을 아련하게 한다. 그 설명을 대변하듯 신혼생활을 보냈던 2층집과 마주하고 있는 광장 한편 푸시킨과 나탈리아의 동상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손을 마주잡고 서 있으나 자세히 보면 손을 잡지 않고 있다. 결혼생활은 있었으나 아내의 염문, 사치벽으로 행복하지 못했다는 그의 짧은 결혼생활, 닿을 듯 말 듯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손가락. 마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더 가깝지 못했던 사랑을 찾기 위한 모습일지, 아니면 차가운 미소 속 보이기 위한 모습일지 어쩌면 현재는 미완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그렇게 이 날도 그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 앞에서 한컷 사진촬영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드르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아내를 사이에 두고 아내를 짝사랑한 프랑스 장교 단테스와 결투를 신청해 결국 그가 쏜 총탄을 맞고 쓰러져 숨져간 천재 시인 문호 푸시킨. 오늘도 그의 시 ‘삶이....’는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는 서울의 인사동 골목과 비슷한 거리라고 한다. 축제도 많고 밤이면 젊은이들로 늘 북적거린다고. 거리를 거닐자 곳곳에는 작은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마릴린 먼로의 유명한 사진에서 이중섭의 소를 닮은 말머리 그림도, 러시아 유명한 자작나무 작품에서 책과 카페 아이스크림 가게도, 바이킹 해적선 유화작품들이 대거 눈에 보인다.
그러자 이번에는 할아버지 악사의 연주가 눈길을 끌어 모은다. 아코디언의 흥겨운 음악에 맞춰 두 여인이 춤을 추자 지나는 관광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손뼉을 치는데, 오호라 우리 젊은 가이드 춤도 잘추네. 그 여인들의 손을 함께 잡아 한판 춤으로 분위기를 돋운다. 잠시 여행에 지친 나그네들의 피로가 이렇게 해소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모스크바를 떠나며
붉은색 건물과 회색건물로 시대를 알 수 있게 한 모스크바. 한 때는 세계공산주의 종주국의 수도로, 마르크스와 레닌-스탈린 등으로, 크레믈린으로 무시무시한 냉전의 도시로만 여겼던 소련의 모스크바. 그러나 러시아는 잘 정돈된 도시건물이며, 길쭉길쭉하게 쭉쭉 늘어진 우리와는 조금은 색다른 건물 배치 군들.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한 첨탑으로 이뤄진 아련하고도 아픈 역사를 간직한 조각품과도 같은 옛 성당들. 강폭은 작지만 표토르 대제의 우렁찬 포효가 들리는 것만 같은 레나 강의 유람선. 현란하게 다가오던 크레믈린 궁전 안에 자리한 옛 황제들의 숨결이 그대로 간직된 정교회 성당.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에 맞서 뼈아픈 대패를 안겨 나폴레옹의 몰락을 자초게 해준 모스스바의 역사 등.
비록 문외한의 눈에도 세계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거장 푸시킨과 발레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볼쇼이 극장에, 유리가가린, 레닌 동상을 보면서 이제는 옛날과 달리 오늘날 한국과도 밀접한 정치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모스크바에 애정이 스며 듬을 잊지 않게 된다.
우리는 모스크바 공항으로 차를 달렸다. 러시아 공항 Aero Frot 항공은 정확히 19:45 모스크바 공항을 이륙했다.
지금 여기는? .... 창밖은 구름바다, 운해(雲海) 세상
6월12일, 모스크바 날씨는 쾌청이다. 하늘에서 바라다 본 지금 시각은 8시가 막 지난 8시5분. 저녁시각이지만 하늘은 그야말로 하늘과 바다가 하나된 모습이다. 흰색은 구름이요 파란색은 바다. 눈을 현혹하는 양떼의 털과 같던 그 공간은 양털로 산과 계곡을 쌓고 이룬 듯 말 그대로 형용키 어려울 수사의 아름다움이다. 잘게 썰어 하얀 양털 하나하나를 만들고 무더기로 쌓아 놓아 눈이 부시게 한 것 같다. 파란 바다는 또 어떤가? 맑고 쾌청한 햇살을 받아 끝없이 펼쳐지는 무한대의 공간, 내 마음을 멀리 멀리로 날아가게 한다. 그런데 어쩐다. 바다같기만 한 거기는 바다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하늘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바다 아닌 바다인 것이다.
모스크바를 떠난 비행기는 날갯짓도 천천히 기수를 조종 선회하며 덴마크를 향해 세찬 날갯짓을 거듭한다. 비행시각 2시간 30분.
비행기가 모스크바공항을 이륙하기에 앞서 우리들은 공항 입국장 한 곳에서 미리 나눠준 도시락으로 저녁 요기를 마쳤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급하 지만 우리는 먹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대합실 아주 품격 있는 탁자가 배치된 곳에서 남자인 나까지 가세해 서정숙, 권명희, 배정자 자매님과 우아하게 커피까지 마셔가며 여유롭게 식사를 마쳤다.
입국 때도 그렇더니만 출국 심사도 무척 까다롭다. 짐을 부치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심사대에서는 양팔 벌린 자세로 X-레이 검사에 남자들은 혁대까지 풀게 한다. 자칫 바지가 흘러내리는 상황이라 진땀나는데, 심사대를 거치고 나오니 아뿔싸, ‘이거 내 혁대가 아닌데’, 하자 앞서 나간 러시아 남자가 착각했나 보다. 서로 웃음으로 혁대를 주고받아 바지에 꿰차고 출국 대기장소 게이트(Gate-23)로 가자 참 낯익은 얼굴 형상들이 많다. 들려오는 말소리 또한 같다.
이역 땅 남의 나라 공항에서 보는 우리 국민, 그리고 우리말, 반가움과 함께 또 다른 생각도 함께 떠오르게 한다. ‘아 우리 대한민국, 이럴 정도가 되었구나’ 하면서 비행기 탑승구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역시 하늘은 대낮과 같다. 지금 북유럽은 백야가 시작되는 시기라고 한다. 기내(機內)에서도 머리에 되살려지는 생각은 모스크바는 참 아름다운 도시라는 떠오름이다. 모스크바 종합대학의 뾰족한 첨탑에 웅장한 건물, 그와 비슷비슷한 다채로운 건물군과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외무부 청사건물, 현재와 같은 이들 건물은 다 스탈린식 건물양식이라고 한다. 특히 외무부의 높다란 첨탑을 보면서 나는 일행과 이런 얘기를 나눴다. “우리나라 외무장관이 러시아에 와서 회담하게 될 때 우선은 건물 외양만 보고서도 압도되지 않을까”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모스크바를 떠난다. 이번 여행에서의 첫 기착지이자 세계 공산주의물결을 주도했던 舊 소련의 대표 도시였던 모스크바. 지금도 러시아의 수도로서 역사와 아름다운 외관 못지않게 평화로운 자태로 우리를 처음 맞아준 모스크바에의 진한 여운을 뒤로 하면서 모스크바의 첫 밤을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이제는 모스크바를 뒤로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문물을 대하는데 마음을 열고자 한다.
낙농과 우유의 나라 덴마크
전날 밤, 밤이라지만 환하게 밝은 11시가 가까운 시각에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 안착했다. 반가운 미성(美聲)이 귀를 번쩍하게 하는 코펜하겐 거주 교포 가이드의 환영의 목소리를 받으며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 숙소로 향했다.
버스가 이동하는 동안 자신을 ‘인어공주’로 소개한는 예쁜 가이드는 때가 때여서인지 국내에서 일어난 시사 관련 발언으로 우리를 맞았다. 국내 소식에도 며칠 전 떠난 우리보다 더 꿰뚫고 있어 보인다. “정말로 작년 한 해부터 지난 선거까지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고국에서 고생 많이 하셨지만 여기서 우리도 마음고생 또한 컷습니다”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찌 안 그러랴.
2016년 한 해는 국민 모두에게 참으로 고단하고 지난(至難)한 해였으니. 아마 10월 둘째 주부터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광화문광장에 촛불이 불을 당긴 게. 이젠 들먹이기조차도 꺼려지는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광화문으로 대표되는 전국은 주말이면 촛불이 불야성을 이뤘다.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위기감 속에서 국민의식은 큰 빛을 발했다. 평화의 행진이었다. 국민이 놀랐다. 세계는 이런 한국을 보고 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교포들이 외국에서도 멀리 고국의 밝은 소식이 이어지고 잘 된다는 뉴스가 이어져야 어느 곳에서도 어깨에 힘을 주며 내 나라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우쭐해질 것이며, 그래야 현지 국민들도 함부로 여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인어공주 말은 계속 이어졌다. “생각지도 못하게 정 양(최순실 딸 정유라)이 이곳 덴마크로 도피하면서 뉴스거리가 없는(사건 사고가 없는 나라가 덴마크라고) 이 나라에 이 사건은 최고의 이슈였습니다. 여왕님이 전 날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 약을 드셨다고 하면 그게 큰 뉴스로 신문에 나는 게 이 나라입니다. 그런데 정 양 사건이 이쪽에서 계속이니 어떠했겠어요?”한다. 공감이 간다. 얼마나 따가운 눈총을 받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동시에 몰려온다.
덴마크는 인구 약 5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국토가 우리와는 달리 전체가 평야지대로 이뤄지고 바람이 그렇게 많다고. 그러면서 “바람이 세게 불 때는 시속 20km속도로 불어 여자들이 미처 고무줄을 준비하지 못하면 바람에 나부껴 산발해 미친년 머리카락이 된다”면서 “그래서 이곳 여자들은 외출 시 항상 머리를 묶는 두건을 준비한다”고 귀뜸 한다.
덴마크는 서울과 8시간 시차. 해서 오늘 6월12일은 백야(白夜)가 절정으로 이어지는 시기라고 일러준다. 완전 백야는 6월21. 반대로 완전 흑야는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가 된다고. 따라서 요즘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는 관광 최고 성수기에 해당한다.
이후에도 차량으로 지나치면서 늘 함께 했지만 북유럽은 우리와는 조금은 다르게 들판마다 초지(草地)의 완성작 같다. 초원지대에 위치한 아담한 호텔 ‘COME WELL' 에 도착, 여장을 푼 우리는 덴마크의 시원한 밤공기를 음미하며 각자의 시공간으로 들어갔다. 하루의 피로를 풀 시간으로.
덴마크의 첫날, 풀을 뜯는 소가족의 평화로움으로
다음날 아침 일직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상쾌한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지금 대한민국도 깊은 가뭄으로 오매불망 하늘을 쳐다보기에 갈급한 심정인데 여기도 마찬가지란다. 결국 아무리 인간이 최첨단 최고의 신기술 과학과 문물을 창조해 낸다 해도 대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티끌이나 먼지에 불과한 것일 뿐, 자연에 귀의하고 순응해야 함은 생명체가 존재하는 한에 있어 절대적인 진리임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호텔 앞 초지에는 한 가족인 듯한 소들이 한가롭게 거닐며 아침 이슬이 담긴 풀들을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한가로이 뜯고 있다. ‘음매~’ 정겨운 소 울음소리. 오랜만에 듣는 ‘음매~’. 내가 좋아하는 소 울음소리에 젖다 보니 마냥 옛날 시골 선머슴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고만 싶어진다.
빵과 우유 등으로 아침을 든든히 차려 먹은 우리는 유별나게 ‘성(城)’이 많은 덴마크를 알기 위해 출발을 서둘렀다. 달리는 차량 좌우로 보이는 지대는 넓디 넓은 초원이다. 초지들로 무성하다. 온통 초록빛 들녘. 주변으로 빨간 꽃이 눈길을 자극하는데 모두가 양귀비꽃이라네. 물론 우리가 아는 마약류 양귀비와는 다른 종류라고 알려주어 갸웃해지던 고개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가이드 ‘인어공주’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곁들인다. 이곳 교민은 약 500명 정도인데 우리나라에서 입양된 입양자는 무려 9,000명에 달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과 교민들은 년중 행사를 통해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입양자들이 잘 참석하지 않아 뿌리는 같은 뿌리지만 어쩔 수 없이 어울리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그래서인지 이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교민사회보다는 정부와의 우선 협상을 요구하고 그렇게문제 해결에 나선다고 한다.
우리의 아픈 기억이자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또 하나의 아킬레스가 바로 입양아 문제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오래 전 얘기지만 TV에서 방영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단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우리들의 아이들이면서도 피 치못할 사정에 의해 성장배경과 환경, 살아온 문화와 역사가 달라 이방인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이웃이자 형제인 입양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답답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저 멀리서 바람을 가르는 풍차는 멋지게 돌아가는데.
드넓은 연못을 중앙에 두고 좌우 대칭으로 아름드리나무를 심어 세련미 가득한 바로크 정원. 인공미가 가미된 정원이지만 자연과 인간의 섬세한 예술미가 자연스레 조화를 이끌어내는 바로크 정원을 걸어 동화책에서 봤음직한 프레드릭스 성(城)과 분수대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에 스스로를 담아본다.
하지만 오래 머물 시간이 없다. 곧 다른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출발하는데,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원작을 쓴 카렌 블릭슨의 생가가 바로 오른쪽이라고 한다. 손 짓 따라 눈으로 그의 생가를 확인하며 한없이 펼쳐진 도로 양옆의 장관을 이룬 가로변 숲길도 함께 감상해본다.
오호라, 버스는 달리는데 갑자기 멋진 남 저음 목청의 노래가 마이크를 탄다. 묵직한 목소리에 나마저 빠져드는 느낌. 가이드의 요청 따라 버스기사가 멋진 목소리로 노래를 선사한 것이다. 덴마크 오랜 동화에 나오는 노래 ‘소년이 소녀를 사랑한’ 노래란다. 우리 일행도 즉석에서 화답으로 ‘아리랑’을 합창하니, 이내 버스 안이 시끌벅적 부산해지며 박수소리 또한 요란하다.
북유럽 국가들이 한결같이 겪는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바로 일조량의 부족이다. 햇볕이 부족해 제일 어려움을 겪는데 그 중에서도 남자보다 여성들이 피부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해서들 피부 노화 방지를 위해 노력을 많이 하는데 20대 까지는 피부가 어느 국가 여성들보다도 곱지만 그 이후에는 뚝 떨어진다고 한다. 이유인즉 강력한 태양과 짧은 일조량, 그리고 물 때문이라고. 자연은 어디 누구 한 곳에만 선물보따리를 풀어 놓는 건 아닌 모양이다.
우스은 이야기 한 토막. 북유럽은 대체로 자전거 도로가 잘 돼 있고, 좁은 시내 교통에서도 자전거 이용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통행권을 부여하고 있어, 어른이고 청소년들이고 자전거 출퇴근 통학을 많이 하는데, 특별히 여름철에 자전거 사고가 많이 나 이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진다고 한다.
왜냐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여름에 젊은 아가씨들은 잘 가꾸고 탄력 있는 자신의 각선미며 맵시를 자랑삼아(?) 보여주기 위해서도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자 하는데 문제는 이런 옷차림으로 인해 등하교길 학생이나 출퇴근길 남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상대방을 쳐다보고 지나치다 보니 본의 아닌 접촉사고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여름철이면 특별히 학생들에게 ‘오늘은 자전거(탄 여자) 쳐다보지 말자’는 이색 교육도 시행된다고 한다.
본격적인 시내 관광에 나선 우리들은 중앙역 앞에서 잠시 차를 멈춰 세웠다. 역 사 건물이 예전 우리의 서울역사 보다도 더 중후한 중세풍 모습으로 다가와 친근감을 주기도 한다. 일부 일행은 인근 전통시장으로 쇼핑을 가 유명한 블루베리며 체리도 한 보따리 구입해 버스에 풀음으로써 때 아닌 체리 파티가 일기도 했다.
이곳 날씨가 그렇다지만 오늘따라 변덕이 심하다. 해가 쨍쨍하더니만 국회의사당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후두둑 도로를 적시기 시작한다. 바람도 심하게 부는데 차에서 내리기가 다소 불편한 상황. 차 안에서 설명을 들으며 가르치는 대로 의사당 정문 위쪽 벽면에 부착된 다양한 표정의 얼굴 조형물을 보자 생김 모양새가 온통 찌그러진 각각의 모습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원들이 국민들로부터 숱한 난제를 받아 고민하는 형상을 새겼는데[ 재임기간 국가와 국민을 위해 고민(일)하고 또 고민(일)하라는 의미로 새겨진 것이라고 했다. 무언가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 선량(選良)님들도 매해 몇 번씩 해외 연수를 다니는데 우리 의원님(구․시․도․국회)네들이 이곳에 와서 이런 모습을 잘 새겨 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여왕님 뵈러 바다로 가다
안데르센과 인어공주의 나라. 덴마크 하면 누가 뭐라 해도 어려서부터 많이 접한 안데르센과 인어공주 이야기가 아닐까. 예전 뉴스를 통해 인어공주가 못된 이들로 인해 수난을 당했다는 가끔 들으면서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갖곤 했는데, 그래서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게 인어공주 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해서 언제인가 인어공주와 한 청년이 시공(時空)을 넘나들며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주제로 한 TV 드라마가 그래서 더한 인기를 얻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인어공주를 보러간다는 얘기에 모두의 마음이 설렘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 닉네임이 ‘인어공주’이니 더할 밖에.
인어공주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우리는 뜻하지 않은 분을 뵐 기회를 맞았다. 바로 덴마크 최고 어르신이신 마르그레테2세 여왕(1972년 즉위)님을 알현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가까운 항구에 여왕님 요트가 정박해 있는 것이다. ‘행운은 또 다른 행운을 부른다’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덴마크 국민들도 여왕님 보트를 볼 기회가 그렇게 잦지 않다고 했다.
전체가 하얀색에 연통이 노란색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단순하면서도 기품 있게 제작된 보트로 100년 전에 건립돼, 후일 여왕 아버지께서 생일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정박된 보트 곁으로 세단이 서 있고, 수병들의 경계와 비서진으로 보이는 정장차림 건장한 남자와 군인들이 여왕의 납심이 머지않았음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시간 상 인어공주 상(像)으로 이동할 수밖에.
그래도 무심치는 않았나 보다. 가는 길 여왕님을 위시한 왕실가족이 거주하는 덴마크 중심부를 지나친다. 여왕님 집무의 정부청사와 거주지가 위치하는데 청사에는 왕실기가 걸려 있지 않았다. 여왕님이 요트에 계시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여왕님은 생일이나 특별한 날 같은 경우 당신을 뵙고자 방문한 많은 시민들을 향해 발코니로 나와 손을 흔들며 왕실과 국민 간 서로의 따뜻한 교감을 나누고 있어 국민들의 신망도 두텁다고 한다.
올해 77세인 마르그레테 2세 여왕. 2007년 우리나라를 방문한바 있는 여왕은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는 있으나 가정적으로는 크게 순탄치만은 않는 듯. 자식들의 문제에서 최근 보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기도 했지만 남편 헨리크 공이 자신이 죽었을 때 부인 곁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해 의아함과 관심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올해 83세로, 결혼 50주년을 맞는 이 부부에 있어 남편 헨리크 공의 결정은 자신이 여왕과 동등한 배우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인데 헨리크 공은 1967년 왕위를 계승할 공주 신분이었던 마르그레테 2세와 결혼한 직후 '여왕의 배우자'를 뜻하는 '프린스 컨소트'(prince consort) 작위를 받았다.
이후 마르그레테 2세는 1972년 여왕으로 즉위했는데, 헨리크 공은 이때 자신의 칭호도 '킹 컨소트'(king consort)로 '승격'됐어야 했다며 계속해서 불만을 드러내다 이번에 그만 폭발(?)하고 만 것이라는 것이다. 부부 문제야 두 사람만이 아는 가정사 이지만 그럼에도 두 분이서 오순도순 빨리 화해해서 전생 뿐 아니라 이승에서도 해로하기를 바라고 싶다. 우리 사회에도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것 같은 ‘황혼이별(黃昏離別)’, 황혼에 별리(別離)를 서둘러야만 할 앙갚음 사이가 아니라면.
슬픈 인어공주
이번 북유럽 여행을 실행하기 불과 한 달이 채 못 되던 5월30일자 국내신문에 인어공주 동상 관련 소식이 실렸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을 대표하는 조형물 ‘인어공주 동상’이 페인트로 훼손됐다”는 보도내용이었다. 경찰이 극단적인 환경단체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고 덧붙였다.
보도에 난 인어공주는 붉은색 페인트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하면서 이런 소식을 들을 때면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르곤 한다. 어린 시절 동화책과 인연이 된 인어공주에서 드라마까지 결부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의 연인이 돼 시기와 질투에 의해 그리 된 때문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코펜하겐 북쪽 랑겔리니 부두에 설치된 인어공주. 공주의 동상은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 영감을 받은 조각가 에릭센이 그의 부인을 모델로 해 1913년 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위치에 설치된 이후 정치적 의견 표출을 목적으로 한 단체들의 동상 훼손이 반복돼 왔다고 하니, 철없고 우매한 인간들에 의해 용궁을 벗어난 귀하신 인어공주가 인간세상에서 얼마나 모질고 고행의 수난을 겪어야만 할 것인지 못내 짠하고 죄송스러워 진다.
우리를 안내한 ‘인어공주’ 가이드의 얘기에 의하면 언젠가는 목이 송두리째 잘려 나가 전 덴마크 국민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고도 한다. 그 말에 분노하지 않을 공주 사랑병 환자들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울컥해하며 한마디 씩 막 토해 나온다.
그런데 이런 망측한 일은 그 나라 위인들의 행위만도 절대 아닌 모양이다. 초를 치는 사람들은 인천공항을 통해 나간 우리 이웃도 당당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다. 특히 한국에서 관광을 온 신사들의 행위는 수위조절에도 애를 먹는 모양이라니. “언젠가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안내하면서, 사전에 교육을 그렇게 많이 했거든요. (주의교육)했는데도 인어공주 위에 올라가 목을 두르고 사진을 찍지 않나, 민망하게 만져서는 안 될 신체 부위를 더듬지 않나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창피해 ‘스미마셍 스미마셍’ 하면서 자리를 얼른 빠져 나왔어요” 한다. 느껴진다. 왜 ‘스미마셍’ 했는지를. 현지 관광객들이 일본인으로 알아들었으면 다행이란 생각으로 그랬단다.
그래도 한마디는 해야 할까 보다.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인어공주여서 일까, 남자의 입장에서 어떤 기대와 환상도 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도착과 함께 기대감의 표시인양 너나 할 이 없이 잰 걸음으로 다가갔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셔터가 바쁘게 터진다. 나 또한 일행의 손을 빌리면서, 셀카를 들이밀면서 공주의 모습을 내 얼굴 한 측면에 담고자 애를 썼기에 말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자 곁으로 다가가기를 얼마. 헌데 서양의 미인이라고 하기도 그랬다. 걷옷을 입지 않아 그대로 드러난 보통(?) 보다 작아 보이는 가슴, 동양의 미인 양귀비도, 서시도 아니었다. 춘향의 미색은 더더욱 아니었던 것 같다. 얼굴은 통통하고 볼은 튀어나오고 머리는 한 가운데 가리마로 뒤로 단정히 묶었지만 전체 몸에 비해 얼굴은 더 커 보이는데 표정은 또 왜 저러나? 멀리 떠나간 낭군을 오매불망 애타게 그리는 망부석의 눈망울도 아닌,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해 불만이 있는 듯 무심한 듯한 표정에 뾰로통 심술이 나 있는 모습이랄까?
하여튼 내 보기에는 그런 모습으로 나를 대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도 그런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니 왜 저렇게 생겼지” “별로네” “못 생겼다” 등,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랬지, 인어공주께서 들으면 얼마나 민망하게 시리, 조용히 얘기하지 왜 저렇게 직설적 이다냐?” 하는데, 하긴 그동안 이렇게 저렇게 수근 대고 숙덕거리는 얘기는 또 얼마나 들었으랴.
그럼에도 내 마음 속에 간직했던 인어공주를 직접 보고 함께 시간을 가졌다는 그 즐거운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 채 우리는 또 자리를 떠야 했다. 그런데 곁에서 누군가가 한마디 한다. “왜 인어공주 동상의 가슴이 얼굴에 비해 작은 줄 아느냐?” 하는 질문과 함께 “관광객들이 얼굴은 만지지 않고 가슴만 자꾸 만져 닳아서 그런 거라고” 답을 해 여자들은 ‘와’하고 웃지만 남자들은 못 들은 척 슬쩍 엷은 미소로 그 자리를 벗어난다.
여기는 발틱해... 크루즈는 바다를 가른다
서울 출발 D+4일
발틱해(海)의 태양이 참으로 눈부시다. 처음 타본 떠다니는 섬 크루즈는 그야말로 환상적. 2인실 객실은 연인끼리 마주 누워 바라보며 속닥이기 안성맞춤일 정도로 작은 침대가 나란히 둘. 승선인원이 많을 경우를 대비해 2개가 예비로 접혀진 2층 구조다. 화장실 안 샤워장이 접이식 칸막이로 설치되고 작은 책상 하나에 티 테이블, 위에 전화기까지 있어 움직이는 이동식 소형 호텔 룸이다.
섬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육지로 나오기 위한 유일한 이동수단(현재는)이 여객선이지만 이처럼 어마어마한 배는 우리나라 자체에 아직은 전무하기에 섬놈 입이 다물어지지 못할 밖에.
선실에서 5시40분 눈이 떠진다. 함께 한 룸메이트 우리 김종두 대장님은 어느새 복장을 다 갖췄다. 해돋이 보러 가려는 중이란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나를 쏙 빼놓고 혼자 갈 생각을 했단 말인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 6시15분 11층 갑판에 섰다 전 날 저녁 카페에서 맥주 시음을 한 후 갑판에 섰을 때 그 엄청난 바람에 쌀 한가마니 무게 내 몸마저 날릴듯하던 바람은 온데간데없다. 거센 파도도 봄눈 녹듯 스러지고 찬란한 햇살, 강렬하게 떠오른 태양이 나를 향해 그 빛을 토하고 있다.
서울을 떠나기 전 사이클 안장 위에서 암사 한강변을 통해 바라본 서쪽 하늘로 기우는 태양이나 지난 해 새해 1월1일 아침 동해바다 삼척 앞바다에서 바라본 태양과는 또 다른 감흥을 심어주는 발틱해의 아침 바다, 그리고 강렬한 햇살.
덴마크 코펜하겐 항을 떠나 네덜란드 오슬로를 향해 물살을 가르는 17시간 항해 선상 갑판에서 보는 2017년 6월13일의 태양은 그렇게 나에게 별스런 자신감과 생동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내(船內)를 돌아봤다. 3만5천톤 육중한 선박의 11층은 이 배의 지휘관이신 선장님이 파이프를 물고 지휘하는 조타실이고, 10층과 9층은 앞에서 보면 후미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칸칸이 이어진 객실, 그리고 8층 뒤편으로는 여행 중 지칠법한 승객들이 회포를 풀고 마실 나이트클럽에 카페가 자리잡고, 7층은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해 식욕을 돋우는 식당이다.
배 길이는 2백여 미터에 전체 크기는 축구장 3개 넓이의 규모라 하니 그 옛날(1912. 4.14) 첫 항해에서 비극적 생을 마감해야 했던 타이타닉호가 바로 이와 같지 않았을까?
발틱 해수와 합체를 이룬 태양광선이 일직선으로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속에서도 남(男) 저음(低音)의 안정화처럼 유유자적 바다를 가르는 DFDS SEAWAYS호의 조타실 위에서는 우리들 모든 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듯 힘차게 레이더가 돌고 2개의 육중한 기관실 연통에서는 미세한 연기가 바람결 따라 금방 사방으로 흩어지고 만다.
지금 이곳 시간은 아침 7시15분, 한국시각으로는 오후 2시15분, 지금쯤 서울의 회사 동료직원들은 한참 열심히 업무에 매진할 시각이다. 걱정도 있다. 회사를 떠나며 이달 말 시행할 워크숍 관련 임무를 부여해주고 왔는데 과연 후배직원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조금은 걱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며 애써 걱정을 삭이며, 식당으로 들어서니 반가운 일행들이 반겨 자리를 권한다. 우리 일행 맏 누님 격 고운님께서 이런 말을 하신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앞뒤로 툭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칼질하며 커피향에 젖은 채 호사를 누려보겠어? 동생도 실컷 즐기시게나. 아, 가기 싫다.” 그러자 맞은편 동생 격이 맞장구다. “매일 매일 (식사를)준비하고 (식탁을) 차려주기만 하다가 이렇게 주는 걸 받아 대접만 받으니 너무 좋아요. 하하하 호호호” 상큼한 웃음이 식탁 위를 맴 돌며 맛을 더해준다.
이제 앞으로 30분 정도면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도착예정이다. 대개의 여행객들도 그러지 않을까 싶지만 이번 북유럽 여행은 나에게 있어서도 인생의 한 획을 긋는 시점이 아닐까 한다. 동서유럽이나 미주,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을 누비는 여행은 아닐지라도 꿈으로만 여겨지던 크루즈까지.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있을지 기약할 바 없지만 지난 밤 체구를 날려버릴 듯 갑판을 휘감아 돌던 거센 바람, 카페 창밖으로 가물가물 저물어 가던 석양과 노을, 그리고 다시 여명(黎明)에 찬란하게 떠올라 아침 바다를 붉은 망토 빛으로 장식하던 현지의 촘촘한 햇살.
지금 이 순간도 떠올리게 된다. 백야(白夜)가 절정으로 이어지던 한 여름 아름다운 발틱해의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은 바다를 가슴에 품으면서 ‘오늘 이 바다에서 마주하고 다짐했던 강렬한 태양에의 감흥을 결코 잊지 말자’고. 며칠 전 러시아 ‘아르바트’ 거리에서 대했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의 싯구를 가슴에 새겼던 그 순간과 마찬가지로.
뭉크(Edvard Munch)의 ‘절규’로 시작한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
“뭐더라, 뭐였지? 그 그림이 맞지 아마”. 차 내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떠올린 ‘절규’는 현장에서 바로 확인되었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 도착해 미처 그에 대해 공부는 못했지만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2.12 - 1944.1.23)의 작품 제목 그대로 표현한 ‘절규’ 등 숱한 그의 작품과 삶의 궤적을 배비하면서 나와 우리 일행은 북유럽 꼭대기의 나라, 산악과 빙하, 터널이 지천으로 깔린 동화 속 해적의 본고장 노르웨이 여정(旅程)에 들어섰다.
뭉크의 대표작 ‘절규’. 괴기스럽게도 보이지만 특히 불도 꺼진 한밤중 누군가 그 모습으로 변장해 나타난다면 어떨까 싶을 정도의 섬뜩한 표정의 그림. 보는 이의 감성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불우했던 가정사와 현실 속 내면의 세계, 자연환경에서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 고통, 죽음 이런 것들이 총 망라된 바로 그 자신의 세계이기도 했다는 절규.
그를 후원했던 사업가에게 선물로 준 작품 ‘절규’는 당시 뉴욕 경매시장에서 1200억 원으로 세계 최고가를 기록했다고 한다. 초기작품은 지금 경매시장에서 2000억 원이 호가할 것이라고 하니 가히 벌어진 입을 어찌 추슬러야 하나.
설명에 의하면 이곳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총 2만여 점인데 2천점은 유화, 1만8천점은 목판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우리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화풍(畵風)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뭉크의 작품 ‘마돈나’ ‘생애춤’ ‘사춘기’ 등을 보면서 독신으로 홀로 생을 산 뭉크의 정신세계를 조금은 이해가 될 듯도 해 보였다.
이내 오슬로 시청으로 차는 달린다. 유명한 노벨평화상이 시상되는 곳이다. 노벨(Alfred Bernhard Novel. 1833~1896)의 유언에 따라 1901년부터 시작된 이 상은 사망일인 12월10일 시상하며 노벨평화상만이 이곳 오슬로 시청에서 수여된다. 다른 상인 문학상, 물리학·화학·생리의학·경제학·문학의 6개 부문의 상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수여한다.
시청 대강당을 돌며 2층 평화상 심사위원들의 집무실을 돌아보는데 관람객들이 줄지어 뒤를 잇는다. 자칫 하다간 우리 일행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 여기서 연구 활동도 이어지고 다양한 일들을 벌이고 있다 한다. 오슬로 시청에서는 1990년부터 시상하고 있는데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대한민국 인권과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한 공로로 평화상을 수상해 우리에게도 인연의 연결고리를 부여해주고 있는 곳이다.
시청 대강당은 시민들에게도 개방해 매년 성인식이나 결혼식도 이뤄진다고 한다. 강당 벽화는 유럽 건축물 내 단일벽화로는 제일 큰 벽화라고 해 너도나도 사진촬영에 바쁘다. 벽화는 노르웨이 종교에 맞게 단조롭고 치장되지 않는 소박한 모습들로 이 나라 국민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그림 중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의 활동 모습도 그려져 있다.
나는 그 그림들의 면면을 보면서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국내외에서 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 군경에 붙잡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해 반신불수가 되거나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결코 대한국인의 의기(義氣)를 잃지 않았던 독립군 선열들을 생각함에 가슴이 뭉클 처연해지기도 했다.
노르웨이 국가 면적은 우리나라의 무려 3배 크기인데 인구는 자그마치(?) 520만. 평방미터당 거주인구는 6명 수준, 1인당 GDP는 8만8천 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다. 이 얼마나 부러운 북유럽 국가의 일원인가. 하지만 이 곳 오슬로 외에는 사람구경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도 그렇겠지만 출산장려책이 잘돼 복지혜택 또한 그만이라고 한다. 하긴 나도 깜짝 놀랐지만 세계 4대 산유국에 안정된 사회분위기, 여성인권이 높아 여성의 목소리가 남자를 압도하고 과격성까지 더해진다고 하니 역시 여성들은 한국을 포함해 세계 어디를 가나 살맛나는 세상을 이끌고 있는 모양이다. 여성이 제대로의 권리를 향유하고 단단해야 진정한 복지가 이룩된 나라라고 하지 않겠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서인지 2004년에는 여성단체들이 나서 “병역의무를 져야 한다”며 평등하게 병역의무를 지고 있어 그야말로 성 평등이 보장된 나라란다. 전체 의회 152석 중 82명이 여성의원이고. 남자보다 그 숫자가 상회다. 이 정도면 여권(女權)신장이 아니라 여권이 드센 나라, ‘여자 바이킹 후예답다’ 라고 해야 할까? 출산휴가도 2년에 이중 3개월은 남자도 사용가능하다. 자연스럽게 웃통을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잔디밭 여성을 보면서 ‘세긴 세구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대한민국도 세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러모로 엄청나게 대비되는 나라다.
남성 성(性)의 상징 비겔랜드 조각공원
‘이런 공원도 있구나’ 싶다. 무려 35년. 하기야 유럽의 대 저택이나 건물들은 몇 십년 아니 몇 백 년에 걸쳐 건립된 곳들이 허다하게 볼 수 있으니 한 사람의 조각가에 의해, 다른 어떤 예술인의 참여를 거부하고 오직 그와 자신의 수제자, 석공 한 명 등 세 사람이서 명품 조각거리를 일궜으니 이 정도면 세 사람이 주목을 받을 게 아니라 그 오랜 기간 조성되어 가는 과정을 이해하고 지켜준 이 나라 노르웨이 당국과 국민들의 놀라운 인내와 끈기가 그저 부럽고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된다.
뭉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구스타프 비겔란드의 조각상은 모두가 나체, 벌거벗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작품의 주제는 ‘인생’. 공원에 진열돼 전시된 190여 점의 작품들은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기쁨과 환희, 즐거움도 있지만 그 보다는 삶의 무게가 버거운 고뇌를 더 솔직하고 진솔하게 담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기들이 태어나는 순간 고고의 함성(울음)으로 세상을 일깨우는 건 세상에 자신의 탄생을 알리고자 하는 이유도 있지만 세상 삶의 무게가 그만큼 클 것임을 알기에 울음을 터뜨린다는 얘기도 있으려니 줄줄이 늘어선 남녀 군상들은 모두가 잘 생기고 신체 건강한 모습에 비해 인간 본연의 고통스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비겔란드는 원래 허약한 체질이었다고 한다. 체구 자체가 왜소해 거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의 세계만은 이와는 반대로 아름답고 신선하며 신체와 정신의 건강미를 함축하고 있어 자신이 갖지 못했던 인간 신체 구조에의 아름다움을 조각을 통해 대리충족케 하지는 않았을까?
작품 하나하나가 주는 느낌은 예술에 둔중한 필자에게도 뭉클하게 다가오게 하고 있으니 역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에게는 희노애락(喜怒哀樂) 그 자체가 하나의 삶의 가치와도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개똥철학을 뇌까리게 한다.
190점 작품들은 저마다가 각기 다른 모습을 담고 있다. 자신마저도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일어날까?’ 할 정도의 갖가지 형상으로 아침을 여는 이에서 저녁으로 잠들게 하며 오가는 시민들을 맞는다. 많은 작가들이, 예술작품들이 추구하는 독특한 의미를 담고 또 전달하지만 여기서도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가 지나온 스스로의 삶과 생활을 짚으면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생각들도 정리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기도 했다. 나만의 생각이라 할지 몰라도.
노르웨이는 우리나라보다는 40여년 앞서지만 신생국(1905년 10월26일 건국)이다.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반부를 차지하는 나라로 14세기 후반부터 덴마크의 영향 아래 있었고 1814년 이후부터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1905년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나라다. 그래서인지 문화측면에서도 이들 나라에 비해 뒤쳐져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각 작품 등을 도처에 많이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
비겔란드 조각 공원도 그런 일환이며 오슬로시가 비겔랜드에게 문화 공간 조성을 위한 전권을 주었다고 한다. 모든 시혜를 받으며 작품을 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이 공원은 그의 생전 개관을 보지 못하고 1952년 문을 열었다. 비겔란드는 1943년 사망하였으니 제대로 눈을 감기나 했을까, 안타까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한 말처럼 비록 작가는 생전에 그 빛나는 개관을 보지 못했어도 그가 남긴 작품에 세계인들의 환호와 탄식이 이어지고 오늘도 내일도 늘 마주하고 있으니 문화예술이 주는 감동은 그래서 영원히 사는 것인가 한다.
하나의 작품으로 예를 들어 보자. 작품 중 ‘돌탑’은 121명의 인간들이 마치 지옥을 연상하듯 아귀다툼의 현장을 표현하고 있다.
지옥이 아니라도 너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을 과장된 기법과 교훈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도우며 살아도 부족할 판에 ‘내가 먼저’를 주장하며 서로 끌어 내리기 위해 안달하는 모습이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크게 갖고자 상대를 괴롭히고 물리치려는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 삶의 모습이 저런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한다. 돌탑은 그래서 그 자체로서 역발상이다. 탐욕으로 점철된 우매한 인간들에게 강한 깨우침을 주는.
조각공원을 뒤로 다시 우리는 차에 올랐다. 다음 행선지는 ‘보고’라고 하는 동네다. 가는 도중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빙상경기장을 멀리서 눈으로 훑으며 휴게소에 들려 전원이 볼 일을 보고 또 달린다. 여기서 보고까지는 약 5시간 거리. 노르웨이는 덴마크에 비해 산이 참 많다.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산지다. 차량은 씽씽 잘도 달리는데, 아차 북유럽 여행을 하면서 공통으로 느낀 것, 관광버스 문이 앞뒤 하나씩 2개에 대형차량이다. 그래서인지 더 깨끗하게 보이고.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엔 둥실둥실 흘러가는 뭉게구름이 참 멋스럽게 다가온다. 지쳐가는 여행객들에게 피로감을 해소케 하는 청량제 구실도 해 주려는 것도 같고.
네덜란드 연어에 릴레함메르 벤치마킹
이번 여행에서 연어는 ‘언제 이렇게 먹어볼까’ 할 정도로 원 없이 먹었다. 오슬로에 연어 냉장센터가 설치돼 인천공항까지 직항으로 보내진다고 한다. 사람은 직항편이 없어 인접 국가를 경유해서 가야하지만 귀하신 몸 연어는 곧바로 직항로를 이용 수송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고등어도 많이 잡혀 한국으로 수출한다. 청어조림도 한국인들이 먹기좋게 짜지 않아 감자나 빵에 얹어 먹으면 맛있다고 하는데 청어조림을 먹었는지는 별반 기억이 없다.
도로양편으로 휙휙 스쳐지나가는 나무들은 쭉쭉 뻗어 인상적이다. 들녘에 파랗게 늘어선 것은 목초지다. 원유(原油)가 발견되기 전까지 네덜란드는 국민생활이 넉넉지 못해 염장요리가 발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이 짠 편이지만 그래도 인접국에 비해서는 덜 짠 편이라고. 비교적 짠 식성이라는 내 입맛에도 소태같은데 짠 편은 어느 정도나 될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지금 시각은 3시55분. 목초지로 빙 둘러싸인 마을과 산과 나무로 어우러진 모습이 여느 곳과 다를 바 없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연결되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노르웨이 시골의 자연경관은 참 보기가 좋다. 그래서 펄프나 제지공장이 발달 되고 여행의 묘미도 경관 그 자체를 보는 여행이라나.
그러나 평화롭게 보이는 목가적(牧歌的) 풍경의 이 나라도 기후변화가 무쌍하고 강우량은 높은데 일조량은 상대적으로 낮아 1년 중 화창하게 갠 날은 한 달 보름여 남짓이라고 한다. 나머지 10개월은 거의 흐리고 우중충한 일기의 연속이다. 여기서 안 사실 하나, 이런 기온이 계속 되다보면 이혼율도 높아지고 각기병(脚氣病)으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또 많다는 것이다. 해서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오메가3>를 무상급식 지원한다고 한다. 그래서 노르웨이 <오메가3>가 유명하고 우리 일행 중에서도 이를 많이 사기도 했다.
창밖을 보며 느낌을 메모지에 적는데, 선뜻 다리를 지나치고 있다. 보통 다리가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아 궁금증이 이는 순간 “지금 건너고 있는 이 다리가 무슨 다리냐?”하는 가이드의 자문(自問)과 함께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이가 긴 강의 다리로 무려 35km, 강폭도 넓지만 송어가 유명한 강으로 수량이 풍부한 나라답게 1급수 강”이라고 설명이 이어졌다.
거기에 저 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가 유명한 릴레함메르 시(市)다. 인구는 2만5천 명의 작은 미니도시. 그러나 이 나라에서 이 정도 인구면 대단히 큰 도시에 해당된다고 한다. 강 왼쪽으로는 녹음 짙은 산이 우거지고 오른쪽으로는 한없이 강물이 이어지는데 버스도 고단한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우리들은 너나없이 멀리 릴레함메르 시를 배경으로 찰칵 찰칵 사진촬영으로 기분을 내기도 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도 불과 몇 개월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준비위 관계자들이 이곳을 자주 방문해 벤치마킹을 많이 했다고 한다. 특히나 검소한 나라답게 올림픽도 기존의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해서 아주 검소하게 올림픽을 개최했다고 한다.
릴레함메르를 통과하면서 평창 올림픽이 국민적 공분(公憤)을 산 엇나간 한 아녀자의 농간(최순실 게이트)으로 국민들의 관심이 시들어 어려움이 많다는 당국의 우려가 크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의 성원과 관심으로 3수 끝에 내년 개최되는 평창 올림픽이 반드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마음 깊이 기원했다.
산악지대 산골마을 ‘보고’
조그마한 마을이지만 아름다운 동네가 눈길을 끌었다. 마을을 통과하는 도로를 기준으로 한 곳은 평지에, 다른 곳은 경사가 급한 곳에 조성됐는데 참 예쁘게 자리 잡았다. 저녁 7시30분 도착과 동시에 호텔(VAGA) 식당에 미리 준비된 맛깔스런 식단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배정된 방에 여장을 풀었다.
배도 불러 오겠다 이젠 딱히 할 일도 없는 상황. 호텔을 나와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산비탈을 연하여 가옥들이 배치됐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가옥이다. 집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국내에 지은 집들과 엇비슷하게 보였다. 동네를 관통하는 냇가는 산골마을 답게 급류로 쏜살같이 흘러내린다. 지금 한국은 가뭄이 극심해 도시 농촌 가림 없이 애타게 비를 기다리며 고생이 많은데 이렇게 콸콸콸 쉼 없이 흐르고 흐르는 물이 우리나라 도처로 흘러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꽉 차오르기도 했다.
동네를 가볍게 돌고 방으로 돌아오니 밤 11시가 가깝다. 그런데도 하늘은 아직도 쾌청. 1시간 정도 더 있어야 어두워 질 것 같고, 3〜4시간 후면 또 곧 밝아질 것이다. 백야(白夜)의 절정이 21일 경이라고 하니, 지금 서울의 시각은 새벽 5시가 넘어설 시간일 게다. 내일 일정은 빙하(氷河)로 가는 여정. 인솔 단장님과 가볍게 서울에서 가져온 팩소주 2개로 마음을 나누고 잠자리에 든다.
현지에서 작성한 노트에는 또 이렇게 메모돼 있다.『지금 시각 밤 11시17분. 서울보다 7시간 늦으니 지금 서울은 6시17분(아침). 서울에 있다면 지금 눈을 뜨고 이불속에서 꼼지락 거릴 시간이다. 유리창 밖 경사진 밭의 녹색 초지가 참 보기 좋다. 녹색이 나에겐 제일 좋은 색이라고. 이젠 자야 되겠다. 내일 위해』라고.
아침 6시 기상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어제 제대로 보지 못한 마을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밖에는 어느새 일어난 일행들이 동네를 돌며 운동하는 게 보인다. 동네를 돌면서 언뜻 스치는 생각은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산악인들이 베이스캠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그런 마을이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피오르드(fjord), 빙하를 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유지가 바로 그런 마을 ‘보고’라는 것을.
동네는 담장마다 꽃과 작은 정원수들이 잘 정돈돼 심어지고 집들도 앙증맞게 동화 속에 나오는 작은 인형의 집과 같아 보인다. 마을에는 교회인지, 아니면 장례식장인지 뾰족한 첨탑이 있는 건물 좌우측 공터로 수많은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마을공동묘지 인듯한데 평화스러운 마을 분위기와도 같이 이곳에 영면해 안식(案息)을 찾고 있는 누군가의 부모님, 자녀, 형제들도 영원한 평화를 찾고 있지 않을까 하며 정중한 마음으로 예(禮)를 보내기도 했다.
한국 아줌마의 억척, 그 위대함
오늘 아침식사 시각은 7시30분, 출발시각 9시30분. 식당으로 들어서자 아직 자리가 많이 비어있다. 거의 함께 자리 잡아 식사하는 서 이사님, 권, 배 누님 등과 정담을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한 분께서 뚝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입술에 손을 대며 ‘쉿~’ 차에서 먹을 먹거리, 간식을 챙긴 것이다. 빵이며, 튜브에 담긴 ✶✷✸ 등.
잽싸게 넵킨에 둘둘 말아 담자 주변에서 웃으며, “빨리 챙겨요” 하니 그 와중에도 젊잖게 눈길을 좌우로 돌리며 “아니야, 저 사람은 주인 아닌 것 같아” 웃음으로 답변하며 주섬주섬 담으니 좌중에 웃음이 뻥 터진다. 그렇잖아도 어제 인솔단장님께서 ‘그런 일이 있으면 나라 망신’이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와 함께 하는 식탁에서 일어난 일인지라 나 또한 더 크게 웃음이 왁자하게 터지고 만다.
해서는 안 될(?) 反 에티켓이지만 때로는 반복되는 일상으로 다가와지는 여행지에서 자칫 무료하고 건조해지는 분위기를 달래고 웃음을 선사하는 反 에티켓이 순간의 피로회복제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아줌마의 위대함이라고 해야 할까.
D + 5
가이랑게르 협곡 피오르드(fjord), 절경의 폭포 만나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지식으로 유식(有識)도 조금은 쌓았는지 모를 일이다. 대표적인 게 피오르드(fjord)가 뭐란 것도. 빙식곡(氷蝕谷, glacial trough ․ 빙하작용에 의해 형성된 계곡으로 골짜기의 양 측면은 경사가 급하고 바닥은 평탄한 U자 형태이다. 히말라야 산맥이나 알프스 산맥 등의 높은 산악지대에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빙식곡에 해수가 유입되면서 생기는 기다란 만을 피오르라고 한다)이 침수하여 생긴 좁고 깊은 후미라는 것도.
하긴 고교시절 지리과목인지 지학시간에 배운 것 같긴 하지만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 턱이 없고. 한마디로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온 곳이다. 그것을 제대로 현장에서 체험학습을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여행의 뽕은 뽑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피오르드>냐 <호수>냐의 구분, 경계는 갈매기가 나느냐 날지 않느냐, 있느냐 없느냐로 확인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피오르드는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드로 그 길이가 무려 204km 가량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시각 현재(12:15) 가이랑게르 피오르드에 섰다. 해발 1,000미터 지점이다. 곳곳이 눈이 녹은 물로 넘친다. 우리가 1시간 전 통과한 도로는 3주 전에 개통됐다고 하는데, 위와 아래의 기온차가 무려 5〜10도 차이 난단다. 현재기온 영상 10도. 산 정상의 눈은 11월에서 12월까지 녹다가, 녹아내리는 과정에서 다시 눈이 내려 쌓이고 현재 도로변 쌓인 눈의 높이도 1m 라고. 또 지나가고 있는 도로상 위도는 미국 알래스카, 러시아 시베리아와 동일한 위도(緯度) 60~70도선.
스키(ski)의 나라답게 한 겨울 스키를 타는 남자고 여자를 막론하고 걸어서 산꼭대기로 올라가 1,000m 산자락을 따라 활강하며 스키로 내려온다고 한다. 어쩌면 고행(苦行)과 스릴은 동전의 앞뒷면이거나 양면성이 있는 건 아닐는지. 영화나 TV에서 보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지금 우리는 1,000m 계곡 정상에 서 있다. 피오르드 계곡은 완전 급경사. 1000m 저 아래는 봄인데 지금 위쪽은 겨울이다. 6월의 한 여름에 민들레 피는 봄이 있고, 눈 녹아 흐르는 겨울이 함께 공존하고 있으니, 이 또한 위대한 대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또 다른 은혜와 혜택이라 할까 보다.
‘경사’ ‘경사’ ‘급경사’ 우와 장관 중에 장관이다. 이를 어찌 표현해야 잘 한다고 할까.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아니 고개를 완전히 젖혀 90도 경사 절벽 위를 본다. ‘오~ 자연의 위대함’이여.
저 아래 피오르드에는 거대한 호텔이 하나 물위에 떠 있다. 8만 톤급 크루즈 선박이다. 저 거대한 배가 협곡의 만(灣)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유유하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곧장 유람선에 올랐다. U자형 협만에서 유람선에 몸을 싣고 신천지를 향한다. U형 곡선으로 된 피오르드는 세계에서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어찌 이런 행운이 내게 올 수 있단 말인가? 내 돈 내고 내가 왔지만 돈만이 있어 가고 올 수 있는 곳은 다 아닐지니,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게 해준 하나님과 일행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 가득해진다.
수없는 장관(壯觀)에 장관이 연속적으로 연출되는 곳곳이지만 여기 또한 7개의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자리 옮겨가며 이런 저런 포즈로 사진을 촬영하는데 왼쪽에 펼쳐진 깎아지른 절벽위에 덩그라니 집 한 채가 눈을 사로잡는다.
설명에 의하면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1960년대까지 산꼭대기에서 살구, 복숭아 등 과일농사와 염소와 양을 치며 한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외부와의 연결은 꼭대기에 올려놓은 사다리 하나뿐이어서 관공서에서 세금을 거두러 오거나 빚을 받으러 와도 사다리를 끌어 올려버리면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어 허탕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별스런 인간 아니면 아마 엄두를 낼 수 없는 그런 곳, 하긴 세상에는 별난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 왜 그런 사람이 없을 수 있겠나 생각도 들지만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진다.
어느덧 바람을 타고 뱃전까지 떨어지는 폭포수를 통과하며 잔잔한 물결을 헤치는 뱃전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와 우리 머리 위를 맴돈다. ‘아~하 갈매기, 그래 여기가 바다구나’ 강물이 아닌 바다임을 확인시켜준다.
여기서도 놀란 사실 하나는 배에는 우리 외에도 나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 유람선 상에는 외국인보다 한국인이 훨씬 더 많았다. 영어 목소리는 한국말에 묻혀서인지 들리지 않는다. 협곡을 메아리치는 장탄사도 한글, 세종대왕님께서 남기신 ‘ᄂᆞ랏ᄆᆞᆯ싸미 뒹귝에....’ 쩌렁 울린다. 유람선 선내 방송에도 한국어 방송이 나오고 화장실에도 우리 글로 쓴 ‘주의사항’이 부착돼 있어 한편으로 낯 뜨겁게 만들게도 하지만 다시한번 세계로 웅비하는 한국의 저력, 한국인의 위상을 생각게 한다.
유람선에서 하선한 우리는 오락가락 내리는 빗발과 안개 자욱해진 산허리 삼림들을 그윽해진 눈망울로 바라보며 달리는데 메모장에는 또 이렇게 적혀 있다.
높은 산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맑고 고운 호수
빗물에 어우러지는 싱그러운 초록빛깔 향연!
안개 자욱한 기운이 산허리를 감싸며
눈부시도록 하얀 눈의 세계로 함께하는 장관
노르웨이 관광의 대명사로세!
빙하(氷河), 내가 걸어온 길
오늘 우리가 게이랑게르 피오르드를 통해 서쪽으로 나아가면 대서양으로 접어드는데, 잠시 차를 멈추고 해결 할 일을 보고자 주변 경관을 살핀다. 해발 600m 지점. 피오르드를 감싸고 우뚝 솟은 절벽과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군데군데 모습은 한 폭 그림이다. 어디라 할 것 없이 보는 곳 마다, 가는 지점마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게 바로 자연이요, 경치며 절경인데 둥둥 떠서 흘러가는 저 얼음덩어리는 또 어떤가.
기원전 2만 년 전 이 지역 눈의 두께는 100∼200m 높이의 눈 덮인 산이었다. 지역 모두가 고산지대이고 눈이 녹으면서 그 물의 힘으로 협곡이 만들어지고 현재의 두께만도 60∼90미터에 이른다고 알려준다. 눈으로 덮인 면적도 서울시 크기라고 하니 이제는 크게 놀라 하지도 않는다. 그저 고개만 끄덕 끄덕일 뿐.
지금 지구 온난화 문제가 남의 얘기가 아닌 당장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북극권의 빙하(氷河)가 다 녹아내리면 적도(赤道) 부근 섬 국가들이 물속에 잠기게 된다는 사실. 그런데도 우리 인간들은 현재적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자연 환경을 훼손하며 후대를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 그 원성을 어찌 할려나.
<빙하박물관>에서 3D영상을 통해 산꼭대기부터 녹아내리는 빙하 붕괴모습을 보니 실감이 된다. 조각조각으로 쪼개지는 장면, 붕괴돼 계곡으로 떨어지는 모습, 많이 부서지고 엄청난 수압으로 흘러내리는 얼음덩이들, 마치 새로 건물을 짓기 위해 발파를 통해 파괴되고 마는 건물의 잔해 같다는 생각이 든다. 파괴되는 지구와도 같고, 그 지구 안에서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바로 나와 우리의 미래 세대들 같기도 하고. 파괴되는 환경을 살리는 건 그 누구가 아니다. 바로 우리,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이 밤을 맞으며
이 시각 지나는(19:39) 여기는 송달마을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주립대학이 있는 행정중심지다. 지금이 휴가철이라 휴가 가는 차량들이 즐비한데 가는 곳마다 캠핑카들로 넘쳐난다. 송내 피오르드, 바다를 건넌다. 탑승지에서 하선지역까지 15분, 카-페리를 타고 건너편 숙소가 있는 곳을 향해 거리에 비해 거대한 배가 출항한다.
난 깜짝 놀랐다. <송달> 선착장에서 <내르달>까지는 15분 거리다. 하지만 양 지역을 오가는 배는 기가 꺾일 정도로 크기에 압도된 때문이다. 여객선에 차량만 130여척을 싣는다고 한다. 그것도 20분 단위로 2척의 배가 손님을 실어 나르는데, 이 지역은 바닷물이 해안으로부터 150km 내륙 깊숙이 들어와 해수와 민물이 교차하고 있어 노르웨이에서도 유명한 송어 민물낚시가 유명한 곳이란다. 거기에 경관마저 수려하고 산악지역인 플롬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이기도 해서 거주인구는 800여 명에 불과하지만 주립병원이 있어 우리가 이용한 여객선을 통해 출퇴근하는 이들이 대부분 이라고 한다.
거기다 여기도 겨울이면 눈이 엄청난 폭설로 내려 우리가 묵는 <린드섬 호텔>도 1871년에 지어진 유명호텔인데 1년 중 겨울을 제외한 6개월만 문을 연다고.
저녁 8시가 넘어 <린드섬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푼 우리들은 준비된 식당에 서 빵과 야채수프 고기 등으로 배를 채우고는 하루 여정을 마무리 했다.
D + 5 <6월15>
플럼과 뮈르달
<린드섬 호텔>에서 개운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은 우리들은 오늘 목적지 플럼과 뮈르달 산악지대를 향해 발진을 서둘렀다. 노르웨이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면적의 70%가 산악지대다. 해서 도로도 산과 산을 뚫어 길을 내는 터널이 많다. 터널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룻밤을 지샌 <래르달>도 우리의 옛날 두메산골 마냥 아늑한 지점의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어찌 보면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펀치 볼>과도 닮은꼴 같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이런 곳에 유서 깊은 오래된 호텔이 있다는 것도 조금은 믿기지 않지만 버스에서 바라본 강가에는 낚시꾼들이 산란을 위해 상류로 오르는 연어잡이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저 꾼들은 전부 출장소에서 허가를 받고 하는 낚시꾼 들이라고 친절한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진다.
래르달 터널로 들어섰다. 현재 지구상 최장 자동차 터널이라고 하는데 길이가 24.5km. 우리나라도 올해 개통된 서울-양양 고속도로 중 양양터널이 10.96km다. 양양터널을 알게 된 것은 6월25일부터 7월5일까지 필자가 근무하는 회사가 매년 시행하고 있는 ‘전국 대학생 휴전선 전적지답사 국토대장정’ 해단식에 참석하기 위해 7월4일 달려본 적 있는데 역시 10.96km 터널이 길기는 길었다. 그런데 <래르달 터널>은 이보다 2배 이상이니 가히 짐작 될 줄 안다.
오늘은 기차관광이다. 송내 피오르드의 한 지점에 위치한 플럼은 예전 은(銀)광산 채굴이 끝난 지역을 관광지화 한 곳이라고 한다. 폭포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기차로 바꿔 탄 우리는 시속 20km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모처럼 저속 기차관광을 즐기며 국내에서 해보지 못한 또 하나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경포대 인근 TV에서 본 동일한 여행도 해봐야지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 그런 날이 올까 하면서 이곳에서의 경험을 머리에 깊이 새기고자 했다.
<뮈르달>로 향하는 차안에서 내려다 본 바깥풍경은 ‘자연이 저렇게 형성될 수 있구나’ 하는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왼쪽으로는 깊은 계곡과 장중한 산들이 꼬리를 물고, 오른쪽으로는 촘촘하지만 굵기가 그다지 굵지 않은 나무들이 무성한 초록으로 물들여 아침기운을 더더욱 상쾌하게 한다.
터널의 철로가 오래돼 나이를 먹어서 그러는지(1940년 개통) 귀청을 자극하는 소리가 별나게 요란스럽다. 그럼에도 보이는 곳은 폭포, 폭포, 폭포 천지다. 기차는 천천히 진행하는데 반대방향에서 내려오는 또 다른 기차가 있어 잠시 휴식을 취해 간다고 차내 방송이 전한다. 역시 기차도 겸손하지만 사람도 겸손해야 할 것임을 잊지 않게 가르쳐 주는 것 같다.
장관 중의 장관(壯觀) 플럼 폭포
인터넷을 뒤져보니 플럼 폭포에 대한 예찬이 대단하다. 역시 무언가를 보는 눈은 대개가 비슷한가 보다. 살짝 관련내용을 가져와 보니
“노르웨이 내에서도 산골짜기 작은 마을 플럼(Flåm)은 송네피오르드의 관문으로 매년 45만 명이 넘는 여행자가 찾고 있는 곳이다. 플럼에서는 5월부터 9월까지 매일 9~10회 가량 플럼 기차(Flåm Railway)를 운행하는데 첫차의 경우 금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 아침 7시30분에 출발한다. 플럼 기차는 송네피오르드(Sognefjord)의 지류인 에울란드피오르드(Aurlandsfjord) 가장 안쪽부터 철도길이 시작되어 뮈르달 역 867m 벼랑까지 이어진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 지(National Geographic Traveler Magazine)는 플럼 기차를 유럽 열차여행 톱10으로 꼽았으며, 2014년에는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 Traveler)이 세계 최고의 열차여행으로 명명했다.
한편 플럼 기차의 출발지인 송네피오르드는 204km 길이를 자랑, 세계에서 가장 긴 피오르드로 꼽힌다. 무려 20억 년 전에 생긴 것으로 알려진 송네피오르드는 최대 수심이 1300m에 이르러 웬만한 대형 선박도 너끈히 통과한다. 웅장한 산기슭 아래 푸른 초원에는 작고 예쁜 박공지붕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어 동화 속 나라를 연상시키는 플롬.”
인터넷 기사처럼 우리 또한 첫 차 7시30분 출발을 기억케 한다. 어느 폭포가 이 정도일까? 절벽으로 둘러쳐진 산 중간부위에서 떨어지는 낙차 큰 폭포, 그 아래 큰 폭으로 넓게 이어진 분지 형 초원에는 동화나라를 연상케 하는 아담한 지붕들이 눈을 시리게 한다. 이른바 박공지붕이다.
우리나라의 아기자기한 폭포와는 격이 다른 노르웨이 수많은 폭포들, 그러나 우리나라 폭포라고 꼭 아기자기한 것만도 아닌 것을 난 봤다.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 비밀의 폭포가 바로 설악산에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기간 출입금지구역으로 통제되었다가 지난 8월말 TV에 조차 45년 만에 방영된 설악산 토왕성 폭포(3단으로 이어짐)다. 그 압도적 경관과 장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우리나라에 저런 어마어마한 폭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탄사만 연속으로 내 지를 지경이었다. 우리 산하 곳곳에 미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천하절경(天下絶景)의 비경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생각게 됨에 아름다운 내 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과 경탄이 함께 쌓여지는 것 같기도 했다.
각설하고 기울기가 근 5도 경사를 이룬다는 차 안에서 보이는 도처의 강한 물줄기와 물보라를 뿌리는 폭포수에 눈이 호사를 누리며 환호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차창 안으로까지 물 파편이 떨어지는데 이 물세례가 요정(산속에 나타나는 요정이 남자를 유혹해 산속으로 끌고 간다는 퍼포먼스 주인공2명)이 뿌려대는 유혹의 눈물이라나.
1시간 이어지는 기차 폭포관광이지만 시간은 금방 흘러가고 만다. 피오르드에 정박해 어제 우리가 가이랑게르에서 봤던 크루즈 선박 MSC호를 보면서 1600년대 지어진 건물들이 줄지어 상가를 형성하고 있다는 베르겐(BerGen) 을 향해 차는 힘차게 바람을 가른다.
베르겐 우리 교민은 약 20명 정도라고. 우리가 들어간 식당도 교민이 운영하는 한식당인데 작은 경마장이 바로 곁에 위치해 있었다. 이 식당도 관광객이 많은 성수기 여름에만 건물을 임차해서 운영한다고 귀뜸 해준다. 한국 관광객이 자주 찾기는 하지만 현지에서 재료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잠깐의 경우이지만 정황을 보니 실제 한국음식을 준비하는데도 애로가 있어 보였다. 오랜만에 한식을 먹는데도 밥이 부족하다고 해 애써 아닌 척 하며 일부러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수(食數)계산을 잘못 한 건지 우리가 밥을 더 많이 먹어서인지, 그럼에도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에서 밥이 부족하다는 말이 조금은 생경하게 다가왔다.
어찌됐던 배는 채웠으니 이젠 또 출발!
이곳 베르겐은 1600년대 상인 결사체가 결성되면서 단체 활동을 위해 거리가 조성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옛날 가옥형태가 잘 유지되고 있어 <유네스코>에 도 등재 돼 있다고. 기후는 연중 비가 오는 날이 대부분으로 난류 대다.
곤돌라를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 해발고도 120m 전망대에 올라 발아래 항구 저 편을 바라보니 수평선 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바다, 대서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베르겐 중심가는 크지 않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게 다라고 하니 구태여 발 아프게 여기저기 다닐 필요도 없을 것 같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여기도 독일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모든 거리가 파괴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거리만은 무사했는데, 베르겐 거리를 지키던 당시의 상인들이 “‘조상’이 지은 이 건물만은 파괴되어선 안 된다”고 하는 간절함에 독일군들이 인정을 베풀어서 인지 무사할 수 있었다고 전해준다.
태양이 쨍쨍 내리쬔다. 바닷가로 내려가 주변을 어슬렁대며 이곳저곳 눈길을 던지며 바라보는 손목시계는 현재 오후 2시30분을 막 지나고 있다.
아, 여기서 빼먹어선 안 될 정보 하나. 노르웨이 피오르드엔 고기가 풍족하다고. 플랑크톤이 풍부해서 어류 서식에 적합해 정어리 등이 많단다. 해서 직감적으로 고기 잡는 어부들이 많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고기 배는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이 어인 일이지? 이유가 있었다. 시내 근교 피오르드에도 고기가 많지만 그보다 조금만 더 외해로 나가면 얼마든지 크고 씨알 굵은 고기를 원하는 대로 잡을 수 있어 작은 협만 안에서는 당연히 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어부들은 다 부자라고 한다.
허허, 나에게 고기를 잡을 수 있는 힘과 기술, 능력만 된다면 이곳에 눌러 앉아 부자(富者)의 꿈을 지펴 볼 수도 있으련만 그 꿈을 펼치기도 전 접을 수밖에. 아쉬움을 뒤로 휑하니 떠나야 할 밖에.
폭포면 폭포, 터널이면 터널, 1천300m 산과 산이 이어지고 협곡과 계곡이 첩첩이니 그에 따라 산세(山勢)또한 눈을 아찔하게 만들고 마니 눈앞에 널린 연속적인 자연 현상을 어찌 이루 다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터널 안에서도 180도 유턴해서 방향을 달리해 달리도록 설계된 굴 속 길이 사방으로 나 있어 역시 노르웨이는 터널 국가요, 폭포의 나라에 눈의 나라답다. 그야말로 스키의 천국이기도 할 것이고.
낙차가 190m에 이르는 모비 계곡의 장엄한 <버링>폭포. 버링의 울음소리인가, 현재 서 있는 이 땅의 울림이 폭포수의 울림이라면 자연과 인간이 모두 하나 되는 연계성을 일깨워 주는 것만 같다. 폭포가 있는 외 따른 <포슬리 호텔>에서 토마토, 수프, 송어요리, 애플파이와 커피를 곁들여 맛있는 저녁을 미리 들었다.
<포슬리 호텔>에서 내려가는 길, 여기는 툰드라
비가 내리더니 활짝 갠다. 그러더니 이내 안개가 몰려온다. 드넓은 개활지인데 나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로 툰드라 지대다. 저 멀리로 빙하가 일부 남아 있다 하나 주변은 안개에 하늘마저 검은 구름으로 가려져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또 잠시 버스를 멈추고 눈 덮인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델을, 카메라 앞에 모델서기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긴 시간이 흘러 나중에 남는 건 추억으로 새겨지는 사진밖에 없다하지 않던가. 부지런히 찍어서 이 장면들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한다면 그 또한 삶의 한 즐거움 되지 않겠는가.
포슬리 호텔에서 오늘 여장(旅裝)을 풀 호텔까지는 앞으로 오르막길 20분을 더 달려서 산 정상 1300m 지점을 경유해 다시 내리막길을 따라 2시간을 내려가야 한다. 아침 6시30분 출발해 이 시간까지 계속적으로 강행군을 하고 있으니 조금은 지쳐 보이기도 하는데, 오직 핸들을 움켜쥐고 운전에 집중하는 기사 분은 또 어떨까? 이제 여행은 오늘로서 시작의 반(半)을 지나는 시점이다.
산 정상에는 엄청난 크기의 호수가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고, 도로 주변으로는 5, 6미터 되어 보이는 장대들이 일정 간격으로 꽂혀 있다. 나중에 눈이 쌓여 눈 치우기 작업을 할 때 여기가 도로 임을 알려주는 표시 목이라고 한다. 설명에 의하면 눈을 도로 좌우측으로 치우면 나중 버스 높이 정도의 눈 벽이 생긴다면 믿어지겠는가.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눈이 쌓이는데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호수를 중심으로 군데군데 작은 집들이 보인다. 이 산 꼭대기에 무슨 집인가 했더니 낚시꾼이나 하이킹, 스키어들을 맞는 곳이라고. 특히 하이킹 족들은 이 곳 산장에서 자전거를 빌려 우리가 지나쳐 온 뮈르달 역까지 하이킹을 한단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막 숲속으로 자취를 감춰 통과한 저 기차(베르겐 2시30분 출발, 밤11시30분 오슬로 도착)를 통해 이곳까지 와서 여기서 하이킹을 시작한다니 ‘고생도 사서 한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호수는 당연히 눈이 녹아 쌓인 물이고. 현재 위치는 1100미터 지점. 여기도 호수, 저기도 호수, 그런데도 바다느낌이 나는 건 또 왜?
아침으로부터 현재까지 우리는 13시간째다. 그러고 보면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 분들 고생이 많은데 노르웨이 버스 기사들은 운전도 잘하지만 착해 보여서 좋다.
2시간을 넘게 달려 툰드라 지대를 극복하자 이번엔 푸르름으로 물든 울창한 삼림지대. 완전한 녹색지대다. 오늘 하루 우리는 1천300미터 산 정상에서 극한의 툰드라지대와 빙하, 얼음물로 이뤄진 호수를 바라보고 다시 녹색 공간지대로 회귀했다. 차내에 조용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그」(1843년 베르겐에서 태어난 노르웨이의 작곡가 피아노 연주자)의『솔베이지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리그」는 음악 작곡을 위해 자주 이 높은 산에 올라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곡(曲)을 만들고는 했다 한다. 호텔 도착시각 임박이다. 현재 밤 9시27분, 한국 시간은 새벽4시26분. 오늘 하루도 이렇게 마무리 돼 간다. 긴 하루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번 북유럽 여행길에 저희와 함께 동행 하시며 우리를 지켜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 서른 네명 일행 전부에게 은혜를 주시며 여행을 마치고 고국 서울 하늘아래 안착하기까지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드립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게 부족하고 미흡하면서도 주변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는 저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스스로의 저급함을 알지 못하면서도 상대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 표정하나가 내 눈에 거슬린다하여 타인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과소평가하는 제 마음을 꾸짖고 용서해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기회를 주시기 소원합니다. 얼마 남지 않는 이 기간, 제 스스로 작은 일일지라도 일행을 위해 행할 수 있는 일이 있게 되기를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비록 제가 먼저 나서지 못한다면 상황파악 하나라도 잘하게 해 주시옵소서. 작은 일이라도 먼저 하게 해 주시고, 일행을 위해 도움이 되는 제가 되게 해 주소서. ‘나’의 행동을 통해, ‘저’의 작은 땀방울을 통해 ,내 안에서의 흘림을 통해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되고 즐거운 여행이 되게 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저로 하여금 그를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 서른 네명의 머리 위에 소담하게 내려주시옵기를 이 시간 하나님 전에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
D + 6일
2017. 6. 16(금)
오늘 일정은 9시 손(Thon Hotel) 호텔을 출발해 오슬로에 도착, 바이킹 박물관과 관광 후 스웨덴으로 가는 여정.
오슬로와 바이킹(Viking), 박물관에서 만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일행은 곧 차에 올랐다. 노르웨이의 전형적인 날씨, 안개가 끼고 비가 내려도 차는 쉬지 않는다. 해외여행에서 느끼는 별스런 묘미는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이런 저런 다양한 풍물들에서 더 찾을 수 있겠지만 이동하는 차 속에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도 하나의 멋스러움이고 쏠쏠한 재미라 할 것이다.
<손 · Thon Hotel> 호텔을 출발해 오슬로로 오는 과정이 또한 그랬다. 도중 주유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차량은 쉼이 없는데 그에 보조를 함께 하기라도 하려는 듯 빗발은 다행히 그쳐가는 중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푸른 숲과 호수. 역시 물과 호수, 산과 터널의 나라답다. 호텔에서 오슬로까지는 1시간30분 거리인데 약간의 지체시간이 가미돼 조금 더 지났다.
차안에서는 오슬로의 명물이라는 <오메가-3> 구입을 위해 너도 나도 나서 신청 중이다. 역시 건강이 최고다. 무릇 개인이나 국가나 신체의 강건함에서 나라의 튼튼한 안보에 이르기까지 건강 ․ 안보보다 더 소중한 게 또 있으랴.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어느새 바다가 눈앞에 드러나면서 장관이 펼쳐진다. 요트들이다. 바이킹(Viking)의 후예답게 바다를 사랑하고 배를 좋아하고 요트를 즐기는 이 나라 국민들. 그래서 크루즈, 대형선박에 벌크선 유조선 선주들이 많은 나라 국민이 바로 노르웨이임을 입증시켜 준다.
진짜 바이킹을 보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 흑백 TV로 보던 외눈 해적선장이 나오는 영화는 언제나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인기 만점이었다. 돛대 꼭대기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저 멀리 수평선까지 훑으며 먹잇감을 노리는 탐색에서부터 로프를 잡고 망루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듯 상대방을 제압하는 해적이나 이들에 대항하는 또 다른 주역들의 활약상은 문화적 빈곤에 목말라하던 그 시대 또래 아이들에겐 어떤 기대와 향수이기도 했었다. 그게 해적선이었고, 외눈박이 해적출현 영화였다.
웅대하고 스케일 장엄하게 나오던 해적선은 희화화된 해적 선장의 모습과 더불어 선박 그 자체가 하나의 우상이었다. 그 해적선이었던, 아니었던 간에 거대한 선체 바이킹을 아파트 4,5층 높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경탄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킹의 후예’. ‘바이킹의 종주국’인 노르웨이의 국민. 현장에서 본 그들은 모두가 당대의 주인공이었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넘나들고 중동과 미국 등지로 원정해 스스로의 강인함을 전파하기 위해 잔혹하고도 잔인한 방식의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이들은 약탈을 통한 무역, 약탈을 통한 교역으로 그들의 가족과 이웃 따르는 무리들을 먹여 살려야 했을 것이다.
소규모의 해적 노략질은 우리 역사의 고려나 조선시대 일본 왜구(倭寇)들이 몰려들어 작게는 부산포 인근 해안 노략질에서부터 후일 규모가 커져서는 내륙 깊숙이까지 침투해 온갖 만행과 노략질로 숱한 백성들까지 붙잡아 가 중앙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격퇴해야 할 정도였으니, 가히 그 폐해정도를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나라 국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해적이 된 것이 아니라 배를 이용해 상대방과 물물교환을 하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빼앗으려다보니 더 강한 무력을 행사하게 되고 점차 더 커지면서 해적의 약탈로 무자비하게 나서게 된 것이다.
원래 ‘바이킹(Viking)’은 ‘해안가 사람’이란 의미에 ‘바이킹 족’은 ‘해안가 주거생활’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바이킹 박물관에는 크게 2개의 선박이 전시돼 있었다. 서기 700년에서 800년 경 이용된 배라고 한다. 1907년 바이킹 여왕의 무덤서 발굴됐다는데 여왕이 죽자 무덤에 순장 식으로 묻은 것이라고.
거의 완벽할 정도로 규모나 상태 면에서 감탄스런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토록 잘 보존된 이유가 참나무로 만들어 부식이 안 되고 건조과정에서 불에 그을려 강도를 높였을 뿐 아니라 썩지 않게 보존처리가 잘 되게 한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풍부한 어족인 대구기름으로 외관을 칠해 방수 및 열처리가 잘 됨으로써 오랜 기간이 지나도 썩지 않은 상태로 여왕의 무덤에서 원형에 가까운 그대로 발굴할 수 있었단다.
당시 발굴 시 배 안에서는 금·은 보화 일부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미 도굴꾼들이 가져간 상태였다나.
두 번째 전시된 배는 필자의 비유가 잘못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로 보면 우리 해경의 ‘고속단정’ 또는 육군이 사용하는 ‘고속정’ 급에 비견하면 어떨지? 귀족의 무덤에서 발굴된 배로 사람으로 치면 날렵하고 날쌔게 생긴 모습이다. 서기 890년 경 묻힌 전형적인 선박모습. 승선인원은 20명, 바람을 이용해 노를 젓는 데 당시로서도 속도가 매우 빠른 첨단의 속하는 배라고 설명한다.
어찌됐건 해적들에게는 어떤 요소보다도 우선했던 것은 기동성이 가장 중요했을 터. 먼저 치고 먼저 빠져나가야 스스로의 생존성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이는 16미터, 폭 5미터 내외로 몇 척의 비슷한 배들끼리 선단을 구성해 활동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면 오늘의 해경 고속단정보다는 훨씬 큰 배라는 얘기다.
전시실 영상관에 들어서자 에니메이션 기법으로 이들의 활약상이 그대로 살아나게 구성해 보여 준다.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드는 과정 → 약탈(전투)위해 배에 물건들을 싣는 출항 준비 → 항해와 내륙 침투 → 전투 및 약탈 → 선단 합류 → 피오르드 통해 복귀 → 항해 중 거친 바다와의 사투 → 전투 중 사망한 동료의 장례 → 배 전체를 무덤에 순장하는 장면 등이 짧은 영상을 통해 보여 줌에 당시 바이킹 인들의 삶의 족적이 파노라마 되어 흘러간다.
그러고 보면 노르웨이인들은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 고대시대에는 스칸디나비아 대서양을 주름잡는 막강 세력으로 해양강국을 형성했지만 또 다른 잣대로 보면 바이킹족들이야 말로 평화스런 이웃 나라 - 같은 민족이라 할지라도, 마치 조선시대 산적이나 비적 같은 -를 침범해 악명 높은 약탈, 침탈의 대명사인 해적들에 불과한 미개한 민족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바이킹이 득세한 그 시기에는 가장 번성한 시대를 이루었지만 힘센 남자들의 숫자가 감소하면서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근세에 들면서 덴마크가 번성해 그 지배권에 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또한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백지의 앞면과 뒷면과 같다는 역사의 한 흐름이라 한다면 세상에 초연하고 달관한 선경(仙境)같은 부질없는 얘기라고 할까나.
계획된 시간 서둘러 둘러보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시청방향으로 이동하자 항구에 대형 크루즈 선 3척이 정박해 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길게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관람객들을 보며 이 박물관이 붐비는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점심은 Honsa식당(처음 노르웨이서 식사한 장소). 오늘 일정은 식사 후 얼마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진 다음 스웨덴으로 이동케 된다. 우리를 3일 동안 안내했던 노르웨이 가이드(사업을 하며 한국에서 관광객 방문 시 가이드 업을 겸하고 있다는 교포2세)도 내리고 운전기사도 교체되었다.
오후 1시 오슬로를 출발했다. 하늘은 먹장구름으로 잔뜩 찌푸리고 여름이 깊어가는 들판은 세찬 빗줄기가 퍼붓는데 오슬로 출발 1시간25분, 지금 서울은 밤 9시27분쯤 되었을 시각이다. 다시 비는 소강상태로 가고 하늘도 차츰 개는 중이다. 여기서 스웨덴까지는 가이드가 없고, 스웨덴에서 합류할 예정이다. 우리는 인솔단장님 지휘아래 하나 되어 또 다른 미지의 나라, 북유럽 복지국가 스웨덴을 향해 고고.
국경검문 없이 노르웨이 - 스웨덴 통과
스웨덴으로 들어서기 30분 전, 버스가 멈춰 숨을 고른다. 각자 볼 일도 봐야 하고 오늘 구입한 선물 등에 대한 세금 환불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후 3시25분 국경을 향해 돌진을 하는데 여기서 여장을 풀 호텔까지는 앞으로도 3시간이 소요된단다. 단장님의 이 말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으악’ 비명소리 절로 날밖에.
국경(國境)통과. 스웨덴 입성은 2017년 6월16일 오후 3시35분. 우리를 먼저 맞은 건 시원한 수풀에 쭉 뻗은 나무들에 한가롭게 노니는 소떼들과 풍력발전기들이다.
그런데 때늦은 이제 서야 하나의 행사가 펼쳐졌다. 개개인 소개시간이 이뤄진 것이다. 인천 공항을 출발한지가 언제고 함께 한 시간들이 얼마인데 이제야 소개가 이어지나? 바쁜 일정인 탓도 있겠지만 현지에서 합류한 가이드의 설명을 우선하고 집중하다 보니 가장 먼저 했어야 할 기본적인 일행소개가 빠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 아닌가?
단장님의 제의에 모두가 박수로 화답하며 한 사람 한사람 자기소개에 들어간다. 필자 또한 피할 수 없는 순서. 누구나가 그렇지만 만남과 만남을 이어오면서 이런 자리, 특히 단체석상에서 본인 소개할 순서가 되면 쑥스럽고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은 늘 한결 같나 보다.
서로 알아가면서 보니 이번 여행을 위해 준비 한 분들이 꽤 많았다. 어떤 분들은 무려 2년 동안 여행을 준비한 분들도 계셨다. 전남 해남출신에서 대구, 인천, 서울, 또 어디 어디. 개포동 아파트에서 늘 마주보던 분들도 함께 했고, 성당을 인연으로 함께 한 분도, 거기에 친구와 더불어서, 또 선후배와 함께, 자매끼리도, 부부 등 다양한 일행들이었다.
거기에 비해 나는 준비가 태부족이었다. 오랜만에 나가는 해외여행이고, 많은 사람들이 선망해하는 북유럽 행인데도 준비에 등한시했다. 인덕원 성당에서 처음 가진 설명회에서 나눠준 전체 일정표를 보기는커녕 지금까지도 채 읽어보지 않았다. 우스운 얘기지만 거기다 떠나는 전 날까지도 무엇을 챙겨야 할지, 배낭마저 꾸리지 않고 선배와 만나 이별주(離別酒)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여행 준비생치고는 낙제를 면치 못할 순준 이하 준비생이었다.
하지만 이 날 스웨덴 국경을 넘으면서 가진 말 그대로의 ‘소개팅’을 통해 서로가 더 가까워지고 마음의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나 싶다. 이 날 이후 우리일행의 팀워크는 더 단단해진 것 같다.
우리가 그렇게 통(通)한 것처럼 유럽 역시 끼리끼리 통하는 세계인지, 나라와 나라 사이 국경을 넘는데도 검문소는 총 든 사람은 고사하고 누구 한사람 우리에게 신경 쓰는 이 없다. ‘국경 없는...’ 이런 말을 들었지만 “역시 북유럽은 서로 믿는 구석이 큰가 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며...
멋진 밤이다. 지금 시각은 00:27. 서울 시간으로는 아침 7시27분일터. 어제 일을 생각해봐도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다. 국경을 통과하는데 국경검문소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아니 있어도 있으나 마나이기 때문이지. 깔끔하게 그대로 통과했다.
또 노르웨이를 떠나기 전 그 나라에서 산 물건에 대해 ‘고맙다’며 세금환급까지 해 준다고 하니. 물론 우리나라도 당연히 그리하겠지만 그럼에도 대단한 국가, 대단한 나라들이다. 그게 바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인 모양이다. 어제 밤 9시에 스톡홀름으로 가는 경유지 소도시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밤에는 김종두 스테파노 단장님과 산책을 마치고 카페로 들른 권00자매님과 함께 로비 카페에서 맥주 파티를 벌였다.
“산책을 마치고 맥주 한잔 생각이 나서 들렀다”는 자매(姉妹)간 우애가 남달라 보인 두 분은 “그렇잖아도 고생하시는 단장님께 맥주 한 잔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며 계산과 함께 담소(談笑)를 나누다 먼저 자리를 떴다. 덕분에 나까지 공짜로 맥주를 얻어 마시는 호사를 누렸지만 모처럼 즐겁게 맥주잔을 나누는 그 자리가 잠시 후에는 촌스럽고 불편하고 부끄러운 사유가 된 사건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맥주가 조금 부족하다 싶어 추가 주문을 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맥주 값을 유로화로 계산하려고 하는데 ‘유로(Euro)’ 통용이 안 된다는 청천벽력(?) - 크레디트는 없고 체크카드 밖에 없으니 - 말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만만한(?) 단장님 신세를 져야하는 초라한 처지가 될밖에. 어쩔 수 없이 얼굴 빨개지는 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맥주 맛은 일품이었다. 스웨덴에서의 한 밤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멋진 스웨덴의 밤이다.
D + 7 Scandic Vesteras Hotel (6.17, 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주변 산책에 나섰다. 아마도 여기는 소규모의 공장지대인가 보다. 이곳으로부터 수도 스톡홀름까지는 차량으로 1시간30분여 거리. 오늘의 일정은 스톡홀름 시내 관광과 지역 명소(名所)를 돌아보고 저녁에는 기간 중 두 번째로 5만8천톤 크루즈선을 이용한 밤의 여행으로 핀란드 수도 헬싱키로 향하게 된다.
어제는 본의 아니게 권 자매님께서 사 주신 맥주와 더불어 단장님 카드를 사용케 되는 결례를 범했는데, 오늘밤 기회가 되면 크루즈에서는 내가 클럽을 접수하고 맥주를 대접해 드리고 싶다.
스웨덴은 어떤 나라?
역시 이곳도 푸르름의 대명사, 녹색지대 천지다. 스칸디나비아 3국은 어디나 푸른 초원. 세계지도에서 보면 마치 털 복숭이 애완견이나 비슷한 동물이 웅크린 자세로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되는데 어제 호텔방에 비치된 스칸디나비아 3국 지도를 통해 직선거리로도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동북아시아 한 편 대륙에 위치한 우리나라와를 견주어보면서 ‘내 어찌 이런 호사를 누리는가?’하는 감상에 젖어 들면서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갖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농촌과 산촌을 한데 섞어 놓은 듯한 이 나라 풍광을 보면서 마음마저 안온과 평화, 풍요로움으로 다가옴을 새기게 된다. 쭉쭉 뻗은 소나무 군락(처음에 전나무인줄 알았다)은 마치 길거리를 활보하는 늘씬한 미녀의 다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보기에도 시원스럽다.
오늘은 토요일, 이곳 시각 오전 9시18분. 한국시각은 오후 4시18분이 될 터. 스톡홀름을 향해 버스는 시속 80km속도로 기세를 올린다. 이곳 유럽의 고용복지는 우리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게 한다. 지금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 운전기사는 어제부터 2명이다.
무슨 말이냐고? 노르웨이 도착해서 3일 동안 운행한 기사는 휴식을 보장해야 된다. 법률로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이를 지키지 않았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정시간 운행하면 기사에게 반드시 휴식을 보장해야 한다. 얼마 전 졸음운전으로 일가족이 참변을 당한 버스 사고로 인해 대대적인 검사와 그에 따른 법률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돼는 등 우리 사회가 술렁이기도 했지만 이 나라들에서는 당국에서 확실하게 보장케 하고, 차 내 블랙박스 등에도 다 확인이 되며 위반 시에는 운행정지 등 강력한 처벌이 뒤따르게 돼 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제대로 지켜질 수밖에 없다.
유럽인들이 법과 규정, 원칙을 잘 지키고 생활화 하는 건 생활문화 속에 젖은 이유도 있겠지만 위반했을 경우 그에 상응하는 강력한 처벌과 벌금 등 제재가 큰 때문이라고 한다. 선진국일수록 더 강한 현상이기도 하다.
스톡홀름 시청, 왕가와 더불어
이번에는 가이드를 시청 앞에서 만났다. 조리 있는 말솜씨와 함께 환한 미소가 아름다운 건강미인 가이드였다. 주변 설명부터 들었다. 시원하고 청량한 바닷바람이 쨍쨍 내리쬐는 햇살과 더불어 기분 좋게 우리들을 어루만져준다. 바닷가 산책로, 서울로 치면 한강둔치 운동코스와 비슷한 길로 건강달리기를 하는 시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웃통을 벗어젖힌 배 불뚝 아저씨에서 끈으로 질끈 동여맨 긴 머릿결을 좌우로 휘날리며 기세 좋게 내달리는 아주머니, 아가씨.
오늘같이 날씨가 쾌청한 날이면 북유럽 대개의 시민들이 직장에 휴가를 내고 운동에 나선다는 말이 이곳에서도 실감나게 다가온다. 현재 기온은 25도, 운동하기에 좋은 날씨라고 귀띔해준다.
스톡홀름은 ‘통나무 성’이란 뜻이다. 북유럽 5개국 중에서도 가장 크고 인구가 자그마치 1000만 명, 한인교포는 2,800명으로 이곳 진출 1세대는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못살던 1960년대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로 왔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광부와 간호사들로 구성되었다. 또 한편으로 한인(韓人)은 한인인데 잘 어울리지 못하는 한인, 입양아들로 이뤄진 이들로 10,0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데 사건이 발생했다. 아래 이 부분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다시 작성하려고 보니 눈앞이 .....)
1년에 2회 정도 같이 모여서 행사도 하는데 이들 입양아(인)들도 김치와 불고기를 좋아 한다고 하니 그 말을 들으며, 감정적으로 태어난 나라에 대한 문화적 교감은 없었다 할지라도 ‘뿌리는 서로 통한다’ 는 애틋함이 솟아나기도 했다.
이곳에서 10분 거리에 5만t 크루즈 선박을 타는 항이 있다. 스톡홀름은 인구 대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보트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눈앞에 보트가 즐비할 뿐 아니라 수상버스도 달린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남녀가 좋아하는 게 확연히 구별된다고 한다. 남자는 보트를 즐기고, 여자는 승마.
칼 구스타프 왕궁을 보며 지나가는데, 이곳도 왕은 ‘군림은 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적용된다고 한다. 왕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수상이 통치하는데 이 나라도 국회의원은 현재 340명으로 꽤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말 그대로 의원 뺏지만 달면 최고의 헌법기관에 권력자로 부상해 의원 1인당 6,7명의 보좌관과 비서를 대동하고 개개인 실을 배정받지만 스웨덴은 천만의 말씀, 그 흔한 보좌진에 기사도 없다고 한다. 자전거로 출 ‧ 퇴근하며 재직간 수백건 법안 발의와 민원 처리 등 격무에 시달리고 청렴결백하지 않을 수 없단다.
말 그대로 국민에 대한 최고의 봉사와 서비스를 하는 직업이 스웨덴 국회의원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국회의원님들이 자주 와서 공부하고 배워야 할 것 같다. 하긴 또 세비(歲費)들여 공부하라 하면 외유성 놀이판 문화에 길들여진 선량(選良)님들이 제대로 흉내나 낼지 미지수지만.
왕궁은 중세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신분증 없이도 출입이 가능하고. 왕궁성당은 1252년 최초 카톨릭 건물로 건축되었지만 근세이후 개신교로 변했고, 그나마 지금은 사용치도 않는다고 한다. 왕궁을 둘러보자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중세 도시의 한 특징이라고.
이 왕궁은 최초 1200년대 건축되었지만 화재로 소실돼 현재의 건물은 1850년대 지어진 건물이다.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스웨덴은 중립국으로 테러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나라이며 그런 측면에서인지 몰라도 관광객을 위해 왕궁을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칼 구스타프 국왕은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으며,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자계승법을 발의해 첫째 왕자가 왕위 서열1위가 되게 했다. 유럽은 가끔 신문에 오르내리는 것처럼 왕가의 왕자나 공주가 사고를 자주 치는 편이다. 해서인지 다음 왕위를 이을 빅토리아 공주도 사고를 잘 쳤단다.
이유는 그 놈(?)의 ‘사랑’ 때문. 개인 헬스트레이너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당연히 왕실에서는 ‘NO’로 대단한 반대를 했고, 결과적으로 실비아 왕비가 트레이너에게 1년간 왕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조건부로 해서 이후 교육을 잘 받은 평민 트레이너는 7년 전 공주와 결혼에 골인했고, 결혼식 날 왕실에서는 트레이너(다니엘)에게 귀족의 작위를 선물로 하사했다. ‘프린스 다니엘’로. 그래서 지금 딸(공주)까지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칼 구스타프 뒤를 잇는 왕은 빅토리 여왕인데, 그녀의 뒤를 잇는 다음 스웨덴 국왕도 여왕으로 일단은 정해진 셈이다. 이제는 왕가도 얼마든지 평민과 결혼할 수 있게 되고.
노벨상 시상식장에 서다
중세도시의 한 복판 대광장에 섰다. 대광장이라지만 필자 눈에 보이는 광장은 우리네로 치면 넓은 안 마당 정도라고 할까. 미음(ㅁ)자 사방이 꽉 막힌 건물 사이에 들어선 광장의 건축물들은 1600년대부터 지어졌다. 특색은 각각의 건물이 100년 단위로 지어졌다는 것.
이 중 노벨 뮤지엄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901년부터 2001년까지 지어졌다. 광장에는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나와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는데 광장 한 곳에서 신혼부부 한 쌍의 웨딩촬영이 이어진다. 그러자 인근 야외 식당가 관광객들이 박수로 이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나 또한 따뜻한 박수로 이국의 젊은 부부에게 앞날의 행복을 기원했다. 노벨식장과 함께
바사 박물관, 바다에서 건진 거대 보물
바사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이미 우리가 보고 온 프레데릭 성(城)을 모델로 건축 설계가 된 박물관이라고 한다. 성처럼 아름답다.
바사 전함은 대단한 위용이었다. 압도적이다. 이 전함은 바이킹이 아니다. 1625년 제작됐는데 길이 54m에 폭 11.7m, 무려 4층 높이다. 우리 거북선에 비해 약 2.5배 정도 더 큰 배다.
치장이나 장식에 있어서도 왕이 타는 배 답게 휘황찬란하게 건립됐다. 이 배 건립에 대한 얘기가 있다. 스웨덴이 폴란드와의 전쟁 중에 제작된 것이다. 그리고 1628년 첫 진수 후 왕(아돌프 구스타프)의 명령에 의해 400여 명의 군사들이 무장한 채로 출항해 다음 승선지에서 다시 120명을 더 태웠다.
1628년 8월이다. 그러나 이 배는 항구를 떠난 지 20여분 만에 침몰하고 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며 눈에 띄는 것처럼 침몰 원인은 가이드의 설명대로 배 뒷부분에 휘황하게 장식된 조각 장식물 700개의 무게감이다. 거기에 대포며 각종 개인 무기류의 무게가 더해졌을 것이니, 전체 선체의 길이나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서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전체 승선인원 중 전사자가 30명 정도로 적었던 이유는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원해가 아닌 근해에서 침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333년이나 바닷물 속에 잠겨있었으면서도 썩지 않은 건 배의 색깔도 그렇지만 바다 속이 검은 진흙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없었으며 염도(鹽度)가 낮고 미생물들이 배를 썩게 하는 부유물들을 갉아 먹게 해 자연현상에 의거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게 했다고 하니 역사적 유물의 한 보고가 그렇게 인류 곁으로 다가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로부터 333년이 지난 1961년 인양된 것이다. 세계 최초로 인양됐고, 이 과정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됐다고 한다. 바사박물관은 이 전함이 인양된 후 건립됐고, 전함 복원도 98%로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고 한다.
하지만 한참이나 지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갑작스레 비운의 크루즈 대명사 ‘타이타닉’이 떠오름은 추석 절 재방영된 TV 영화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북대서양 한가운데서 클럽(club)을 휩쓴 대한의 풍류남아
한참 몸을 후덥지근하게 하던 열기는 벌써 사라진지 오래다. 대서양의 밤바람은 역시 시원했다. 한동안 토요일 밤의 열기가 몸을 감 싼지도 오래지 않는데 이제는 잠을 청해야할 때다. 벌써 우리 방장님이자 단장님은 꿈나라로 빠진지 오래인 것 같은데.
어느새 시각은 밤 12시53분을 가리키고 있다. 서울은 아침 8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일 게다. 조금 전까지도 나는 젊음의 열기를 발산하는 한 밤 크루즈 나이트클럽에서 한국 남자의 위용(?)을 뽐내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었다. 이에 앞서 가이드의 꼬심(오늘 저녁에는 우리 사모님들도 지금 입고 있는 그런 옷 입지 말고 드레스로 예쁘게 치장하고 춤을 추고 추억을 쌓으라는)이 나에게도 적용된 때문이기도 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지난번 크루즈에서 맥주만 마시고 그냥 돌아선 게 약간의 아쉬움이 남은 탓도 있었다. 단장님과 서정숙 이사님, 배정자 누님과 함께 들러 맥주로 입을 축였다. 그리고 “언제 나에게 또 이런 기회가 주어질 것이냐?” 하는 생각과 함께 무대로 나섰다. 모처럼 신명나는 춤사위 - 한국 전통춤을 흉내내는 -로 클럽을 찾은 각국 관광객 앞에서 꿀림 없이 펼쳤다. 그것도 나는 한국남자요, ‘이게 바로 한국 춤이랍니다’ 하는 자세로 무대를 누볐다.
그래서 미리 준비도 했다. 위에는 가슴에 착 달라붙는 긴팔 흰 셔츠에 바지도 아직은 배에서 입지 않은 베이지색으로 바쳐 돋보이게 했다. 혁대도 단단히 조여맸다. 청년스런 기질을 드러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한참 누님되신 일행과 더불어 조명발 받아가며 발바닥을 두드린 것이다.
이 날 클럽에는 우리 일행 여성 몇 분도 나와서 춤추기에 여념 없었다. 그 분들 또한 여유가 넘쳐 보였다. 스칠 때마다 목례와 웃음으로 눙치며 우리는 그 날 다시 언제 맛볼지 모를 대서양 한 가운데서 나비처럼, 표범처럼 흔들고 돌리는 춤사위에도 피곤한 줄 모른 채 그렇게 한 밤을 장식하고 있었다.
한 동안 춤을 추다 피곤하다며 자리를 일어서는 분이 계셔 나 또한 클럽을 빠져 나와 뱃전으로 향했다. 갑판에는 북유럽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한 행위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양주병과 와인 잔, 음료수에 담배를 입에 문 젊은이들, 휴대한 녹음기로 귀청이 쟁쟁토록 음악을 틀어놓고 비틀비틀 취한 몸을 계속 흔들어 댄다.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일정한 룰이 있어 보였다. 경박하지 않고 거칠지도 않았다. 흥겨운 몸짓과 행동들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런 행위, 춤, 춤사위가 그랬다.
어느 순간 선박이 작은 항구에 접안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일직선으로 항해(航海)해 오던 배가 그대로 좌회전을 하면서 몸체 옆으로 부두에 몸을 붙이는데, 바로 순간적으로 머리에 차오름은 ‘아 예술이구나’다. 3만8천t 급 선박이 접안을 하는데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주 부드럽고도 자연스럽게, 경쾌하게 순식간에 접안에 성공한 것이다. 고향이 섬이기에 어릴 적부터 여객선이 부두에 접안하는 장면을 많이 봐왔지만 이토록 큰 배가 저리도 쉽게, 부드럽게 빠르게 대는 걸 본바 없어서다. 선장을 위시한 승무원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 돼 있으면 이 큰 배가 그 어떤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경탄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지나간 추석 절 TV특선영화로 방영한 ‘타이타닉’호가 떠올랐다.
타이타닉(RMS Titanic)은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이 운영한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이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던 첫 항해 중 4월15일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타이타닉의 침몰로 2,223명의 승선 승객 중 1,514명이 사망하였으며, 이는 평화시 해난 사고 가운데 가장 큰 인명피해 가운데 하나이다. 타이타닉은 빙산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경고를 무시한 선장의 방심도 있었지만 <키>의 문제가 있었다는데 영화와 당시 크루즈의 접안 장면이 크게 대비돼 떠오르는 것이다.
배가 접안을 마치고 승객들이 오르내리고 한 다음 다시 <키>를 돌려 목적지를 향하는 사이 나는 객실로 돌아왔다. 오늘 밤도 대서양의 밤바다는 고요함 속에 한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D + 8 2017. 6.18(일)
‘실리안 빅토리아’호에서 끝없이 펼쳐진 발트해를 품다
잠에서 일찍 깼다. 아침 바다가 보고 싶어서다. 그것도 여기는 멀리 한반도로부터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발틱의 푸르고 깊은 바다 아닌가.
고향이 섬인 관계로 바다를 일찍 접하기도 했지만 나는 바다가 친숙하기 보다는 무섭게 느끼곤 했다. 한겨울 세찬 바닷바람이나 폭풍우가 이는 시기에 배를 타면 한 잎 일엽편주(一葉片舟) 신세가 되던 당시로선 주로 목선(木船) 위주였던 여객선 안에서 배 멀미로 혼났던 생각이 일기 때문이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대형 바다 사고로 인해 그 때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면서도 낭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지 지금은 부모님도 형제도 아니 계시지만 고향 길을 재촉해 가끔 보게 되는 탁 트인 목포 앞 해상 ‘시아바다’는 언제나 정겹고 아늑함 자체로 다가 온다. 마치 엄마의 포근한 젖가슴 마냥.
갑판 선상에서 바라본 발트 바다는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茫茫大海)다. 표면은 잔잔하기 그지없고, 저 멀리로 아스라이 바라 뵈는 작은 배는 화물선인지 유조선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선박의 순간순간 헤치는 마음은 선장이나 승무원, 승객 모두의 마음이 거반 다를 바 없이 하나된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어제 밤 클럽에서 오랜만에 예전의 기백, 청춘의 끓는 피로 돌아가 온몸으로 흔들던 감흥이 새록하게 살아난다. 웃음도 절로 피어난다. 갑판에서 보았던 유럽 젊은이들의 음악에 몸을 맡긴 듯한 춤판도 맴돈다.
지금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은 취업난, 일자리 문제로 청춘을 구가하기엔 너무도 할 일이 많아 이런 저런 스펙 쌓기가 장난이 아니며, 마음의 고통 또한 그 얼마인데 이곳 젊은이들은 정규직장이 있건 그 때 그 때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크루즈 여행까지 자유자재로 한다하니, 그들이 가진 재화나 처지가 그렇다손 하더라도 지구의 이쪽과 저쪽이 ‘이렇게 차이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우리 젊은이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기묘하게 다가오는 대비에 마음 한편 편치 않기도 하다.
거대한 선체는 아무런 미동도 없는 것 같은데, 육중한 몸놀림은 계속되고 저 아래 바닷물 배가 지나는 곳으로 하얀 물보라가 세차게 일어난다. 곧 우리가 탄 이 배가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음을 실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잠시 후면 우리 배는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도착하게 된다. 한국과는 6시간의 시차다. 오늘 하루도 우리 일행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저 멀리 가물가물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기도의 마음을 보낸다.
<에스토니아> ‘탈린’, 작은 도시 곳곳이 역사네
사회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북구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를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은 하나의 기연(奇緣)으로 다가온다. 발트3국으로 알려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발트3국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는 우리 대한민국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나라다. 이 나라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국토의 61%가 산세로 덮여 산림과 임업이 발달된 나라다. 북유럽, 특히 노르웨이가 70%가 산악으로 이뤄진 산악국가 이듯이 에스토니아도 삼림이 발달되고, 특히 탈린을 중심으로 연간 400만 외국의 관광객이 몰리면서 IT산업이 크게 발달 되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도 겨울은 워낙 추워서 관광객은 당연히 뜸할 것이고.
그 에스토니아의 유럽 중세 문화유적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수도 탈린을 돌아보고 난 후 이 나라를 알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발췌해보니 대략 이런 내용, 이런 국가와 도시다.
[에스토니아]의 역사
기원 전 오늘날의 에스토니아에 해당되는 지역에는 핀우고르어족의 에스토니아인(人)이 정착하고 있었으나, 민족 대이동시대부터 게르만인·슬라브인·바랴그인(노르만인)이 들어왔다. 이들 중 독일인과 덴마크인은 가톨릭교를, 러시아인은 그리스정교를 에스토니아에 전파하였다. 이에 따라 일찍부터 두 그리스도교들의 충돌이 군사·통상상의 이해관계를 수반하면서 되풀이되었다. 이 지역에서 전래되어 온 ‘빙상의 싸움’은 이러한 관계로 특히 유명하다.
[탈 린]
발트해의 핀란드만(灣) 연안에 있는 항만도시. 에스토니아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핀란드의 헬싱키와는 약 80km 거리에 있다. 큰 강이 흐르지 않는 도시로, 면적 9.6km²의 울레미스트 호수(Ülemiste järv)가 탈린의 가장 중요한 수원이다.
기원은 1219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에스토니아인이 만든 성채 자리에 성을 삼은 데에서 비롯한다. 13세기에 비스뷔·뤼베크·브레멘 등 발트해 연안 여러 도시의 상인들이 이주하면서 한자 동맹의 중심도시가 되어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한자 동맹의 연맹도시가 된 것은 1285년이며, 스웨덴 영토에서 러시아 영토가 된 후 1710년 대북방전쟁이 발발하자 흑사병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920년 타르투 평화조약을 소비에트 정권이 동의함으로 에스토니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세계 제 2차 대전 발발 후 탈린은 1940년 소비에트 영토에 편입된다. 독일 나치의 지배를 받은 기간은 1941년에서 44년까지이다. 나치의 지배 후 소비에트연방의 영토로 돌아온 후로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ESSR)의 수도가 되었다.
이 후 1988년 탈린 교외에 약 30만명의 에스토니아인이 모여 소련에서 금지되었던 에스토니아의 민요를 부르는 사건이 일어났고, 1989년에 탈린, 리가, 빌뉴스의 발트3국의 도시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탈린은 1991년 8월 20일 독립국가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자본주의 사회로 이동하고 EU 가입을 계기로 경제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탈린은 8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또한 탈린의 역사지구(Historic Centre (Old Town) of Tallinn)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탈린은 역사상 여러 번의 침략을 경험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구시가는 성벽 등이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구시가지에 속한다. 석회암의 언덕에 위치한 구시가에 세워진 톰페아 성(Toompea Loss)을 중심으로 역사지구가 형성되며, 주변에는 러시아 제정기에 세워진 알렉상드르 네프스키 대성당(Tallinna Aleksander Nevski katedraal)이 있다.
탈린은 크게 세 지구로 나뉘어지는데 톰페아(Toompea)로 불리는 이 구시가에 에스토니아 국회와 정부 시설, 성모 마리아 루터회 성당(Toomkirik)이 있다. 그리고 중세 시대 무역으로 번성했던 옛 한자동맹의 모습을 지닌, 알린으로 불리는 낮은 구시가 지역이 있으며, 이 구시가의 남쪽에는 에스토니아인들이 19세기 중반 이후 정착한 시가지가 있다. 12세기의 고딕 양식 건축으로 올라프 교회(Oleviste kirik)가 알린 지역에 있다.
구시가지 언덕에 올라서서 저 멀리 보이는 발트해 안으로 구시(舊市)가 역사유적들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유럽의 건물들은 어디를 가도 카톨릭교회 건물이지만 교회로 사용되지 않는 뾰족탑이 인상적인 성당건물이다. 루터교나 러시아정교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지만.
톰페아(Toompea)로 대표되는 탈린 구시가지
톰페아 언덕에 위치한 톰페아 성(城)은 예전 귀족과 성직자들이 살던 곳이다. 해발 높이가 무려 50미터. 맑은 공기는 덤으로 주어지는 곳일 거고.
우리가 이 날 오전 10시3분 탈린항에 도착해 버스로 30분 이동해서 도착한 곳은 의회건물이 위치한 공원이 있고, 러시아정교회가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러시아 정교회. 십자가는 황금색으로 돼 있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궁전양식이다. 우리 경우에 비추면 얼마 되지 않은 1900년 러시아 지배를 받던 시기에 지은 건물이다. 우리들이 도착은 날이 마침 주일이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주일예배가 한창인데 복색이 참 특이하다. 황금색 대례복을 입은 목자(牧子)가 성호를 그어가며 미사를 집전한다.
특히 미사 집전 목자는 머리에 황금모자(冠)를 쓰고 있는데 또 특이한 것은 교회 안에는 의자가 없다는 점이다. 매우 이례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서서 예배를 보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런 얘기를 들었다. 러시아정교회와 로마카톨릭이 여러 부분에서 일치하는 게 많지만 확연히 다른 건 성호에서 다르다는 점. 로마카톨릭은 성호를 그을 때 머리-가슴-왼쪽-오른쪽 순으로 하지만 러시아정교회는 오른쪽-왼쪽 순으로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대단한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러시아정교회 건물 앞에는 광장을 사이로 에스토니아 국회의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점으로 돌아보면 구 러시아가 남의나라 수도 대표적인 광장에 자신들의 교회를 지었다는 것 아닌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우리 수도 서울 한복판에 조선총독부를 지어놓고 삼천리금수강산을 지배한 걸 떠올리면 지난 역사에서 피지배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가장 흔하게 당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도 1인 국민소득이 1만7,8천 달러 된다. 하지만 곳곳에서 손을 벌리며 관광객을 맞는 걸인들이 다르지 않았다. 교회 앞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다시 ‘톰교회’로 이동했다. 이 교회는 13세기 덴마크가 카톨릭 성당으로 지었지만 종교전쟁에 의해 루터교회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유는 신자가 없어서다. 루터교를 믿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정치적으로도 이용되곤 하는데 대통령 취임식 때는 이곳에서 취임식을 하기도 하고.
정부청사 건물도 ‘이런 곳이 정부 청사?’ 할 정도로 허름하고 덴마크와 네덜란드 대사관도 보이는데 참 작다. 이곳에도 거리의 악사들이 뭉치고 있었다. 관광객들을 통해 수입을 올리는 악사들 일진데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은 채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여 악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재미나는 건 우리 일행이 다가가자 어떻게 알았는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연주에 노래까지 곁들여 가면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가사까지 유연하다. 결국 그냥 지나갈 한국인들이 아니지 않는가? 주머니를 열어 유로화를 넣으면서 사진도 찍고 노래와 춤을 같이 부르며 어울려 추기도 한다. 역시 흥이 많은 우리 민족, 한민족임이 틀림없다.
구시가지 지역에는 기념품점이 죽 늘어져 있다. 모처럼 점심으로 ‘칼질’을 한 일행은 시청 앞 광장에 즐비하게 진열된 상품들을 돌아보며 쇼핑에 나섰다. 역시 여자들은 쇼핑에 먼저 눈이 간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여기서도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쇼핑에 열을 올리니 그 또한 재미 중 재미일터.
단장님도 다른 건 몰라도 손녀 애기 용품 사는데 맛을 들인 것 같았다. 가는 곳 마다 애기 물건에만 집중하고 사곤 했다. 광장 무대에서는 공연도 한창이었다. 옛날 유럽풍 여성들 옷차림인 머리에 스카프, 상의는 단단히 여미고 치마는 아랫단이 풍성한 옷차림의 할머니 배우들이 공연을 하는데,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아도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어린아이(인형)를 안은 배우가 아기를 가슴에 안고 ‘ 오빠 나 아기 어떻게 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옆에 있는 배우가 아기 다루는 법을 알려주고 상대 ‘오빠’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줌에 관객들은 웃음과 박수로 이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그래서 예술은 하나의 의미로 통용된다는 말인가 싶기도 하다.
이 날 난 기념품점을 돌아보면서 두 눈을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주요인은 전 날 밤 선물을 거반 사느라 지니고 있던 ‘유로화’를 다 털었던데 있다. 소지한 카드는 체크카드인지라 더 이상 유용치가 않으니 재간이 없다. 환전할 동안까지는 손가락 빨 도리밖에. 소문이라도 나면 이보다 더 ‘쪽 팔리는’ 일이 또 있으랴. 눈동자만 바쁘게 운동시키는 길 밖에.
그런 한편으로 앞서 ‘휴~’ 하는 안도의 한숨도 쉬어야 했다. 일 한번 제대로 치를 번했기 때문이다. 탈린에서의 점심은 양식(洋食)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게 헛디딘 것이다. 그대로 넘어질 듯 넘어질 듯하면서 앞으로 대여섯 걸음 비틀대며 나가다 겨우 중심을 잡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발을 접질리거나 부러뜨릴 번한 것이다.
다행히 운동신경이 발달되었기에 그렇지 하마터면 해외여행 나가 나 개인의 부주의로 병원을 찾았다면 시간 소요 등 기간 내내 민폐를 끼치면서 깁스에 목발(?)로 비행기에 오를 생각하니 등골이 싸해지지 않을 수 있겠나.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이 아니라 해도 안전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임을 다시 생각게 한 순간이기도 했다.
탈린 구시가지를 관광하면서 중세 유럽은 성(城) 중심 문화였음을 곧 느끼게 된다. 오래된 건물도 마찬가지, 150년 전통을 자랑한다는 ‘카페’를 지나면서 그 곁으로 중세시대 건립되었다는 성명교회도 스쳐 지나간다. 성 니콜라스 교회는 돈 많은 상인들이 니콜라스 성인을 위해 지었다는데 지금은 여기 또한 빈 건물뿐이란다.
배를 타자, 이제는 핀란드로 가야하니
오전 10시3분 탈린 항에 도착해 오후 4시30분에 출발하니 에스토니아 탈린에 머문 시각은 6시간이 조금 넘는다. 시가지를 돌아보면서 필자가 느낀 건 중세의 건축물, 각 나라마다 독특한 고유의 건축양식이 있겠지만 탈린의 건물들, 특히 스웨덴이나 덴마크 그리고 여기 에스토니아 건축형태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들이 승선해 다음 목적지 핀란드로 항해중인 ‘스타(Star)’호는 9층으로 이뤄진 배다. 현재 시각은 45분이 지나고 있는 시각이다. 헬싱키에는 앞으로 1시간15분후인 6시30분 도착예정. 이번 여행에서 배를 타고 선상에서 느낀 생각은 북유럽 바다를 운행하는 배들은 원해(遠海)를 운항하든 가까운 거리를 오가는 배건 상상이상으로 크고 웅장하다는 거다.
국가 대 국가의 항구를 운항하는 먼 바다를 달리는 배는 당연히 그렇겠거니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작은 배는 보지 못했다. 인천에서 중국을 오가는 여객선을 아직 타보지 못해 어쩐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목포-제주나 속초-울릉도를 항해하는 배들도 이들 배와는 차이가 있다. 물론 커다란 배도 있지만 연안 중심으로 운행하는 우리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고, 여하튼 이들 배는 멋진 해양 선박임에 틀림없고 그런 면에 또 다른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D + 9, 2017. 6.19(월)
여기는 핀란드, 헬싱키
어제 저녁 6시가 넘어 우리들은 헬싱키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다본 시내 풍경은 다감함이었다. 느낌자체가 검소하고 소박하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것 같다. 이 나라도 국가의 70%가 삼림으로 덮이고 임업과 목재, 가구 수출이 주를 이루고, 최근에는 인터넷 관련 업종도 뜨고 있다고 한다.
우리를 마중한 현지 가이드는 11살, 9살 두 자녀를 둔 11년차 교민이라고 했다. 부드럽고 갸름한 얼굴형의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이 나라 핀란드는 600년에 걸친 스웨덴의 지배와 근세 100년 제정러시아 지배를 받아 오다 1917년 독립한 북유럽의 복지국가다.
사회복지, 보장시설이 잘 돼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교육비가 무료고. 최근까지 외국에서 유학 온 유학생들도 무료 교육을 받다가 지금은 연 300만원만 받고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이 정도면 도대체 어떤 나라 어떤 교육정책이란 말인가? 이 정도라면 복지전형이라는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관련 분야에 구미가 당긴다.
같은 식탁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돼 살며시 질문을 던져 봤다.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에서 살 생각은 없는가?’ 하는 말에 웃음을 지으며 금방 답변이 돌아온다. “아닙니다. 지금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외롭고 부모님과 고향 생각이 많이 나기도 하지만 어떻게 거기서 우리 아이들 교육을 시켜요?” 더 무슨 할 말이 떠오르랴. 그렇게 그 날 헬싱키 밤이 저물어 갔다.
헬싱키 홀리데이 인(HOLIDAY IN) 호텔
내일은 헬싱키 시내 관광에 이어 기차로 러시아의 고도(古都) 상트페테르브르그로 이동해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된다. 서울-모스크바, 모스크바-코펜하겐의 비행기, 두 번의 크루즈 선, 또 두 번의 카페리호, 여객선, 그리고 국제선 철도 여행.
이런 아름다운 여정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아무런 탈도, 어떤 불화(不和)나 커다란 문제점도 없이 이 여행이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에게 은혜와 은총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이 시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지금 시각은 밤 11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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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가 자일리톨 껌의 본고장이란 말이 확인되듯 호텔 주변에도 자작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자일리톨 껌이 자작나무에서 제조 액을 추출한다는 것도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그래서 아름드리 쭉쭉 뻗은 나무들이 그렇게 널려 있었나 보다.
오늘 아침은 8시30분 출발이다. 햇살이 눈이 부실 정도다. 지금 시각은 출발로부터 12분이 지난 시각. 서울은 오후 2시42분일 테고. 한국에서의 햇볕이야 일상이지만 북유럽인들에게 이런 날은 황금 같은 날씨임을 알게 됐다.
시내 거리의 특징을 알아봤다. 헬멧을 쓴 자전거 족들이 참 많다. 출근하는 직장인인지 학생인지는 분간할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자전거 문화가 잘 발달돼 보인다. 자전거에 대한 배려가 차안에서도 보인 때문이다.
시벨리우스 기념공원에서 중앙철도역까지
핀란드에서의 여정은 오래되지 않는다. 바쁘게 서둘러야 할 판. 여행의 종반에 드는 오늘은 시벨리우스 기념공원을 들른 뒤 원로원광장과 암석교회를 거쳐 기차역으로 가는 코스다. 우리들의 마지막 여정이자 모두의 마음을 흥분시킬 러시아의 고도(古都)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해 기차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아침 식사를 마침과 함께 버스는 서둘러 핀란드 첫 행선지 시벨리우스 기념공원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파이프로 된 음악이 연주된 공원이다. 공원은 단촐 했다. 하지만 거기에 제정러시아 당시 핀란드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킨 작곡가 시벨리우스가 파이프 600개로 만든 악기가 비치돼 있다는 것은 최고의 대표성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픔을 겪었지만 식민지를 일궜던 나라들은 경우의 수를 떠나 피지배국가 국민을 억압했으니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이나 이후를 가리지 않았다. 문화 예술을 포함해 모든 분야에서 유사했다. 제정러시아도 그렇지 않았을까? 시벨리우스의 음악연주를 강압적으로 막았다는 데서도 그랬을 것 같다.
이 공원은 1967년 그의 사망 10주기를 기념해 조성됐다고 한다. 오페라 하우스는 2015년 건립됐는데 이 때 우리나라 첼리스트 사라 장이 초청돼 연주함으로써 유명세가 더해지기도 했다고 귀띔해 준다. 도로변에 관광버스 몇 대가 자리 잡고 있어 이곳을 찾아 시벨리우스를 기리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음도 대변해준다.
다시 우리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원로원 광장으로 들어섰다. 러시아가 1809년 지배권을 가지면서 독일의 건축가 칼 구스타프 엥겔이 설계해 조성했다고 하는 원로원 광장은 화강암 41만개의 벽돌로 바닥을 설치, 40년 이상 공사 끝에 1852년 완공됐다고 한다.
광장은 헬싱키의 핵심 중심가인데, 원로원과 지금은 정부 청사로 사용되는 원로원 의회와 대성당, 그리고 한쪽으로 헬싱키 국립대 본관이 길게 늘어서 있어 이 좁은 공간을 어찌 이렇게 절묘하게 중요건물들을 배치해 놓았을까 하게 경탄의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광장 중앙에는 젊고 멋지게 생긴 역동적인 형태의 동상이 눈길을 끄는데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려다 1881년 반대세력에 의해 암살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이다.
‘러시아 황제 동상이?’ 나라의 중심부에 자신들을 지배했던 국가의 황제 동상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어 의아해진다. 하지만 의문은 금새 풀렸다. 1917년 러시아로부터 독립 후 동상에 대한 존폐 여부가 논란이 되었지만 핀란드 국민은 존속을 결정했다.
이유는 그가 핀란드 지배기간 국민들의 자유를 보장케 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역시 국민성 자체가 온건하고 착한 민족성을 지닌 이 나라 국민들이다. 아니 어쩌면 피지배 국민에게 강요와 억압보다는 자유의 가치를 지켜준 지배국 황제를 더 인상 깊게 우러르게 되는 심리도 작용된다.
하긴 36년간 일제강점기를 통해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코자 총칼과 회유를 통한 무단통치는 물론 조선의 역사가 숨 쉬는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 경희궁)마저 짓이기며 온갖 망나니짓을 다한 일본과는 비교자체를 할 수 없다 할 것이다.
이번에는 암석교회다. 말 그대로 바위를 뚫어 만들어진 교회인데, 세계에서 독특한 건물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루터교회다. 1969년 완공됐는데, 핀란드 국민의 80%가 루터교를 믿는다고 한다. 이 교회에 대한 국민의 사랑이 또한 깊다하니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암석교회가 특별히 유명한 이유는 젊은 남녀의 결혼식 섭외장소 1위여서라고. 당연히 행복하게 잘 살고 오래오래 백년해로 한다는 설(說)이 이어지기 때문 아닐까!
믿거나 말거나지만 2년 전 예약해야 겨우 날짜를 맞출 수 있다하니 가히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곳에도 관광객이 넘쳐나 서둘러 내부를 둘러보고 볼 일을 위해 화장실로 들어서는데, 전쟁터가 따로 없다. 그래도 남자들은 얼른 보고 나오기에 늘어선 줄이 금방금방 줄어들지만 여자들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줄지 않는 긴 행렬을 바라보면서 다급한 입장에선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하는 마음에 나마저 조급해지는 심정이 일기도 했다. 필자도 그랬듯이 말이다. 이번 여행 중 화장실 문제로 긴장을 한 경우도 꽤 있지는 않았을까 더듬으며, 기회가 된다면 함께 모여 이런 저런 후일담을 들어보는 것도 지난 여행의 멋들어진 한 추억으로 아로새겨지지 않을까 입가로 살며시 미소를 머금어 본다.
이제는 이곳에서의 짧은 일정을 정리해야 할 시간. 10시20분, 우리는 서둘러 핀란드 중앙철도역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번엔 국제선 열차다. 기대를 잔뜩 품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의 이동이다. 아, 핀란드의 짧은 여정도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구나.
「헬싱키 -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선 철도, 바람을 가르다
시속 170km에서 200km,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저 멀리서 나타나 잡았는가 싶으면 다가서기 무섭게 휙 지나간다. 붙들어 보려 애를 써보지만 언감생심, 사라지고 마는 나무, 들녘, 숲속의 작은 오두막 그리고 그 안의 작은 인영, 역시 풍경은 스쳐가는 그림과 느낌으로 대할 때 한없는 정겨움으로 다가오는 가 보다.
지금 이 시각 우리는 기차 안에 있다. 오전 11시 핀란드 수도 헬싱키를 출발한 기차는 러시아 고도(古都)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하는 중이다. 헬싱키와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는 3시간30분 거리. 지금이 오후 1시25분이니 앞으로 2시간여면 다시 러시아 땅에 당도하게 된다. 이제 이 여행도 종착지를 향해 치닫는 중이다.
열차는 어느 곳인지는 모르지만 중간 기착지에 도착해 내리고 타는 승객으로 부산하더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나라와 또 다른 나라 사이를 연결하는 국제선인 만큼 차안에는 공안원이 수시로 드나들고 여권검사를 하면서 출입절차도 밟는다. 여권을 확인하던 한 공안원은 우리 일행이 한국인임을 알고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로 말을 해 활짝 웃는 미소와 박수로 화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 중 제일 힘든 순간은 바로 이 기차를 타고 내리면서다. 좁은 공간이다 보니 열차를 타는 개개인 가방을 들어 올려주고, 열차 출발 후 그 가방을 다시 선반위에 올려놓는 일이 만만치가 않았다. 20kg에 육박하는 가방 34개를 남자 두 세 명이 하다 보니 어쩌면 이번 여행 중 가장 땀을 많이 흘리고 어려웠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를 위해 나의 작은 힘이 도움이 되었다는데 대해 뿌듯함도 있었다고 할까?
헬싱키 역에서 기차를 타면서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뻔한 일이 있었다. 비좁은 출입구를 통해 가방까지 올리며 사람이 타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사실이었다. 더욱 여성분들이 대부분이고 가방을 나와 단장님 둘이서 올리다 보니 기차출발 시간이 임박한 것이다. 필자가 맨 마지막으로 타야하는데 갑자기 기차 문이 닫히는 게 아닌가. 아뿔싸,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데 다시 문이 소리 없이 열리는 것이다. 순간적이었지만 국제미아로 전락할 뻔한, 물론 그럴 리가 없었겠지만, 하여튼 그런 위기일발의 사실이 있었다는 것, 지면을 통해 정리하고 싶다.
기차에서는 또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러시아 공안원이 오더니 어느 한 분의 가방을 개방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선반위에 올려져 있지 않은 가방을 문제 삼은 것 같았다. 결국 가방을 다 열어 보여주고 아무런 일 없이 끝났지만, 아마 그 공안원은 가방이 올려 있지 않은 걸 혹시 마약이나 어떤 폭발물 같은 것이 담겨져 있는 게 아닐까 해서 지목한 것은 아니었을까? 가방 주인 입장에서는 심호흡 한번 제대로 한 경우가 된 것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서다
문화 예술의 도시, 러시아가 자랑하는 도시다. 1917년 10월 러시아 공산혁명 이후 도시 이름을 레닌그라드로 바꿨다가 1991년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환원했다는데 가이드에 의하면 현지인들에게는 러시아 이름 보다는 소련이, 또 레닌그라드가 더 친숙하다고 한단다. 아마 오래도록 평등분배라는 공산화 실정에 익숙해진 사회적 영향 탓은 아닐까 설명을 들으며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현재와 같은 이런 문화적 환경적 질서가 제대로 틀을 잡으려면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씻겨져야 될 것도 같고.
여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다. 푸틴이 여기서 공부하고 KGB 활동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에 총리를 하고 다시 대통령을 하고 있어 현재 14년 권력을 잡고 있는데, 내년 3월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도 푸틴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결국 장기집권, 종신으로 가지 않을까 이런 외신 뉴스도 가끔 나오기도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도 모스크바가 있음에도 러시아 제1의 도시다. 제정러시아 당시 100년 동안 수도인 적도 있었고 1917년 10월26일 레닌에 의한 볼셰비키 붉은 혁명 이래 올해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혁명이후 제정 러시아 황제가 축출되고 소비에트 공화국이 설립되었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시까지 소련은 미국과 양대 축을 이루며 냉전시대 공산국가의 종주국으로서 위맹을 떨쳐 왔다. 그러다 소련 해체 이후 중국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었으나 지금 러시아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그 주도적 역할을 ‘냉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쳐지는 푸틴이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성 이삭 성당
여기에도 소매치기는 또 있단다. 이 성당에도 소매치기가 촘촘하게 박혀 있다고 한다. 특히 1층 성당의 48개 기둥 사이에 눈을 굴리며 먹잇감을 노리는 소매치기가 있다고 가이드는 반복에 반복해서 ‘주의’를 당부한다.
북유럽 여행 중 어디를 가나 소매치기는 풍성하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여행기간 누구도 소매치기 한번 당했다는 얘기가 없으니 그들이 피해간 것인가, 우리가 대비를 잘한 것인가, 아무래도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그만큼 집단속 문단속 가방단속 주머니 단속을 잘 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에 앞서 철저한 대비를 강조한 가이드 분들에게 그 공(功)을 돌려야 할 것 같다.
성 이삭 성당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 101.52m, 성당의 둥근 천장이 21.83m, 길이가 11.2m, 폭이 97.6m인 이 성당은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로 둘러싸고 있다. 1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달마티아의 성 이삭이라는 정교회 성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달마티아의 성 이삭의 축일은 5월 30일인데 바로 그 날이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성 이삭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정시대 교회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듯 높이도 고층빌딩만 해서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내부에는 중앙에 있는 카를 브리쵸프의 작품을 비롯해 성경의 내용과 성인들을 묘사한 예술가들의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다. 그밖에도 수 백점의 동상과 부조가 있다.
이 성당에서 지금은 예배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박물관이 되어버린 성당이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도 봤지만 정교회 성당은 내부에 의자가 없다. 서서 예배를 보는 특징이다.
메모된 내용에 ‘천국의 문’이 황금으로 돼 있고, 동쪽은 하나님을 모시는 성소로 그래서 황금색으로 돼 있다고 적어 놓았는데, 이게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떠오르지 않는다.
벽화 성화는 그림이 아닌 모자이크로 돼 있는데 당시 기술이 부족해서라고. 해서 학생들을 선발해 로마에 가서 배워 왔다고 한다. 1∼4층으로 돼 로마식 모자이크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또 중앙인 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아기예수가, 오른쪽에는 예수님이 위치한다. 오른쪽 두 번째는 교회 주관자인 이삭이다.
오늘날의 성 이삭 성당은 알렉산드르 1세 치세에 건립된 것으로 프랑스 출신 궁정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의 설계에 따른 것이다. 몽페랑의 감독 아래 1818년부터 1858년까지 무려 40년에 걸쳐 지어졌다. 그의 나이 32살에 시작해 72살에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가, 걸작을 남기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신의 계시였는가? 몽페랑은 이 성당을 완공하고 2주 후에 타계했다고 한다. 최종 작품을 완성한 다음 세상을 떴으니 하늘도 이 성당의 완성을 그에게 맡긴 것으로 보고 싶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소련 정권 아래에서 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른 건물들처럼 소실될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성 이삭 성당의 황금 돔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독일군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 측은 성당의 돔을 회색으로 덧칠하였다고 한다.
성당은 밖에 기둥이 48개로 돼 있는데 기둥의 하나 높이가 17m에 이르고, 무게는 114톤, 원석의 돌이며 기둥을 세우기 위해 사용된 기계가 비계다. 성당을 건립하는데 동원된 인원이 자그마치 15만 명, 맨 꼭대기 돔 건설할 때 제일 많은 수의 인원들이 사망했는데 금을 맥기할 때 수은 중독으로 죽은 사람이 많다고. 순교자가 무려 383명이라고 한다. 그 피의 흘림이 오늘의 성당이 있게 한 동력이라고 한다면 너무 잔인한 얘기일까?
그런데 예술에 문외한인 필자의 눈에도 어마어마하고도 장엄한 이 성당, 383명의 안타까운 생명이 스러진 이 성당의 둔중하기 그지없는 기둥을 사이로 성소(聖所)를 찾아오는 수 천 수만 세계인들을 상대로 소매치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노리고 있다하니 참으로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조금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자(인터넷 지식) 표트르 대제 치세에 바실리옙스키 섬에 최초의 성 이삭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 뒤 1717년에 원로원 광장(현재 데카브리스트 광장)으로 이전했지만 연약한 지반 탓에 낙뢰로 소실되고, 예카테리나 대제의 칙명에 따라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안토니오 리날디의 감독 아래 재건 사업에 들어갔지만, 미완성으로 끝나고 파벨 1세가 그녀의 유지를 이어받아 다시 재건을 실시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상트>는 우리말로 ‘거룩하다’이고 <페테르>는 이 도시의 창건자인 ‘표토르 대제’를 뜻하며 <부르크>는 ‘도시’라는 말이라고 한다. 곧 우리식으로는 ‘성인 베드로의 도시’를 의미하는데, 이 도시는 러시아 여느 도시보다 유럽과 더 가까워 한마디로 러시아 속 유럽 도시다.
하지만 여기도 한 때 세계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칭기스칸의 침략에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1238년 칭기스칸의 침략 이래 240년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애초 유럽인, 슬라브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성향의 민족이 아시아적 성향으로 바뀌는 피할 수 없는 운명도 겪은 것이다.
이를 안 표토르 대제가 “몽골(아시아)의 잔재(낙후)를 버리라”는 명에 의해 유럽화 된 도시를 건설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아니, 그런데 저기 강가에 떠 있는 저 엄청난 배인지, 건물인지는 무엇인가요? 러시아의 유명한 세계적 이종격투기 선수인 표도르가 운영하는 선상카페란다. 그의 유명세를 타서인지 카페는 항상 만원 손님이라고.
도심으로는 서울의 한강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대표적인 강 레바 강이 강변 좌우측으로 길게 늘어서서, 주변으로는 낮에 봐도 그 고혹적인 예술적 자태에 넋을 빼앗기게 하는 성당이며, 박물관, 뾰족 건물, 동상에 유래를 지닌 등대 등이 굽어보고 있어 저 모든 것들이 밤이 돼 각자 저마다의 휘황한 조명을 밝힌다면 그 얼마나 환상적 비경을 자아낼 것인지,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만 같다.
어쩌면 철분과 광물 함량이 많고 토양도 그래서 강물이 어둡게 보인다는 레바 강은 흐르고 흘러 흘러서 발트해로 들어가는데, 뱃길을 따라 레바 강으로 오는 방법은 탈린에서 헬싱키를 경유, 발트해를 지나 이곳으로 올 수 있다고 알려주기도 한다.
이토록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유럽식 도시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표토르 대제가 무역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스핑크스 상
레바 강가에 서있는 스핑크스 상. 이집트의 스핑크스와는 달리 자그마해서 그런지 귀염성 있게 보이는데, 현재 위치에 서 있는 이 상은 진품이 아닌 모조품이라고. 1832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기증품으로 받아 가져온 것인지, 힘의 논리에 의해 현 위치에 서있는지 당장은 알길 없지만 어쨌든 진짜 실물은 바로 강 건너 보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 미술대 건물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에르미타지 박물관이 레바강을 끼고 있는데, 아직 가보진 않았지만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도 퐁네프 강가에 자리 잡고 있다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이 지역은 과거 늪(Neva, 핀란드어로 ‘늪’이라는 뜻)지대 였다고. 하지만 표토르 대제가 1703년 갯벌을 땅으로 만드는 대 역사를 시작해 9년 만인 1712년 완공하면서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옮겨와 오늘의 예술도시를 이룩했다고 한다.
레바강의 붉은 기둥
다시 버스를 타고 잠시 이동하자 우뚝 솟은 붉은 기둥이 시야를 채운다. ‘레바강의 붉은 기둥’ 등대다. 여기가 항구로 쓰였음을 알게 하지만 설명이 없다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등대 2개가 서 있는데 뱃머리(라틴어 : 로스트랄라)를 뜻하는 등대는 옛날 적과 싸워 이기면 상대편 뱃머리를 잘라 자신들의 배에 붙였다고 한다. 결국 등대에는 8개의 뱃머리가 있어 스웨덴과의 21년에 걸친 전쟁에서 최종 승리한 러시아가 발트해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 대가가 8개 뱃머리로 연계되고 4개의 조각상이 또한 장식돼 있다. 이는 레바, 볼가, 드네프르, 도르프르의 4개의 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피터폴 요새, 대성당
동작도 재빠르다. 이번엔 피터폴 대성당(페트로파블로프스크, Petropavalovsk) 요새를 찾아 간다. 표트르 대제가 네바 강 하구 델타(삼각주)에 서쪽의 숙적 스웨덴의 침입을 막기 위해 1703년 구축한 곳. 표트르 대제 이후 모든 러시아 황제(차르, Czar)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고, 18세기 중반부터는 감옥까지 함께 수용했으니 가히 철옹성임이 틀림없다. 피터폴 대성당의 122m 높이 첨탑은 도시 전역에서 보이는 명소라고.
우리는 여기서 이번 여행 기간 중 가장 멋진 기억에 남는 젊은 친구, 세계 곳곳에서 대한국인의 젊은 피를 발산하고 있는 그들 중 한명이라 생각할 우리의 가이드를 만났다. 내 기억에 참 멋진, 아름답고 긍정적인 사고와 바른 행동으로 한국을 알릴 미래의 주역 참한 가이드를 만났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기록하기로 하고 그의 설명을 계속 듣기로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덧 오늘 상트페테트부르크에서의 하루가 다 저물어간다. 그리고 지금 시각은 한 밤중이다. 밖은 아직 대낮같이 환한데 9시33분. 그렇지만 그냥 잠자리에 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늘도 조금은 힘을 쓴 날인데.
성이삭 정교회 성당을 거쳐 레바강의 검붉은 물빛을 바라보면서 이국의 또 다른 정취를 가슴에 새기고, 레바강을 굽어보는 스핑크스상을 보며 내 마음의 기도를 올렸는가 하면, 세계적인 격투기 선수 표도르가 운영한다는 선상 레스토랑 카페에 이은 등대와 피터폴 요새까지, 유럽의 나라와 나라 사이를 연결하는 열차를 타고 헬싱키에서 달려와 숨 가쁘게 돌아본 하루였다.
숲으로 둘러싸여 전망 좋다는 마지막 숙박지. 하루의 여정 속에 허리에 무리가 있었을 지라도 깊어가는 백야(白夜)의 밤을 어찌 그냥 보낼 수 있을 손가. 조금은 늦은 시각이지만 꾼(?)에 있어 술시(酒時)는 초저녁인지라 단장님과 둘이 호텔 8층에 자리 잡은 라운지로 이동해 생맥주로 하루를 마감키로 한다. 그런데 오호라 이심전심이 통했나, 서정숙 이사께서 오셔서 스폰서를 하시겠단다.
이런 기막힌 행운이 오늘도 역시 함께 하신 날인가 보다. 한 모금 맥주잔으로 지난 그간의 순간순간들을 돌아보고 내일 일정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차분하게 하루를 정리하기도. 이제는 잠자리에 들 시간인가 보다. 나만의 작은 등을 켜놓고 기록해 나가는 지금 시간이 어느새 자정을 넘어 00시07분을 가리키고 있다.
D +10 2017. 6.20
러시아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며
여름 분수 궁전
오늘 첫 일정은 여름 분수 궁전.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 날 이어서인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속에 행동은 여유롭게 시작된다. 오전 10시52분, 버스가 도착함과 동시에 내릴 준비를 하는데 우산 챙기라는 말이 이어진다. 비간 내리는 모양이다. 어수선함 속에 버스에서 내리자 어디선가 낯익은 연주가 귓전에 와 닿는다. 트럼펫과 섹소폰으로 들려오는 애국가.
작은 깃발에 태극기도 보이고, 연주하는 이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객을 맞아주는 것 같다. 이슬비가 내리는 이역 낯선 타국에서 듣는 애국가에 순간적으로 가슴 뭉클해짐은 애국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너 또한 순수 토종 한국인임을 어찌 알지 못하리.
분수궁전. 여름궁전이라고도 한다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약 30㎞ 떨어진 핀란드만 해변 가에 위치해 표트르대제가 파티 장소로 쓰기 위해 만든 것으로,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위엄과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황제의 명령으로 1714년 착공된 이래 9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50년이나 지난 후에야 공사가 끝이 났다나. 말이 150년이지 도대체 어떻게 배치하고 형틀을 짜고 건물을 짓고 조각을 하며 그림을 그리기에 유럽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당대만을 조명함이 아닌 기나긴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지 불민한 둔재(鈍才)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분수궁전 또한 러시아와 유럽 최고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이 총동원돼, 20여 개의 궁전과 140개의 화려한 분수, 7개의 아름다운 공원이 만들어졌다.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여름궁전 1층에는 표트르 대제의 응접실과 서재, 침실 등이 있으며 2층에는 왕실 대대로 내려오는 가구와 도자기들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궁전의 정원은 마치 아름다운 여신들이 강림하신 신체의 일부마냥 쭉쭉 뻗은 소나무 전나무들이 무성한 푸르름을 자랑하며 궁 안을 장식한 채 수없이 찾아오는 이국의 관광객을 향해 환영의 인사라도 건네는 것만 같다. 중앙 통로를 통해 일직선으로 뻗은 길을 따라 발틱 해가 바로 펼쳐진 항구까지 걸음을 옮긴다. 자그마한 항구엔 작은 증기선에서 요트 등이 정박해 어딘가를 향할 선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가늘어진 빗발이 우산을 펴게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사진 한 컷은 남겨야 될 듯싶어 물줄기 쏟아지는 분수 앞에 포즈를 취해본다.
오늘 점심은 차이코프스키 식당이다. 현지식으로 농어요리란다. 맛있는 생선으로 배통 한번 두들겨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 미식가에 식도락가는 아닐지라도 역시 여행의 묘미에서 술과 현지의 별식은 또 다른 즐거움 중 즐거움 아니겠는가?
서둘러 차량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하는 찰라 한 눈에도 금방 다가오는 금발의 미모 여성. 빨간색 굽 높은 하이힐에 계란색 코트, 치렁한 귀고리에 붉게 칠한 입술연지, 긴 머리는 스카프로 살짝 끝부분을 맨 채 난간에 옆으로 몸을 기댄 채 손가락 사이에 피어오른 담배연기와 함께 언덕 아래 분수를 바라보는지 아니면 저 멀리 발틱의 푸른 물결을 응시하는지 말없이 지켜보는 고혹적인 옆모습 자태가 지나는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귀에는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면 너무 과장인가?
달리는 버스에서 차창을 통해 밖을 내다 본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해 세운 웅장한 개선문, 아니 그런데 저 건물은? 마치 서울의 구 한국은행 본관 같기도 하고, 옛날 헐린 중앙청 건물을 축소한 것 같기도 한데, 아뿔싸 무슨 건물인지 묻지를 못하고 말았다.
이제는 또 쇼핑할 차례
기념품 가게에 들어섰다. 아이들에게 줄 선물도 몇 개 골랐다. 아내에게 줄 선물도. 모처럼 부장이 외국에 나왔는데 우리 회사 국(局) 직원식구들에도 하나씩은 다 안겨야 그래도 체면이 서지 않겠나? 이것저것 골라 담다 보니 손에 든 바구니가 제법 무거워진다.
바구니가 무거워지면 지갑의 부피는 엷어지고 가벼워지는 것 아닌가? 에라, 그럴지라도 이 때 아니면 언제 마누라, 아이들, 직원들에게 기념 선물 또 하겠나, 기마이(?)한번 쓰는 거지 뭐. 눈대중으로 지갑을 꿰뚫어 본다.
아르미타지 ... 그 찬란한 보물의 바다여!
한마디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이 박물관 하나로 1년 먹고 살 세수(稅收)는 너끈할 것이며, 이 궁전 하나로 세계 속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그 가치를 인정 받구나”하는 감탄과 부러움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번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 뒤 얼마 되지 않아 필자가 한 강연회에서 이런 내용을 피력했다. “우리나라에는 천년 고도 신라 경주가 있습니다. 경주는 그 자체로서 세계문화유산이자 우리 문화의 보고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우리의 신라 경주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일천한 역사(314년)의 도시임에도 그 전체가 세계유산이고, 세계적인 보물단지 아르미타지 박물관이 있어 박물관 자체만으로도 빛나는 보고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하고.
그리고 또 있어요. 오래 전 얘기입니다. 고교 1학년으로 기억되는 세계사 시간 에 우리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총각 선생님 이셨는데, 당시 과목을 진행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게 떠올랐어요. 당시는 러시아가 아닌 소련이었으니까, 아마 도시 이름도 레닌그라드(레닌 사후 명명 : 1924~1991) 였지요. “세계에서 아름다운 도시는 프랑스 파리를 비롯해 이탈리아 로마 등 여러 곳이 많이 있지만 지금 레닌그라드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름다운 곳 중에서도 아름다운 도시다. 지금은 가기 어렵지만 나중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 보기를 권한다”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그 때 선생님은 세계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 갈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 부분에 와서 정리하다보니 그 당시 그 선생님이 떠올라 적어 봅니다.
그 때 선생님은 동글동글한 얼굴에 화를 낼지도 모를 것 같은 인상 후한 얼굴에 우리 학생들과 장난도 잘 치고, 미술도 잘 그렸던 선생님으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선생님도 70이 훨씬 더 지나셨겠지요. 후덕한 인상만큼이나 즐겁게 인생의 후반부를 보내고 계시리라 확신하며 기원해 봅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밖에서 대기하는 사람의 행렬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관이다.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은 우산을 바쳐 들고 차례를 기다리는데 여기서도 가이드의 ‘강조’의 말은 빠지지 않는다. “곳곳이 소매치기입니다. 기념품을 판매하는 저 사람도, 옆에서 부추기는 저 사람도 다 같은 한 패이니 절대 가방을 뒤나 옆으로 매지 말고 앞으로 매야 합니다.” 또 이어진다. “안에 들어가서 절대 앞 사람과 거리가 떨어져서는 안 되고, 바짝 붙으세요. 그래도 혹여 일행을 놓쳐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전화를 하거나 그것도 잘 안 되면 가장 처량한 목소리로 크게 ‘아리랑’을 계속 부르셔요. 그게 싫으시면 절대 앞 사람 놓치면 안 됩니다....ㅎㅎㅎㅎㅎ”
그렇게 우리는 드디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나는 그 땐 몰랐다. 바보같이. 아르미타지 박물관이 들어선 그 건물이 ‘겨울궁전’이란 점을. “여름궁전이 있으면 겨울궁전도 있느냐”며 당연히 궁금증을 풀어야 했다. 하긴 지금 생각해 보면 차 안에서 여름궁전을 설명하면서 겨울궁전에 대해 말한 것도 같은데 오직 여름궁전과 아르미타지 박물관에만 넋을 놓아서인지 내가 흘려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럴 때면 언제든 구원 군이 또 필요한 법 아닌가? 대한민국 최고의 지식창고 인터넷 백과사전이 있으니까. 금방 원군이 답(答)을 돕는다. 궁전은 러시아로 무슨 말인지 몰라도 (러시아어: Зимний дворец) 이렇게 쓴다고 한다. 거기에 ‘에르미타지’는 프랑스어(당시 러시아 황제들은 불어를 더 사용했다고)로 ‘조용한’ [은둔자의 집]을 의미한다고 당시 설명을 기록한 내 노트 초안이 일러준다.
이 궁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궁전으로서 제정 러시아 군주의 겨울을 위해 1754~1762년에 지어졌다.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양식(우아하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으로 대변되는 이 양식의 특징은 부드러운 곡선이 디자인 구성의 주조가 됨. 로코코는「인조석」(人造石)이라는 뜻으로 이 시대는 인조석을 사용한 화려한 궁전을 많이 지음)을 표방한 궁전은 바르토로미오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가 초안을 만들었으며 연둣빛의 색조를 띤다. 1,786개의 문과 1,945개의 창문이 있다. 예카테리나 1세가 첫 번째 주인이 되었다.
궁전은 현재 회화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박물관이기도 한 에르미타쥬 미술관(State Hermitage Museum)의 복합단지에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의 일부로서 1,057개의 홀과 방이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1826년 군사 갤러리가 문을 열어 332개의 국방계 인사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러시아의 2월 혁명 이후 겨울 궁전은 러시아 임시 정부 청사로도 쓰였다. 볼셰비키 정권의 겨울궁전 급습은 10월 혁명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강변을 따라 230m가량 뻗어있는 로코코 양식의 건물들은 지붕에 170개의 조각상까지 얹어 있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고 가르쳐 주나 어디 단 한순간에 볼 수가 있나, 그저 그림에 떡일 수밖에. 겨울 궁전 안 에르미타시(Hermitage) 박물관은 프랑스 루브르, 영국 대영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에 꼽힌다.
아직 프랑스도 영국도 가보지 못해 그곳 박물관이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명성이야 귀에 쟁쟁한 것 아닌가. 6개의 건물에 걸쳐 300만 점의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서유럽 예술품들이 대부분이지만 고대 그리스·로마, 심지어 이집트 전시실까지 있어 안내를 받아 들어선 방마다 그 의리 의리하고 방대하며 찬란한, 그래서 예술에 더 문외한인 이 필부(匹夫)의 눈에 그 황홀함은 혼을 빼게 하고도 남음이 있어 보인다. 예카테리나 2세 때 유럽에서 사 들여온 당대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이 이제는 이 나라의 최고 걸작이요, 보물이 되었다 하니 에르미타지에서 길을 잃지 않고 용케 대한민국까지 날아오게 된 게 나로선 천운(?).
전시실의 홀마다 방마다 그 무한함과 뻗어 나오는 황홀경, ‘황제의 옥좌’ ‘황금의 방’ ‘332점 초상화’ ‘황금 공작새’(예카테리나 2세가 선물을 받아 그의 23명의 여인 중 6번째 애인에게 선물했다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유작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부모님의 사랑이 주는 무한대와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사랑을 새삼 떠올리기도 한 순간이었다. 거기엔 ‘헤라클래스의 선택’(오른쪽 美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뽑을 것인가 아니면 지혜의 신 왼쪽 투구를 쓴 아테나를 가질 것인가를 번민하는) 등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작품 중에서 겨우 몇 작품을 보면서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촌놈 행세로 그저 이끄는 대로 가는대로 일행과의 끈을 놓치지 않고자 죽을 힘을 다 쏟아야 했던 겨울궁전, 에르미타지 박물관.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느새 ‘무엇이 있었더라’ 가물가물해지지만 눈앞에서 명멸하는 그 날 그 때의 황홀경은 사진 한 장을 통해 다시 떠올려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네바강을 연해 연두색으로 길게 뻗친 겨울궁전 에르미타지를 나와 버스를 타니 18:15분이다.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하는데, 강한 소나기가 빗줄기도 요란스레 쏟아진다. 조금만 늦었어도 저 비에 흠뻑 젖었을 텐데 하면서 차는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한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는데 다시 시계를 보니 지금쯤 서울 시각은 21일 밤 12시20분이 될 시간이다. 다들 꿈나라로 빠져들고 있겠지. 우리는 이제 에르미타지를 마지막으로 전체 여정이 끝 나가고.
6. 21
가자, 내 나라 대한민국 서울, 서울로!
이제 집으로 가는 길만 남았다. 앞으로 얼마나 두고두고 떠올리게 될지 모르지만 우리네 생에 있어 또 올지 다시 오지 못할지 모를 북유럽.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정이 공식 마무리 되었다. 우린 서울로 향하는 비행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준 가이드의 출국수속에 따라 공항 로비에서 각자에게 배부된 도시락을 우아하게 나눠 먹고 고참 누님으로부터 따끈한 커피까지 한 잔 얻어 마신 후 드디어 출국장으로 들어섰다. 검색이 되게 심했다. 혁대까지 풀게 하고 금속 탐지기 검사가 이어진다.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해 우리는 드디어 내 나라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향할 게이트(Gate)로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1시간 이상 남은 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여기도 저기도 나와 닮은 동양인, 몽골계 대한민국 여행객들이 도처에 앉아서 여행 이야기에 취해간다. 서울말씨도, 전라도 말씨도, 경상도 말씨 등 우리의 구수한 토종 언어들이 구수한 향기를 머금고 귓가에 다가온다. 나른함도 잠시, 지난 시간들이 하나의 필름 파노라마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것만 같다.
드디어 탑승 수속이 시작됐다. 그리고 좌석을 찾아 앉으니 밤 23:00. 비행기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공항의 풍경은 아늑하기만 하다. 러시아 항공사 기체와 더불어 대한민국 우리 국적기도 비상을 준비하듯 긴장으로 고요함으로 보인다 할까.
하지만 하늘은 백야현상으로 대낮같이 밝아 밤이 아닌 밤으로의 시간여행을 준비중이다. 이제 잠시 후면 이륙이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몇 시간 후에 다가올 장면들을 그려보면서.
■ 살뜰한 애국자, 대한민국 전초인들
국내 여행을 하든 외국여행을 하던 보고 싶은 대상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가면 수박 겉핥기밖에 되지 않는 법. 필자가 조선궁궐문화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하면서도 느끼는 건 마찬가지다.
해설사가 경복궁이나 창경궁 등 우리 궁궐에 대한 해설을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해설을 해주느냐에 따라 관람객들의 이해도도, 우리 역사에 대한 생각과 흥미도 다르게 이해하고 나타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돌아본 여행지 각지에서 우리를 이끌고 안내하며 맹활약을 펼치던 재외 국민, 해설 가이드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감사를 드리고 싶다.
젊은 청년가장이요, 그 나라 문학과 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생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거나 자녀들을 키우는 주부이면서도 모국에서 찾아온 내 나라 관광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양하고도 쉽게,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가며 안내하는 그들은 그 나라를 찾는 모국인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선생이요, 보호자며 현지 국가를 알리는 문화의 첨병이기도 했다.
어느 한 사람도 뒤짐이 없었다. 오랫동안 모국을 떠나 그리움과 향수에 젖어 있음에도, 어리게 보이는 청년들은 의젓했다. 의연했다. 성심을 다해서 짐을 나르고 문제를 해결하며 땀 흘리던 젊은 그들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때로 반복되는 일상일 수도 있고, 때로 마음 아픈 순간을 겪을 수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젊은 가이드들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감동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도움이 될 게 있다면 보태고자 했다.
처음 들어선 모스크바 공항에서 만났던 ‘드봉 자이젠(점심인사)’, ‘스파 시벌(감사합니다)’ ‘빽가(잘 가세요, 안녕)’을 가르쳐준 모스크바 국립대 언어학과 재학 중인 박준형 군에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에스토니아, 핀란드에 이어 마지막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문학도로 대학강단에 설날을 준비하며 최선을 다해 안내해준 금정환 군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대한민국의 최첨단 민간 외교관 역할로 그 나라 문화에 잘 녹아들어 서로에게 가교로서의 역을 다 하였다.
여정(旅程)을 마치며 나는 지갑 속에 들어있던 행운의 1달러 지폐를 금정환 군에게 건넸다. “소망하는 대학 강단에 서서 러시아 문학과 함께 한국 문화와 역사도 후학들에게 잘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하면서.
■ 여행기를 마치면서
700여년전 국제무역항 중국 칭위엔(현 닝보시 ․ 고려와 일본을 잇는 무역항)에서 항해의 돛을 올린 무역선이 순풍을 따라 동아시아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온 거센 풍랑으로 무역선은 표류하여 고려 신안 앞바다에서 난파되고 말았다. 우리는 그 배를 ‘신안선’이라고 부른다. 1323년 여름, 중국 국제무역항 칭위엔에서 돛을 올리고 일본으로 향하던 이 무역선은 신안군 임자 앞바다에서 난파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 1975년 8월 어느 날 전남 신안 섬 고기 잡는 어부의 그물에 물고기 대신 중국도자기 6점이 걸려 올라왔다. 700년 가까이 바다 속에 잠겨있던 무역선이 긴 잠에서 깨어난 순간이기도 했다.
이 우연한 발견은 아시아 수중고고학 역사에서 ‘세기의 발굴’로 이어져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여 동안 조사가 시작되면서 수심 20m 바다의 베일 속에 감춰진 신안선의 존재가 드러났다. 바다 속 갯벌은 수백 년 동안 배를 보호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중국 도자기 2만5천여 점과 금속공예품, 석제품 향신료 한약재 등 총 2만6천여점이 실려 있었다. 배아래 화물칸에서는 동남아시아 최고급 향나무 1천여 점, 중국 동전 8백만 개도 실려 있어 역사상 최대의 보물선이었다.
<신안선과 신안앞 바다에서 건져 올린 도자기들>
지난 11월19일 토요일 오후 필자는 호남선 종착점 남도의 항구도시, 유달산과 故 이난영 여사의 ‘목포의 눈물’로 잘 알려진 전남 목포의 한 박물관 해양유물전시관에 서 있었다.
【신안해저유물 40년 만의 귀향 - 신안선과 그 보물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건물의 외관에도 놀랐지만 진정 놀란 것은 그 안에 잘 진열된 전시물에 다시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안선이 발견되던 그 당시 필자는 목포에서 박박 깎은 머리의 고교생이었다. 그 때도 신안선과 보물 이야기는 수없이 인구에 회자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집 벽장에 청자 그릇 하나 정도 없으면 신안 사람이 아니고, 누구네 집 개 밥그릇도 임자 바닷가에서 건져 올려진 옛날 그릇’이란 근거 없는 얘기들이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필자 기억에 보물선이 발견되고 난 직후 몇 년 신안선도 방향을 찾지 못해 현재의 전시관 인근 노상 바닷가에 그냥 그대로 적치(積置)돼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러다 이 날 드디어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간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거의 완연한 형태의 보물선(신안선)을 대하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 노르웨이 오슬로 현지서 본 바이킹 선을 급격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의 간극, 4〜5백년의 지구 반대방향에서의 활동 공간 시차를 훌쩍 뛰어 넘어 1천년 이상 후의 후세인들 에게 선을 보이지만 그만한(위용이 있거나 또는 그 보다는 더 왜소하다는 표현) 배로 망망대해를 넘어 국가 간의 무역으로, 상대방 국적선을 무차별 공격하며 해상제해권을 장악한 선인들의 무용(武勇)과 담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신안앞바다에서 건져 올려진 보물들.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중국 도자기
2만5천여 점과 금속공예품, 석제품 향신료 한약재 등 총 2만6천여점이 실려 있었다>
그것은 오늘의 나에게 행운 중 행운을 안겨준 벅찬 감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극동의 대한민국(정확히는 중국이지만) 해양세력과 북구의 물러설 수 없는 강단의 바다사나이들이 ‘선박’이라는 매개체로 활동하다 수백년 세월 바다에 묻혀 잊혀 졌다가 다시금 역사의 현장으로 부상(浮上)해 당대를 증언해 주는 극과 극을 보면서 필자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헤아림 때문이다.
역사는 언제나 돌기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 나만의 작은 행동도 필부(匹夫)의 되돌려지지 않을 한 역사가 되는 것이고, 이 시간 거대 선박을 이끌고 대서양을 항해하는 마도로스의 파이프 담배연기도 경우에 따라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한강에서 서울숲으로 향하는 구름다리 위에서 바라본 한 아름 태양은 유난히 둥글고 붉게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하루를 더 찬란하게 불태우게 하기 위함이라도 되듯이.
■ 에필로그
드디어 끝인가 보다. 언제 시작했는데 이제야 끝이 나나? 참 무던한 것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처음 시작할 때는 업무를 고려해서 “2개월 내에는 마무리 해야겠다” 했는데 아니었다. 이유는 명백했다. 욕심을 부린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시일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어느 순간 필자가 존경하는 서정숙 이사님의 질책과 핀잔(?)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글을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러나 어쩌랴. 다른 글을 쓸 때면 저녁이 이슥하도록 단기간에 끝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이 글에만은 늦춰지고 또 늦춰지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부터는 게으름에 핑계 대기까지 이만저만 아니었다. “에라, 될 대로 되라. 연말까지 어떻게 되겠지?” 했는데 ‘헉’ 아니나 다를까 벌써 한해의 끝자락까지 와 버렸다.
이 ‘여행기’는 어떤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쓴 게 아니다. 소설이나 다큐멘터리 식으로 정리된 것도 아닌, 그저 지나간 여행일지를 여행담으로 ‘나’만의 1인칭 관점에서 읊조리는데 불과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제야 마무리함에 있어 혹시 여직도 이 담론을 기다린 함께 했던 그 날의 우리 식구 분들이 계시다면 일배일배(一杯一杯) 인사와 함께 죄송하고 부끄러운 말씀을 올리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일단 아직 문장도 잘 다듬어지지 않고 사진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지만 저 만으로서는 ‘탈고의 기쁨’이랄까 홀가분하다면 홀가분한 기분임을 토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해 주신 우리 김종두 방장님과 서정숙 이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 기분으로 오늘은 퇴근길 누군가와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눠야 할 것 같다.
뜨거운 여름날, 해가 지지 않는 북유럽 행선지 곳곳마다에서 웃음으로, 정겨운 말로, 간식을 나눠 먹으며 끝까지 함께 해주신 한 분 한 분 우리 여행팀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늘 건강과 함께 새해 소망 이루시며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2017. 12월 크리스마스가 보이는 날
뚝섬에서 흰 눈 쌓인 거리를 바라보며..........
금당 이현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