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청체성과 선교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17. 10. 23. 07:01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복음: 마태오 28,16-20


정체성과 선교
            

미국의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Erick Erickson)은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합니다.

 ‘나’가 확실해야 ‘너’가 확실해지고 ‘나와 너’가 확실해야 두 사람 사이에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 친밀한 관계도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 애매하면 상대방과의 관계도 애매해지는 것입니다.

이무석 교수가 군의관으로 있을 때 자해를 하는 한 청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는 툭하면 면도칼 같은 것으로 자신의 배를 그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문득 어두운 우주에 혼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너무 두려워서 면도칼로 배를 그어요.
통증이 오고 새빨간 피가 팍 솟으면 그 순간에 마음이 진정돼요.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오면서요.”

정체성이 온전히 성립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우주공간에 홀로 떠 있는 듯한 느낌,
죽은 건지 살아있는 건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너무 힘들어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도에서 동물에게 키워진 늑대인간 아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늑대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모가 늑대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체성을 지닌 아이들을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몇 년 새에 둘 다 죽어버렸습니다.
늑대가 인간과의 통교를 강요받는 상황에서 오는 정체성의 갈등을 견뎌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해를 하는 것도 내가 사람임을 확인하려는 노력입니다.
자신의 원천을 인정하지 않으면 영원히 정체성의 방황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동물이 자신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면, 육체적으로만 살아갈 것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짐승 취급을 받습니다.
부모님을 인정하면 비로소 인간이 되지만, 이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사람들과는 같은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 수준에서 관계 맺자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셨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비티(중력)’란 영화가 있습니다.
딸을 잃은 아픔으로 지구에서 아무 의미도 없이 살아오던 주인공,

그 여인은 공기도 없고 중력도 없는 지구 밖 세상에서 사고로 인하여 우주미아가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이것이 지구에 살고 있더라도 아무 의미 없이 누구 한 사람과도 친밀한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그를 도우러 옵니다.
물론 그녀를 돕다가 그는 죽고 맙니다.

그러나 적어도 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죽어서도 그녀의 꿈에 나타나 끝까지 포기하지 말도록 힘을 줍니다.
결국 그녀는 온 힘을 다하여 지구로 돌아오게 되고, 그 때 처음 딛는 발걸음은 예전의 무의미한 걸음이 아닙니다.

비로소 중력을 느끼고 발이 땅에 닿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땅에 키스를 하며, ‘고맙습니다.’라고 합니다.

나의 근원이 지구입니다.
지구를 떠나서는 참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가끔은 부정하고 싶기도 하지만 나의 원천인 하느님과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구와도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없는 무중력 상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끌림을 받아들임이 곧 중력이고, 그 중력을 벗어나서는 어떤 온전한 관계도 맺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무중력 상태에서도 어떤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줄 알았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비록 무중력 상태에 있지만 실제는 뿌리가 확실한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누군가를 다시 하느님 품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한 사람의 삶의 이유를 가르쳐 준 것이고, 이것이 곧 선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온전히 밝히기 위해서는 나의 원천을 부정하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육신을 받고, 영혼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 누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해야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인데, 그 과정이 바로 선교인 것입니다.
즉 선교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선교왕이 두 분 계십니다.
한 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뒤 항상 성호를 긋고 식사전후 기도를 잘 하십니다.
그분은 그것만 제대로 해도 많은 이들에게 선교를 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분은 옷가게를 운영하시는데 들어오는 손님 누구에게나
 ‘찬미예수님!’으로 인사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그분들이 성당에 대해 물어보고 그렇게 입교시키는 분이 일 년에 적으면 10명, 많으면 30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묵주반지를 끼고 경기에 출전했던 김연아 선수나, 자신이 성당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김태희,
또 오진혁과 기보배 양궁 커플 들. 이들은 밖에 나가 선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두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고, 이것이 곧 선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부끄럽게 여기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를 부끄럽게 여기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아직도 내 뿌리를 온전히 내리지 못한 무중력 상태에 있는 불편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하느님을 나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선교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와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임을 떳떳이 드러내는 것이 선교인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곧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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