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된 이유가? 천주교신자가 된 이유가?
만일 만일, 그저 오로지, 진짜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행복해지기 위하여?
복받고 복받기 위하여? 죽은다음 천국가기 위해서? 등등이 진짜고,
고상한 투신 사회정의 이웃을 위해 목숨바침 뭐 같은건 +@라고 살짝 양념쳐서 고백하는게 전부라면,
이런것들 때문이라면,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 안하는게 도와주는거다.
더 좋은 종교 세련된 기술 테크닉 교리교설 가르치는 심지어 검증까지된
종교 모임 단체같은거 넘친다.
단월드니, SGi창가학회(남묘홴계교)니, 마음수련이니 선수행 초월명상 하는
모임을 권하겠다 진짜루....
천주교가두선교, 노상선교-책자를 "심각한,기가막힌" 문제로 삼은 근본 이유가 이거다.
우리가 천주교신자라는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은 진짜루 맞는가 따져보자는 작업이 되기를....바래서,
나주무당 율리아파 사람들하고, 열심 성당신자들이라는 우리들하고 도대체 뭐가 다른가.
따져보자고? 장소만 달리하고, 유니폼만 틀린거지 진짜 똑같지 않은가. 진짜.
뭔 말인지 모르겠는 분은, 뭐라 하지 말아달라. 제발.
걍, 저 사람은 좀 괴상한(?) 사람인가보다 하고...
그냥, 건너가셔 달라. 진짜루...
예수님이 왜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처참하게 사형당하신 건데, 죽임을 당하신건데
뭐와 그렇게 싸우셨는데, 뭣 때문에 누구때문에...누가 죽인건데, 뭔 죄목으로!
그분이 그토록 갈망하시던 것이 뭔데.
신자라고, 다 신자아닌 세상이 도래하였다. 짝퉁세상이라고 한다. 사람도 짝퉁 신앙도 짝퉁 뭐도 짝퉁,
짝퉁이 바로 사이비다. "빛난다고 모든게 황금은 아니듯이",
이건 아주 확실하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경멸받고 업신여김 당하는
가득넘치는 대한민국의 기독교신자들 천주교신자들을
생각해보면 아주 더 그렇다.
왜 그리스도인인가?
최형묵
0.
"왜 그리스도인인가? 사람이면, 참으로 사람이면 그만이지 어째서 또 그리스도인이라야 하는
가? ... 대체 그리스도인이란, 오늘의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 비그리스도인도 사랑을,
정의를, 삶의 뜻을, 선인.선행을, 사람다움을 옹호하고 있다. 또 흔히는 이 점에서 그들이 그리스도
인보다 앞서가기도 한다. 이처럼 다른 사람도 같은 말을 한다면 또 무엇을 어쩌자는 그리스도인인
가?" (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중에서)
1.
이런 명제를 떠올려 봅니다. "그리스도교는 진리/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하나의 독립적인 명제로
서 이와 같은 진술은 어떤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교 자체에 한정
해서 말하는 것인 한 별다른 문제를 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교'에 비견될 수 있
는 다른 종교나 혹은 일정한 가치체계 등과의 관계 속에 놓일 때 문제는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그리
스도교가 아닌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 그 명제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논
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만'이 진리/구원에 이르는 길이다"를 의미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교는 진리/구원에 이르는 길 '가운데 하나'이다"를 의미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
다는 것입니다.
지배적인 그리스도교의 전통, 그리고 대다수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는 전자의 논리가
지배적인 입장이 되어 왔습니다. 한편 종교다원 사회로 이해되고 있는 현대의 일각에서는 후자의
입장이 선호되고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전자의 입장은 확고하기는 하되, 아무래도 그
리스도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배타적 독선의 논리로 보인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반면 후자의 입장은 매력적이기는 하되, 그리스도인들에게 '굳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남깁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해석은 상호모순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2.
최근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이와 관련한 논란이 뜨겁게 일어나 일종의 현대판 종교재판이 행해지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태를 보면서 이와 관련한 논의가 마치 전혀 새로운 것인냥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전혀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이미 성서 자체에서도 하나의 문제거리가 되어 왔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
전서 3장 18-22절은 그리스도께서 갇혀 있는 영혼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그 영혼들
은 노아 홍수 당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연히 하느님, 그리스도를 믿
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비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비그리스도
인들의 구원 가능성,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대속적 능력의 보편적인 적용 가능성을 뒷
받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이 문제는 초대 교회 변증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변증가 가운데 한 사람인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철학이란 보편적인 것이며 삶의 의미에 관한 포괄적인 진리를 갖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기에 진리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것이 어느 것이든, 그리스도교적 진리가 존재한다(『변명』 II.13)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모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든가, 그리스도교만이 진리를 발견했다든가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적 진리에 원리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는 진리란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누구든지 로고스를 따라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교도이다"(『변명』 II.10)라고 하면서 나아가 그러한 사람들로 소크라테스, 헤라클리투스, 엘리야 같은 사람을 들었습니다.
이에 관한 논의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 논의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두어 가지 예를 든 것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그리스도인의 구원, 그리고 비그리스도인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그간 서구 교회에서는 어떤 틀로 논의해왔으며, 그것이 지니는 문제성은 무엇인지 잠깐 짚고 넘어가는 것은 나쁘지 않으리라 봅니다.
이에 관한 가장 전형적인 논의 모형은 아마도 칼 라너가 이야기했던 '명시적 그리스도인'과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나누어 이야기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이른바 명시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것 혹은 그리스도가 추구한 삶과 다르지 않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고, 나아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그 취지인 것 같습니다. 이 밖에도 '특수한 소명'/'일반적 소명', 혹은 '특수한 직접적 신앙'/'일반적 간접적 신앙'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방식 역시 라너의 설명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진리 혹은 구원에 이르는 길로서 그리스도교적 형태가 명시화되고 직접적인 것이라면, 그 밖의 길들은 일반적, 간접적 혹은 암시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의들은 서구의 그리스도교가 비서구지역으로 전파된 이래 다종교 상황을 맞으면서, 특별히 가톨릭의 경우 제2바티간 공의회 이후 활성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들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과의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해 주었다는 점에서 적극적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그러한 논의들은 여전히 서구 백인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의 진리성, 혹은 가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으로일 뿐, 완전한 진리, 완전한 구원은 그리스도교만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어떤 불교도가, 혹은 종교인이 아닌 어떤 맑스주의자가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을 보고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을 때 어떤 느낌을 갖게 될 것인가 하는 측면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과는 다른, 심지어는 적대적으로 여겨졌던 사람이 자신을 인정해 준다는 점에서는 일단 반가워할 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결국 그 사람의 가치기준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인정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 생각될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공존이 아니라 한쪽에 의한 포섭이 가능할 뿐인 논리라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공존 가능한 논리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데, 그 논리를 찾는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상대화를 동반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서두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왜 굳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가?"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들, 그리고 그 밖의 세속적 가치체계나 이념들은 모두 다 자기 나름대로의 완결구조를 갖추고 있고 나름대로의 진리성을 주장하는 것을 일반적 특징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일정한 배타성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이 유독 강하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일정한 역사적 요인이 있다고 봅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애당초 야훼신앙으로부터 연원하는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은 지난 이천년간 서구 교회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와 그것을 옹호하는 그리스도교 자체의 존립과 확장을 위한 배타성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본래 억압받는 민중의 종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억압 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주요 동기로 하고 있으며 억압 체제와의 투쟁 가운데 형성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당연히 억압 체제를 용인하거나 온존시키는 요소들은 철저히 배제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일단 강력한 배타성을 띠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것을 '당파성'이라 이해합니다. 이른바 '민중적 당파성'인 것입니다. 이것은 애매모호한 화해론, 포용론, 다른 말로 하면 사이비 보편성과는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적대적 세력들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애초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규정한 이 '민중적 당파성'은 자기자신만의 존립을 위한 배타성과도 다른 것입니다. 이 당파성은 적대적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는 세계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계기적으로 불가피하게 취할 수 밖에 없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배타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적대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세력들 가운데서 억압받는 민중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목적을 지닌 것이지만, 나아가 민중의 해방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에 사로잡혀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해방까지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중적 당파성은 진정한 보편성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적 의미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배타성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리라 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는 현재의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방금 저는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종교적 신앙이든 일반적 신념이든 모든 가치체계는 그 나름대로의 진리성을 주장하는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유독 배타성을 강하게 띠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역사적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의 흔히 보게 되는 그리스도교의 배타성과는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현재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을 인정하는 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관련해서 이야기하자면, 첫째 어떠한 종교나 신념체계가 내세우는 교리나 논리는 그 자체로서 진리성이 입증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실현될 때 비로소 입증되는 것입니다. 둘째 역사적 상황에 의해 규정된 요인은 역사적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변화된다는 특성을 지닙니다. 따라서 기존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규정된 요소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파기되거나 아니면 다른 형태로 재현됩니다. 물론 재현되는 형태나 그 의의도 다양할 것입니다. 어쨌든 역사적 상황에 의해 규정된 요인은 항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변모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역사 자체에서 이상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두 가지 측면 모두 다 확인 가능합니다. 성서적,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전통은 말과 교설로서가 아니라 행위와 사건을 통하여 형성되고 전승되어왔습니다. 출애굽의 해방사건...예수 그리스도의 민중운동... 등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형성하고 전승한 모체들입니다. 또한 시대적 상황이 변함에 따라 성서적, 그리스도교적 신앙 형태의 중대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계기들이 있지만 유다교에서의 그리스도교로의 반전, 가톨릭에서 개신교로의 반전 등 두 가지 경우만 보더라도 그 의의는 확인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것들이 각기 다른 하나의 유형들로 자리잡게 되었지만 새롭게 탄생하던 역사적 계기에서는 새로운 의미들을 지녔던 것들입니다. 해방사건에 대한 기억과 그것의 재현노력으로 이어져온 야훼신앙이 억압당하고 새로운 억압체제를 옹호하는 교설과 체계로 바뀌었을 때 새로운 실천과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었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 운동이 다시 현존하는 국가권력과 이에 결탁한 교권구조와 동일시되는 관계로 전락되었을 때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그것은 새로운 양식의 그리스도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양대 계기에서 중요한 대립구도는 '율법'/'복음', 그리고 '제도에 의한 구원'/'믿음과 결단에 의한 구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어떠한 쟁점이 부각되었든간에, 중요한 것은 인간을 억압하는 가치체계와 교설, 그리고 그에 따른 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당대에 바로 그 질서에 의해 억압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그 질서는 사람들만 억압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마저 억압하고 유폐시켰습니다. 하느님은 율법조문에, 그리고 교회의 위계질서 내에 갇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체계와 질서에 따르면 하느님은 결코 '역사의 주'일 수 없었습니다. 율법의 주관자요, 교회의 주관자일 뿐 그것들 밖의 세상에서 일하시는 것은 감히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통하지 않고도 세상에서 일하시기 위해서는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자와 교황의 재가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입니까? 오늘날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인가?"라고 묻기 이전에 "무엇을 어쩌자는 그리스도인인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존립 자체를 위한 배타성은 더 이상 고수되어야 할 원칙이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을 인류 대속의 사건으로 설교하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장본인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유다인들을 '못된 놈들'로 저주하고 탄압한 서구 그리스도교의 과오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세계 도처에서 무지몽매한 야만인들을 '회개'시킨다며 총칼을 들이대며 그리스도교를 강요한 일은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아니, 하느님도, 그리스도도 모르는 놈들이 어떻게 영혼을 가진 존재들일 수 있느냐고 생각하면서 무자비하게 학살한 일들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습니까?
유다인, 불교도, 이슬람교도, 세계의 수많은 토착종교 신봉자들, 혹은 맑스주의자들이
반그리스도교적 악마일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이름과 형식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냐가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불의한 이 세상을 변혁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여의도에 백만이 모이고 매주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모인다 한들 진정으로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실현될 수 없다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분열된 세상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는 일,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사명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름을 가졌다 하더라도 바로 그러한 일에 참여하는 이들이라면 함께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을 함께 묶는 연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켜져야 할 배타성이 있다면 바로 이들만의 배타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즉 불의한 세력을 단호히 거부하는, 앞서 말한 '민중적 당파성' 바로 그런 배타성 말입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는 문제, "왜 굳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할 차례입니다.
저는 우선 역사적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는 상대화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는 어떤 종교나 가치체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기 진리성을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고유한 형식 속에서 나름대로 보편적 가치들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종교나 가치체계들은 고유한 방식을 통해 보편적 가치들을 말하는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 고유한 방식의 틀 내에서 각기 유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만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의 공통된 언어요, 고백인 셈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치 진리를 독점한 것인냥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른 것에서 다른 언어로 표현되었더라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을 반갑게 여겨야 할 것이요, 그러한 연후에도 명백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의 '전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한 하느님, 우리가 깨달은 진리를 통해 함께 기쁨을 누리자는 권유이어야지 강요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리고 그분의 삶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을 증언할 따름인 것입니다. 교회를 자랑할 것도, 그리스도교를 자랑할 것도 아니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할 일입니다(고전 2,23.31 참조). 그분은 이 땅의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 곧 민중들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분입니다(마태 25,31-46 참조).
※ 한국신학연구소 간 [살림] 1992.11 수록.
'특강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3영웅 (0) | 2011.05.17 |
---|---|
대우 중공업 김규환 명장이 삼성에서 강의한 내용 (0) | 2011.05.12 |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 세계교회사 인물 100선 (0) | 2011.01.12 |
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1) (0) | 2011.01.12 |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0) | 2011.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