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 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2009. 4. 16. 19:04

 

서울에 푸짐하게 첫 눈이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 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모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 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녀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 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정호승,「이 짧은 시간 동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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