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4일 [대림 제2주일]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일>
주일미사를 봉헌하러 경당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수도원 경당으로 연결되는 어둡고 긴 복도에 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헤매고 있더군요.
이리 저리 방향을 돌려보지만 낯설고 좁은 공간에서 비행이 무척 힘겨워 보였습니다.
자세히 바라보니 아주 작고 어린 참새였습니다.
갓 비행을 시작한 '초보운전자'가 분명했습니다.
미로처럼 연결된 수도원 복도를 빠져 나가기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 '초보'를 잡아 밖으로 내보내주려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사정거리 밖으로 도망가더군요.
더욱 안타까운 마음에 저는 어린 참새를 향해 마음 속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널 해치려는 것이 절대 아니란다. 이 화창한 주일 아침에, 이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무슨 고생이냐?
제발 그 자리에 가만히 있거라. 그리고 안심하거라. 널 안전하게 밖으로 데려다줄게.'
그리고는 다시 한번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거짓말처럼 참새는 가만히 앉아있더군요.
혹시라도 다칠세라 살그머니 손 안에 새를 넣었는데, 얼마나 작던지 제 손 안에 몸 전체가 '쏙' 들어왔습니다.
너무도 궁금했던 저는 손을 조금 벌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부드러운 솜털하며, 가늘게 전해지는 맥박이며, 한 생명의 신비가 생생하게 제게 전달돼 왔습니다. 참으로 귀여웠습니다.
가여웠습니다.
그 어린 녀석은 잔뜩 주눅 들고 겁먹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불쌍한 '초보'를 손에 쥐고 수도원 뒤뜰로 나온 저는 잔디밭에 앉아 가만히 손을 펼쳤습니다.
녀석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분위기 파악이 잘 안 되는 듯했습니다.
한참을 제 손에 앉아있더니 '포르르' 소리를 내며 건너편 나무로 날아갔습니다.
그 작고 어린 새를 바라보며 오늘 제 모습, 우리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우리 역시 때로 너무나 작고 어린 존재들입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지는 나약한 우리이지요.
기를 쓰고 안간힘을 다하지만 참담한 실패만을 거듭하는 우리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쳐 보지만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허탈함입니다.
어쩌면 우리 태도는 어린 참새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처지가 너무 가련하고 안쓰러워 자꾸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자유를 주시려고 지속적으로 다가오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그분에게서 멀어지고자 기를 씁니다.
그 작고 어린 새를 바라보며 '회개'란 주제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제대로 된 회개를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아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시는 분, 너무나도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과분하게도 죄인인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는 거창하고 대단한 그 무엇이기보다 아마 이런 것이겠지요.
지나온 나날, 지나온 발자국, 지나온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였음을 자각하는 일, 언젠가부터 다가왔던 그 시련의 높은 파도가 은총의 시작이었음을 깨닫는 일, 기나긴 병고의 나날이 영적으로 더욱 강건해지라는 하느님 메시지였음을 알아차리는 일, 그 견디기 힘들었던 깊고 아린 상처가 사실은 내 인생의 축복이었음을 헤아리는 일….
회개는 결국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자비의 품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를 자각하는 일입니다.
회개는 삶의 모든 국면에 깃든 하느님 손길을 찾는 일입니다.
회개는 부족한 나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도 이제 내 위주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 위주의 삶을 살아가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중심적 삶을 완전히 탈피한 삶, 온전히 예수님 중심적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순간순간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떠난 겸손한 예언자였습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고 또 버렸습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란 세례자 요한의 생애처럼 그 누군가의 배경이 돼주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이 저리 빛날 수 있는 것은 어두운 밤하늘이 배경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한 송이 꽃이 저리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은 대지가 배경이 돼주기 때문입니다"
(「연어」, 안도현, 문학동네 참조).
세례자 요한의 삶은 철저하게도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위한 배경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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