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故장영희 교수
張교수 사랑이 스미듯 학생들에 희망의 꽃비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印稅로 만든 장학금을
맨처음 받다니 벅차…"
"학생들이 열정을 다해 최고가 되어준다면
동생도 좋아할 것…"
지난 25일 오후 6시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학교 인문관 112호 교수연구실 옆에서 한 남자가 문패를 보며 서성이자 대학생 3명이 다가서며 물었다. "혹시…. 장 교수님 오빠 아니세요?" 1년 전 작고한 고 장영희 교수의 오빠 장병우(64)씨였다. 장씨는 1년 전까지만 해도 여동생 명패가 붙어 있던 연구실 문에 낯선 이름이 보이자 어색해하던 참이었다.약속 시간에 맞춰 나타난 학생들은 김하연(23·중국문화학 4년), 김진아(25·경영학 4년), 오재준(24·영미어문학 2년)씨였다. 장씨는 처음 보는 학생들이었지만 "네가 하연이, 진아, 재준이로구나"라며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했다. 장씨는 "맞아, 내가 '장 교수 오빠'야"라고 말하곤 연구실 옆 추모 현판을 바라봤다.
"제자들을 무한히 사랑하는 스승으로서 생애를 바쳤던 고 장영희 교수(1952~2009)를 기리기 위하여 '장영희 스칼라쉽'을 제정하고 그 뜻을 이 패에 담습니다. 2009.9.14"
3명의 학생은 '장영희 장학금' 제1호 장학생들이다. 장 교수 유족들은 수필가이자 영문학자였던 장 교수가 지난해 5월 9일 세 차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그해 9월 그의 이름을 붙인 장학금을 만들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것이 고인이 남긴 뜻"이라며 장 교수 퇴직금과 수필집 인세(印稅)를 합쳐 5억원을 기부했다. 세상을 등지기 한 달 전, 척추암이 간까지 전이된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제자들을 격려하는 이메일을 쓰고 용돈까지 남겼던 그였다.
- ▲ 25일 오후 작년 5월 작고한 서강대 영문과 장영희 교수의 오빠 장병우(맨 왼쪽)씨와 ‘장영희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서강대 교정에서 장 교수의 유고집‘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를 손에 들고 장 교수를 회고하고 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서강대는 지난 19일 학과장 면담과 추천을 통해 장 교수가 몸담았던 인문사회계열에서 장학생 3명을 선발했다. 학교 관계자는 "시련 극복이 삶의 전체 모습이 돼버린 장 교수의 뜻을 이어받을 학생들을 뽑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등록금 3분의 2에 이르는 장학금 240여 만원씩을 받는다.
하지만 흔한 장학금 수여식이나 장학증서도 없다. 장 교수 가족은 그저 학생들과 식사나 한 끼 하기로 했다. 오빠 장씨는 "자유분방했던 영희는 형식적인 걸 싫어했다"며 "공식적인 행사보다는 조촐한 식사라도 같이 하는 게 영희의 뜻일 것 같아 학교 측의 양해를 구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장학금을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 자리까지 마련해 주니 더욱 고맙다"고 했다.
한 학생이 "(장영희) 교수님이 남장하고 오신 듯 닮아 깜짝 놀랐다"고 하자 장씨는 "눈매가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며 지갑에서 장 교수의 오래된 흑백 사진을 꺼내 보였다.
"영희의 장학금을 첫 번째로 받게 된 거 진심으로 축하해요. 내가 바라는 건 열정을 가진 학생들을 좋아했던 영희 뜻대로 항상 최선을 다해줬으면 하는 거야."
장씨는 장 교수 사인이 담겨 있는 유고집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한 권씩을 선물했다. 그러자 학생들도 저마다 가져온 책 한 권씩을 가방 속에서 꺼냈다. 장 교수의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오는 길에 다시 한 번 읽었다는 김진아씨는 "내 생일에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며 "폐암 초기였던 어머니도 항암 치료를 받은 적이 있어 교수님 일이 남 일 같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했다.
장 교수의 '영문학 개론' 수업을 들었던 오씨는 장 교수에게서 선물 받았다는 '내 생애 단 한 번'을 내보였다. 첫 장에는 "나의 사랑하는 장영개(장영희의 영문학 개론) 오재준, 내 생에 단 한 번의 사랑과 열정으로 큰 꿈 이루기를…. 장영희"라고 쓰여 있었다. 오씨가 "그런데 학점은 B 마이너스밖에 못 받았다"고 하자 장씨는 "영희가 원래 교실 안과 밖에서 모습이 다르지?"라며 웃었다.
장씨와 3명의 학생은 학교 근처 고깃집으로 옮겨 식사하는 것으로 장학생 선발 기념행사를 대신했다. 외국문학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김하연씨는 "열정적으로 번역활동을 하셨던 장 교수님은 나의 롤(역할) 모델이었다"며 "교수님의 인세로 주는 장학금을 받는다니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장씨는 장 교수가 척추암에 걸리고 나서 조선일보 칼럼에 썼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영희도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게 된 걸 알고 있을 거야. 영희가 말한 대로 삶의 열정으로 최고가 돼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 그걸 아마 영희도 좋아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